인체의 신비

일상 2021. 2. 5. 15:45

  내 키는 158cm. 결혼 전까진 쭉 48kg 정도를 유지하다가 결혼하고 시험관 하면서 55kg까지 살이 쪘다. 임신 초기에는 살이 52kg였고, 현재 임신 36주 1일의 내 몸무게는 62kg 정도 된다.

  쌍둥이치고는 살이 별로 안 쪘고 배도 겁먹었던 것보다는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뱃속에 각각 2.5kg, 2.4kg의 딸아이 둘이 있다. 단태아는 커봤자 4kg정도인데 나는 그보다도 1kg가량 무거운 무게를 뱃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난 키도 작고 몸 둘레도 엄청 작은 편이라 과연 이 허술한 몸에서 쌍둥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잘 버틸까? 언제나 의문스럽고 걱정스러웠는데 신기하게도 내 자궁과 배는 무한정 잘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튼살도 없다.

  우리 엄마는 결국 작년 10월 25일에 돌아가셨고, 그때는 임신 21주 지난 시점이었다. 엄마는 참 좋은 계절에 하늘나라에 갔다. 장례치루는 내내 날씨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엄마가 누워계실 때 조차도 난 만삭 때 돌아가시거나, 산후조리원 있을 때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지금 당장 돌아가셨으면 좋겠단 마음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난 내 걱정만 한 것이다. 자식은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의식이 없어지고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되었을 때부턴 차라리 빨리 돌아가셨으면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의식이 없는 와중에 눈물을 몇 방울 흘리셨는데 무슨 생각하면서 우신 걸까. 나중에 내가 죽어 엄마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한편으론 엄마가 돌아가신 것과 동시에 내 기억은 다 잊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나를 기억하시거나 지켜보고 계시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엄만 편치 않고 걱정만 하실 게 뻔하기에.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하나님이 너무 밉다. 코로나여서 교회도 안가고, 동영상 예배도 안 드린다.

  엄마랑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외삼촌이 임종실에서 엄청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를 땐 화가 났다. 아마도 그게 외삼촌 나름의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친척들은 엄마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죽기 전에도 편안하신 거라고 위안했지만 죽기 전에 표정이 편안하신 거 하나도 안 감사했다. 난 우리 엄마가 살아계신 것에 감사하고 싶었다.

  장례식장에 온 친척과 엄마 지인들 그리고 내 친구들은 임신 중이니 아기 생각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알겠다고 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다들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임산부이기 이전에 35년 넘게 [나]로 살아왔는데 세상에서 가장 날 사랑해줬던 사람이 죽었는데도 내 감정보다도 아기들이 우선이 돼야 한단 말인가.

  오직 내 남편 하나만 그런 말을 안했다. 내가 미친 듯 울어도 남편은 뱃속 애기들 생각해서 울지 말란 말은 안 했다. 그래서 난 남편을 더욱더 사랑하게 됐다.

  임신 16주 쯤에 성별 들으러 가기 전에 뭔 자신감인지 남녀 쌍둥이일 것이라 확신했는데 둘 다 딸이란 얘기 듣고 한 달을 우울했다. 임신에 집착한 이유 중 가장 큰 게 남편 똑 닮은 아들을 낳고 싶어서였는데... 아들이 없다는 생각에 너무 아쉬웠다. 사실 지금도 문득문득 둘 중 하나는 남편이랑 똑같이 생긴 아들이었음 좋았을 것이다 싶어서 우울하다. 하지만 딸들이기 때문에 내가 임신한 중에 매일같이 울었던 것도, 장례 중 무리한 것도 다 이해해주리라 생각한다.

  아빠는 나한테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놓고선 또 언제 그랬냐는듯 사과 한마디 없이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다. 엄마가 돌아가셔도 아빠가 그다지 안쓰럽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아빠를 내 맘에서 떠나보낸 것 같다. 한편으론 아빠가 엄마를 괴롭힌 벌로 혼자 외롭게 사는 형벌을 받았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12월 중순부터 휴직했고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리며 남편을 기다린다. 시간도 엄청 많은데 의외로 책도 별로 안 읽고 짧게라도 일기를 쓰던 버릇을 놓아버리니 너무 무식해지는 것 같아 이렇게 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일기를 쓴다.


내가 선택한 가족

일상 2020. 6. 29. 17:09

  피가 섞인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끊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나의 남편만이 내 의지로 선택한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제일 가까운 나의 가족인 것이다.

