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질문

일상 2019. 8. 13. 17:18

  2007년 대학을 졸업하고 날고 긴다는 사람만 갈 수 있다는 '신의 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2월에 들어가서 7월 23일 직전까지 그곳에 다녔는데, 7월 중순부터 그 회사 사람들은 '여름휴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휴가를 어디로 가는지, 언제 가는지에 대해 서로 질문하고 답하고.

  심지어 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되어 그만두는 나에게도 지금 입사하면 여름휴가는 어떡하냐고 묻더라. 당시 난 여름휴가 따위 안중에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름 대기업이었던 첫 회사에서는 여름휴가를 7월~8월 이내 써야 했는데 그 회사에서도 휴가 질문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7월이 시작함과 동시에 직원들끼리 휴가 가는 날짜를 공지하고, 이번 휴가 계획에 대해 얘기하고.

  첫 직장에서 끝내 적응에 실패하여 때려친 후 계약직으로 들어간 대학교 조교 월급은 딱 최저임금 수준이었는데, 교수님들끼리는 휴가 얘기를 하는 거 같았지만, 같은 처지였던 조교들끼리는 아무도 여름휴가 계