  남편을 만나던 해의 6월에 내가 죽어야만 이 모든 고통이 끝난다는 생각이 약 일주일이상 지속되었다. 주님께 울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때 들었던 노래가 Bach의 비올라 협주곡이다. 이대로 살아봤자 내 인생에 좋은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날 고통 없이 데려가 달라고 어느 날 저녁 난 울부짖었다. 그 이후로는 Bach 음악을 들을 때마다 고통받는 인간의 극복 의지 같은 게 느껴진다. 내가 정말 죽도록 괴롭지만 끝내 내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겠다는 그런 극복 의지.

  미친 여자처럼 혼자 그렇게 다 쏟아낸 후, 신기하게도 응답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정신 병원을 못가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신부님한테 고해성사라도 해볼까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씨의 다음날 아침, 죽고 싶다는 기분은 씻은 듯 씻겨 내려가고 없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던 내가 어렴풋이 신의 존재를 느낀 사건이었다. 

  2018년 6월 큰 위기를 넘기고 10월에 지금 남편을 만났다. 6월에 내가 바라던대로 죽었다면 어땠을까. 내 남편을 보면살아있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든다. 동시에 하나님이 날 사랑하심을 매일같이 느끼고 있다. 6번에 걸친 시험관도 엄마의 투병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남편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다. 남편 정말 사랑해. 


두 줄

일상 2020. 6. 25. 16:30

  양가 부모님 계신 비교적 화목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17살쯤 되면서부터 어렴풋이 내 인생 뭘하든 남들보단 좀 어렵구나.. 란 생각을 했다. 남들은 큰 어려움없이 해내는 것이 나한테만 너무 어려워서 혹시 나 발달장애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다.

  이런 나의 운명이 보통은 피곤했고 불만족스러웠지만, 딱 한가지 좋은 점은 있다. 바로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 나에게 갑자기 어떤 행운이 딱! 하고 일어나서 뭔가가 된다? 이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준비했고 남들보다 더 노력할 수밖에 없다. 뭐가 됐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결과는 그닥 좋지 않았던 적이 대부분이지만.

  남편은 언제나 걱정투성이에 최악만 생각하는 나때문에 잘 될것도 안된다고 말하곤 하지만, 글쎄 어떤 일이 잘된 건 내가 최악이 발생한다는 가정하에 준비를 했기 때문에 잘된 것이지 원래 잘될 일은 아니었을거다. 원래 내 운명대로라면 아마 망해도 몇 번은 망했을 일들도 많다.  그래서 별 노력없이 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샘이나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결혼도 남들보다 어렵게 느즈막히 했으니 임신은 좀 쉽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웬걸. 역시나 난 그럴리 없었다.

  2018년 2월부터 병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중간에 복강경 수술 두번에 유산 한번을 겪으며 인공수정 1회, 시험관을 6회나 했다. 너무 실패를 하다보니 6월 중순 6번째 시술이 끝난 뒤에도 이번에도 또 실패겠지. 실패해도 저번처럼 울고불고 난리치지 말자 다짐에 다짐을 또 했는데 이번 이식 후에는 다른 때와 느낌이 좀 달랐다.

  간혹 너무 임신을 하고 싶은 마음에 허구로 증상을 느끼기도 한다길래 기대를 안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는데, 결국 못참고 임신반응 피검사를 가기 전에 임신 테스트기를 해봤다. 그런데 두 줄이 나오는거다. 그렇게도 바라던 두 줄. 

  임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시행한 피검사를 했고, 그 결과 수치 300 이상으로 임신 안정권이었다. 막상 1차 피검사가 안정적으로 나오니 2차 피검사 수치가 비정상으로 나오면 자궁외임신일 수 있으니까 흥분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지만, 어제는 너무 기뻐서 남편이랑 끌어안고 맘껏 좋아했다. 요즘 정말로 나쁜 소식만 듣던 나보고 힘내라고 아기가 찾아온 것같다. 아마도 임신 이후도 쉽지 않겠지만, 일단 며칠간은 기쁜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

  부디 다음주 2차 피검사도 잘 나오길.


  어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는 다시 혼자 떠드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만큼 남한테 피해 안주면서 위로 받는 방법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엄마의 암이 두번째 재발했을 때만 해도 두번째 재발한 건 남아 있는 암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두번째 재발 후 수술하고 항암 치료 끝난 후 1년 동안은 엄마도 건강하셨다.

  세번째 재발부터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두번째 재발 소식 들었을 땐 울지 않았지만, 세번째 재발 소식 들은 뒤론 기도하면서도 회사에 앉아 있으면서도 눈물이 주룩주룩 나왔다. 지독한 무력감이 들었다. 아무리 애써봐야 엄마 몸의 암세포가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많이 슬펐다.

  세번째 수술 후 엄마는 앞선 수술 때보다 많이 힘들어 하셨고, 항암약을 아무리 때려 부어도 암수치는 떨어지기는 커녕 계속 오르기만 했다. 청와대 청원까지 올렸던 비싼 약을 내가 강력하게 요청해서 엄마가 복용하게 되었지만, 항암보다 더한 부작용으로 엄마는 이 약을 먹으면서 사느니 그냥 맘편히 죽고 싶다고 하셨다. 결국 3주를 못드시고 다시 온몸에 암이 퍼졌고, 이젠 수술도 못하는 상황이다.

  엄만 저번달부터 폐에 물이 많이 차서, 흉관을 꽂고 생활 중인데, 막상 엄마가 돌아가실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엄마가 그냥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셔도 좋으니까 살아만 계셨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설령 엄마가 계속 흉관 꽂고 산소 발생기를 끌고 다니며 혼자 밥도 못드시는 한이 있더라도 나랑 통화하고 눈 마주치고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엄마가 아프신 뒤로 돌아가시면 어떨까... 란 생각을 항상 했지만, 입밖에 올린 적은 없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정말로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정말 이대로 못 일어나실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회사에 와서 일은 하고 있지만, 이게 맞는건지도 잘 모르겠다.

  원래도 친구가 없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보니 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회의가 들었다. 조심스러워 그럴수도 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진심으로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지금 상황을 말해야 그나마 어떡하냐고 하는 정도. 20년 혹은 거의 30년을 알고 지낸 세월이 참 무상했다. 내가 바라는 건, 엄마 상태는 어떠시고 넌 어떻게 지내냐 그 한마디인데. 그 정도도 해주는 사람이 없더라.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실망했지만 혹시 나도 과거에 내가 실망하고 있는 사람들 같이 굴진 않았나 반성도 했고 앞으론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다.

  그러다 어제 사건이 터졌다. 나에겐 직장 생활 시작부터 계속 함께한 친구가 있는데, 언제나 아침에 출근하면 메신저로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친구가 해외로 파견을 갔을 때도 단 하루도 대화를 안한적 없는 친구. 친구가 5년 전 유방암에 걸렸을 때도 비록 옆에서 크게 도와준 건 없어도 당시 내가 살던 인천에서 정말 먼 친구 집에도 종종 가고, 친구가 가끔 말을 걸면 바로 바로 대답을 해주려고 했다. 무엇보다 그냥 원래대로 대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친구는 올해 8월이면 5년이 지나 이제 완치 판정을 앞두고 있는데, 아무래도 회사에 내 또래 동료도 한명도 없고 내가 워낙 요즘 힘들다보니 친구에게 암 관련해서 말을 많이 했다. 우리 엄마 상태에 대해서도 많이 말했고.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말한다한들 걔가 어찌해줄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엄마가 네번째로 재발하고 점점 상태가 악화되는데 친구에게 말을 하면 답이 없거나 90%이상의 답이 "ㅇㅇ" 이거였다.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성의있게 답해줄 수 없는거냐고 말하려다가 괜히 사이만 어색해질 것 같아서 그냥 아무 말 안했다.

  그런데 어제 친구가 자기도 암환자였어서 항상 암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데 요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암이 줄어들지 않는다. 암이 정말 무섭다. 는 말 하는거 듣는 게 힘들어서 답 안한거라고, 지금 너도 힘든데 이런 말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는 암환자였던 적은 없고 암환자의 보호자만 해봐서 걔의 심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울컥했다. 그래... 그렇게 듣기 싫어서 말 안했던 거구나 싶어서.

  나는 너랑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서 털어놓은 건데 의도치않게 널 괴롭게 했다.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이런 게 무슨 친구야? 란 생각이 들어서 넌 우리 엄마와 암종도 다르니 재발 안할 거라고, 그동안 고마웠고 잘살라고 말하고 떠나보냈다.

  집에 와서 남편과 얘기를 하는데, 내가 평소에도 좀 화가나면 꼭 그 순간을 못참고 상대방한테 상처되는 말을 한다면서 그 친구도 정중하게 말했을 거 같은데 그냥 가만 있지 그랬냐... 요즘 내가 너무 엄마 얘기를 많이 하긴 한다면서 자기는 그 친구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은 알 거 같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내가 그렇게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인가 그래서 주변에 이렇게 친한 친구 하나 없는건가. 싶어서 또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결국 남편과도 투닥거리고 나 자신에 대한 혐오로 괴로웠다. 내 성격이 이렇게 그지같아서 주변에 사람이 안남는건가.. 그래서 젊어서 남자와도 여자와도 문제가 많았나 싶은거다. 내 인생 전체가 부정당한 기분.

  회사와서 일도 해야하고 오늘 아침 일찍 병원가서 피도 뽑아야해서 결국 마흔 가까워지면서 한번쯤은 인간관계 개편이 필요한 거라고, 인간관계에서 알고지낸 기간이 전부는 아니니까, 앞으로 남은 세월동안 더 친한 친구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좋든 싫든 내 말을 잘 들어주는 남편에게 더 잘해줘야겠다 생각하고 마음을 다독였지만 20대 초반부터 어려운 세월 함께한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나니 슬프다. 애인이랑 헤어진 것보다 훨씬 더.

  오늘부터 다시 수양하는 기분으로 성격을 개조한다는 기분으로 참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우리 아빠를 보면 타고난 성향은 죽어도 못바꾸는 것같지만, 난 아빠가 아니고 노력하면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 더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고 성격 파탄자라는 자기 혐오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책도 지금보다는 더 읽고, 독후감도 더 정성들여서 쓰는 버릇을 들이고 실없는 인터넷 뉴스 보는 시간도 좀 줄여봐야겠다.

  그리고 정말 힘들고 떠들고 싶으면 이렇게 블로그에 와서 혼자 떠들어서 남한테 피해를 안주고, 화가 나면 맘속으로 1부터 10까지 세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모란꽃

일상 2019. 12. 6. 15:06

  작년 봄 우리 집 베란다에는 모란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꽃이 피기만 기대하며 모란 화분을 애지중지하던 우리 엄마는 꽃이 필 무렵 수술을 하게 되었고, 결국 모란꽃이 활짝 피고 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들이 보면 대단하다고 할 만큼 난 많이 울지도 않았고, 쇠약해진 엄마를 매일 같이 마주해도, 씩씩하게 회사도 잘 다녔다. 내가 남들보다 강해서 해야 할 일을 다 해낸 건 아닌 거 같고, 이상하게 난 우리 엄마가 완치될 것만 같았다. 비록 두 번째 수술이지만, 첫 번째 수술에서 미처 못했던 치료를 하는 거라고, 다시 재발한 거 아니라고 나를 계속 다독였다. 그렇게 잘 버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거실에서 멍하니 흰 모란꽃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자기 좀 봐달라고 모란꽃이 드디어 피었는데, 우리 엄마는 저렇게 귀엽고 예쁜 모란꽃 한 번을 못 보고 병원에 내내 누워 계신단 생각에 어찌나 슬프고 원통하든지.

  올해 재발 소식을 들었을 땐 슬프기보단 너무 놀라웠다. 우리 엄마 작년에 항암 했는데? 며칠 전 추석 때만 해도 나랑 동인천까지 같이 걸어가서 휴지통도 사고, 카페도 다녀왔는데? ? 그렇게 건강하고 즐거워 보이던 엄마가 왜 또 수술을 해야 돼? 화도 안 나고 그냥 계속 어처구니없고 황당했다.

  왜? 왜 우리 엄마야? 란 생각만 며칠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는 또 국립암센터 입원실에 누워 있고, 몸에는 흉수관을 포함하여 피주머니만 열댓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일은 피주머니 하나라도 제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게 바로 작년 봄 인데.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보며 느끼는 세상사의 진리는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에선 상도 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결국 아플 사람은 아프고,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사람은 천년만년 건강하게 잘 산다. 착하게 살면 상 받고, 나쁘게 살면 벌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요즘 우리 가족은 마치 문밖에 누군가가 큰 기관총을 들고 문 열라고 문을 쾅쾅쾅쾅 두드리는데 허술한 문에 덜컹거리는 자물쇠 하나 걸어놓고 벌벌 떨고 있는 거 같다. 언제 어느 때라도 문밖의 사람이 총으로 문을 부수고 방으로 들어와 두두두두 미친 듯 총을 갈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하늘은 파랗고, 나는 출근을 했고, 병원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다. 너무 잔인하다.

 

P.S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3865

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말로만 듣던 청와대 국민 청원을 올렸습니다.

글을 보시는 분들은 한번씩만 동의 부탁드립니다.


휴가 질문

일상 2019. 8. 13. 17:18

  2007년 대학을 졸업하고 날고 긴다는 사람만 갈 수 있다는 '신의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2월에 들어가서 7월 23일 직전까지 그곳에 다녔는데, 7월 중순부터 그 회사 사람들은 '여름휴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휴가를 어디로 가는지, 언제 가는지에 대해 서로 질문하고 답하고.

  심지어 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되어 그만두는 나에게도 지금 입사하면 여름휴가는 어떡하냐고 묻더라. 당시 난 여름휴가 따위 안중에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름 대기업이었던 첫 회사에서는 여름휴가를 7월~8월 이내 써야 했는데 그 회사에서도 휴가 질문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7월이 시작함과 동시에 직원들끼리 휴가 가는 날짜를 공지하고, 이번 휴가 계획에 대해 얘기하고.

  첫 직장에서 끝내 적응에 실패하여 때려친 후 계약직으로 들어간 대학교 조교 월급은 딱 최저임금 수준이었는데, 교수님들끼리는 휴가 얘기를 하는 거 같았지만, 같은 처지였던 조교들끼리는 아무도 여름휴가 계획에 대해 묻지 않았다. 피차 휴가 갈 돈 따위 없는 거 알고, 과사무실에 혼자 근무하기 때문에 '저 일주일 휴가 갑니다.' 하고 과사무실 업무를 일주일 내내 올스탑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급여수준이 그나마 좀 괜찮은 중소기업 그러니까 지금 직장 바로 직전 회사에서는 여름에 휴가 간 적이 없었다. 연차를 아무 때나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회사 다니면서 여행에 돈을 제일 많이 쓴 거 같은데... 매년 추석 연휴쯤 해외여행을 갔으니까.

  직전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부랴부랴 취업하여 벌써 만 4년이 되어가는 지금 회사는 전 직장보다 연봉이 약 천만원 정도 적다. 지금 다니는 회사 다니면서 휴가다운 휴가는 단 한번도 못간 것 같다. 다른 직원들은 나만큼 연봉이 적지 않은데도 다들 집안 사정이 어려운지, 여름휴가를 안 간다. 연차를 내도 하루정도? 당연히 아무도 나한테 휴가 계획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벗어난 곳에서는 여전히 근사한 여름 휴가 계획은 있는지? 언제 어디로 가는지? 다들 그렇게 시덥지 않은 말을 주고 받고 있으려나.

  병원에 다니느라 2019년에 쓸 수 있는 연차 16개를 이미 다 사용한지 오래지만,  연차 수당도 없고, 또 아무도 내 연차에 신경을 안 써서 그냥 난 병원 갈 일 있으면 연차 내고 간다. 내년꺼 땡겨 쓴다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이렇게 시험관 시술이 길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새벽 진료 있는 병원으로 다녔어야 했는데. 뭐 인생이 다 내 예상대로 되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매년 없던 여름 휴가 계획이 갑자기 생겼다. 올 여름 휴가에 난 수술을 하기로 했다. 계속되는 시험관 시술 실패에 오랜만에 지옥 같은 우울함을 맛보고 2월에 난관에 수종이 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그거라도 제거해보기로 했다. 난관에 있는 물이 자궁으로 흘러서 배아 착상에 방해할 수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2월에 수술한 의사가 막상 복강경 넣어보니 심하지 않다면서 수술 안하고 그냥 난관을 보존했는데, 옮긴 병원 의사 선생님이 계속 실패하니 그거라도 한번 절제를 해보자고 하시더라.

  또 수술하고 입원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하지만, 7월 이식 때 의사도 거의 임신을 확신했던 배아 상태에서도 실패를 하고 보니 못할 게 없단 생각이 든다.

  수술은 8/30 에 한다.

 


작별

일상 2019. 8. 1. 09:43

  7월 25일에 옮긴 병원에서 세 번째 이식을 했다. 첫 번째는 배아를 2개 넣었고, 두 번째는 3개. 이번에는 정말 상태 좋은 배아 딱 한 개를 넣었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이식 후에 유난을 떨지 않았는데, 실패한 이유가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이번에는 좀 유난을 떨었다. 이식하고 휴가를 3일 하고도 반차를 더 냈고 집에 있는 동안은 배에 담요도 두르고 되도록이면 무리도 안 하고 삼시 세 끼도 다 잘 챙겨 먹고.

  의사선생님께서 긍정적으로 말씀을 해주셔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어제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어 임신테스트기를 해봤더니 깨끗한 한 줄이다. 왜 이런 예감은 반전이 없을까.

  배아 이식하고 쉬는 동안 엄마가 시골에서 가져온 반찬을 준다고 집에 오셨는데 아빠까지 같이 오셔서 또 화를 엄청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 가셨다. 딸이 2월부터 임신한 번 해보겠다고 고생하는데 아빠는 다른 거 다 안 보이고 본인 감정만 중요하신가 보다. 아빠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빠가 그렇게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간 후부터 몸이 유난히 가벼워진 기분이라 아빠까지 원망스럽다. 어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오랜만에 가족 만나기 전에는 우울증 약을 평소 두배를 먹고 나간다는 트윗을 썼더라. 내 가족들도 나처럼 나를 만나는 걸 싫어하고 불편해했으면 좋겠다면서. 일생동안 가족만큼 힘을 주는 사람도 없고, 가족처럼 날 미치게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연을 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평생 함께 해야 하는 나의 친족들.

  아빠는 저번 배아 이식 때도 사위 앞에서 술주정을 해서 내가 남편한테 미안하다고 거의 빌다시피 하고, 이번에는 소리 고래고래 지르다 가시고. 엄마 딴에는 몸조리하는 중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오시는 거지만 운전을 못하는 엄마를 데려다주느라 옵션으로 항상 따라오는 아빠 때문에 몸조리는커녕 항상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 된다. 다음에는 시댁에는 말해도 우리 가족한테는 배아 이식 얘기 일절 안 할 생각이다. 요즘에는 차라리 좀 거리감이 있는 시댁이 훨씬 좋다.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평생의 운은 아빠와 단절되게 살게 해 준 남편을 만나는 데 다 쓴 거 아닐까. 하는. 일기에도 여러 번 썼지만, 난 운이 좋아서 뭔가를 이룬 적은 거의 없고 남들만큼 노력해도 그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 편인데, 내 인생에 정말 이렇게 기쁠까 싶었던 일이 남편이랑 결혼한 일이었다. 남편과 내가 고른 집 거실에서 멍하니 TV를 보다가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한동안은 너무 행복했다.

  남편을 사랑하다보니 남편을 닮은 애가 있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하는 생각에 나는 내심 아들을 낳고 싶었다. 딸은 안중에도 없었다. 배아 이식을 할 때마다 내 상상 속의 아이가 있었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공원에 가고, 그네도 밀어주고 남편이랑 아이한테 뽀뽀도 하고 그랬다. 계속 실패하면서도 내 상상 속 아이는 한 번도 사라진 법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 세 번이나 실패를 하고 보니 내가 항상 상상 속에서 키우고 있던 그 아이가 현실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 겁이 났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세 번째 아이와 작별을 하고 눈물을 펑펑 쏟고 누가 봐도 어제 울다 잔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사무실에 앉아 일기를 쓴다.

 


1. 저번주 토요일에 남편과 '기생충'을 보러가서 생리가 터졌다. 이미 수요일 쯤 임신테스터기로 한줄임을 확인해서 큰 기대는 안했지만, 허탈했다. 2017년도만 해도 생리주기가 33일 이상이었다. 시험관 때문에 올해 초부터 몸에 호르몬을 막 때려넣다 보니 생리 주기가 매달 제각각이다. 배아 이식을 하고 일주일만에 생리가 터진 걸 봐선 이식 날짜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하다. 뭐 가장 큰 문제는 내 몸상태가 불량하고 나이가 많다는 것이겠지만... 아직 더 시험관시술을 해야하는데 벌써 몸에서 티가 나서 걱정이다. 우리 부부의 난임은 작은 병원에서는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아 이번 주 토요일에 큰 병원으로 옮겨서 다시 진행해보기로 했다.

2. 영화 '기생충'은 기대했던대로 정말 재밌었다. 난 대학 시절 하루종일 햇빛 한점 안 드는데, 배관까지 잘못되서 베란다에서 하수구 냄새가 역류하는 어느 북향 원룸에 살았다. 어느 날 전주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는데 내가 차 뒷자리에 타자마자 아빠가 하수구 냄새가 난다고 하시더라. 그 뒤로 아빠가 사고를 쳐서 그 원룸에서 아빠와 단둘이 살게 되었을 때도 아빠가 시도때도없이 하수구 냄새 난다고 불평하셔서 말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엄마는 하수구 냄새 풍기고 다니는 딸을 안타까워 하는데 아빠는 불평만 하셨다. 나중에는 아빠 혼자 하수구 냄새나는 집에 사시라고 하고 뛰쳐나가고 싶었고, 돈이 없어서 하수구 냄새 나는 방 외 다른 대안이 없는데 대체 어떡하라구요? 라고 되물으며 울부짖고 싶었다.

대학시절 당시 아마도 내가 강의실에 들어가면 하수구 냄새 풀풀 풍겼으리라. 이런 경험이 있는 나는 영화 '기생충' 보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고, 뒷맛이 씁쓸했다. 하나같이 연기를 다 잘하는데 이선균이 제일 아쉽고 조여정이 의외였다. 연기 너무 잘하시더라. 남들이 날 무시하는 것 같으면 뚜껑이 열려 결국 모든 걸 그르치는 우리 아빠가 생각났다. 결국 그게 한국 대부분 중년 남성들의 모습이고, 그 중년 남성들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 집 딸이다. 나도 그렇게 살았고 '기생충'의 똘똘한 기정이도 결국 최고 피해자가 된다.

3. 그닥 즐겁지 못한 20대를 보낸 나는 대학 축제 철에 TV에서 공연보면서 방방 뛰는 모습 보여주며 젊음을 예찬하는 멘트를 들을 때마다 삐딱해진다.

4. 시어머니와 우리 엄마 두분 모두 우리 부부가 언젠가 자연임신이 될거라고 믿고 계신다. 시어머니는 첫애를 22살에 낳으셨고 우리 엄마는 26살에 낳으셨다. 난 현재 37살이다. 당신들이 애를 임신했던 때와 지금 내가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걸 전혀 고려치 않는 생각이다. 자연임신하라는 말을 2월 3월에만 해도 그냥 웃어 넘기며 들었는데 앞으론 화가 날 것 같다. 병원에서 거의 가망 없다고 했는데 왜 자꾸 그러시는걸까.

5. 남편이 시험관 실패해서 의기소침한 내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토요일 내내 애를 많이 썼다. 하하호호 웃으며 오랜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 맛있는 음식에 시술 때문에 못마시던 맥주까지 시원하게 마시고 누웠는데 2월에 처음 병원에 갔을 때부터 남편이 배에 주사 놓아주고 난자 채취하고 배아 이식하고 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다 쓸데 없는 짓이었단 생각에 눈물이 났다. 결국 혼자 거실나와서 펑펑 울다 잠들었다.

6. 제일 친한 친구가 임신했는데 극초기인데도 양수가 세서 한달동안 입원했다. 걔 입원한동안 심심할까봐 매일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퇴원 후 난 임신했는데 넌 '그러고' 있어서 내가 뭔 말을 못하겠단 식으로 말하고 그 뒤로 연락이 없다. 그냥 평소대로 대해주면 되지 꼭 그렇게 난 임신, 넌 비임신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콕 꼬집어 말했어야 했을까. 빈정상해서 나도 연락 안하고 있다. 

7. 회사일이 한가해졌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생각보단 괜찮아서 내 일이 많이 줄어 들었다.


근황2

일상 2019. 5. 7. 15:41

2. 최종 실패

  사무실에서 내 자리는 입구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구석진 자리다. 양 옆에 외근 나가고 아무도 없으면 음악 듣고 책 읽고 심지어 울어도 아무도 모르는 자리. 지금 라디오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이 나와서 들으면서 일하다가 울고 말았다.

  어제 피검사로 임신 수치를 검사하는 날이었는데, 결국 실패 판정을 받았다.

  난 노력해서 잘하는 일도, 노력하지 않아도 잘되는 일도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막말로 남들은 아무 노력도 없이 원치 않는 임신도 잘들 하는데, 나는 그 마저도 이렇게 어렵다.

  동결해놓은 난자가 5개 남았고 그 중 몇 개나 제대로 배양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다음번까진 과배란 주사 맞을 필요도 없고, 난자 채취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두 번째도 실패한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고 나는 또 지칠 것이다. 몇 개월간 주사로 약으로 호르몬을 마구 때려 넣어 그런지, 생리도 정상이었을 때 같지 않고 이상하다.

  남들은 조바심 갖지 말라는데 그게 쉽지 않다. 대체... 주님의 뜻이 뭘까. 너무 괴롭다.

 

3. 인생의 바닥

  힘들때마다 내 인생이 바닥이었던 때를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을 보면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동굴을 주인공 여자애가 막 헤매며 달리는 꿈이 나온다. 재작년 여름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해결책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하루 살아내기 바쁘던 때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현재를 버티려고 하면 어느 정도는 버텨진다.

 

4. 인간의 존엄성

  국립암센터에서 엄마 병간호를 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큰 깨달음이 있었다.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내 대소변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손발을 쓰지 못하고 산소마스크가 있어야만 호흡이 가능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했다고 해도 내 똥오줌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죽기 전까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다 필요 없다. 내 똥오줌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또 똥오줌을 화장실에 가서 처리하는 것조차 모르는 상태가 된 사람은 정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환자의 정신 건강을 보살피려면 남의 도움 필요 없이 용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최우선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한동안 우리 엄마 대소변을 내가 받으며 든 생각이다. 이 세상의 모든 대소변 수발을 들고 있을 간병인들이 오늘도 지치지 않길 오늘도 기도한다.

 

브람스 교향곡 한곡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휘갈겨 쓴 요즘 근황 두번째는 이대로 끝내련다.


4월 근황1

일상 2019. 4. 29. 13:47

  결혼을 하고 결혼 전만큼 우울해지진 않지만, 가끔 회사에서 퇴근할 때 나도 모르게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침울해질 때가 있다. 몇 가지 이야기는 해야만 더 힘을 내서 살 수 있을 거 같아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1. Elsa의 T'en Vas pas

  일기를 쓰느라고 노래 스펠을 찾아봤다. 프랑스어는 전혀 몰라서 그냥 떵파바 라고만 알고 있던 곡을 저번 주 금요일 병원 침대에 누워 라디오로 들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의 대장정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뿐이다. 2월 1일에 병원에 방문해서 나팔관 절제하자는 얘기 듣고 2월 28일에 근종 제거 수술하고 3월 중순부터 과배란 주사 맞고 시간마다 약 먹고 난자 채취도 하고 그다음 마지막인 배아 이식을 지난주 금요일에 했다.

  시험관 아기 하면 여자가 너무 힘들다고만 들었는데, 나는 나팔관 조영술이 불쾌하고 아프고 힘들었지 주사 맞는 거랑 약 먹는 건 힘들지 않았다. 난자 채취할 때 수면 마취하고 깨어났을 때 아랫배가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나팔관 조영술보단 안 아팠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쉴 새 없이 열심히 시험관 아이 시술이라는 목표 하나로 달려왔다. 끝나고 결과만 기다리고 있는 지금 막연히 한 번에 성공했으리라 하고 기대만 하는 중이다. 5월 6일이 결과 듣는 날인데, 암 조직 검사했을 때 결과 듣는 것만큼이나 떨리겠지. 설사 실패하더라도 아무렴 암이라는 결과 듣는 것보다 더 슬프진 않을 테니 너무 겁먹지 않으려고 하지만, 지금도 결과들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쿵쾅거려 일을 못할 정도다.

  과배란 주사로 난자를 30개나 채취했는데 그중 20개 버리고 남은 10개 중 5개를 배양했는데 이식할만한 수준의 배아는 2개밖에 안돼서 2개를 이식했다. 둘 중 하나라도 살면 임신 성공, 둘 다 죽어버리면 임신 실패다. 

  배아 이식할 때는 마취는 안 하고 맨 정신에 수술대에 누웠는데, 아무래도 무자비한 기구가 몸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나중에는 눈감고 그냥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수술실에 있던 나이 지긋하신 간호사분이 다정하게 대해줘서 감사했다. 아무래도 내가 좀 딱했나 보다.

  모든 시술을 끝내고 10시 반쯤부터 12시까지 텅 빈 병실 침대에 남편과 함께 누워 있는데, 남편은 쿨쿨 잠이 들었고 나는 눈만 깜박깜박하며 어두운 병실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바로 옆에 누워있는 남편 얼굴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찡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용한 가운데 이번에 임신이 성공했을 경우, 실패했을 경우를 떠올리며 별안간 무서워졌다. 사람들은 너무 조바심 내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그게 쉽나. 복잡한 심경에 잠든 남편을 보는데 라디오에서 학창 시절에 무척 좋아하던 엘자의 노래가 나왔다.

  영화를 보면 어떤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그럭저럭 인생을 살아갈 때 엄청나게 크고 충격적인 사건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난 정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니깐 사람의 성격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형성되는 데에는 매일 반복되고 조용한 가운데 남이 보기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지루한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닐까.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 길고 긴 시간이 반복되어야만 큰 슬픔과 충격이 있어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고난의 수준을 한 단계 한 단계 높여가며 또 성숙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필요한 건 기가막힌 사건, 신나는 여행, 대단한 행운 같은 게  아니라 결국 지루한 시간일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우리 엄마가 수술 후 지쳐 잠든 모습을 간이용 침대에서 누워서 멍하니 바라보던 재작년 언제처럼 좁은 침대에 남편이랑 같이 누워서 음악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미래의 나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 위로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다. 제발 이번 한 번에 성공하게 해 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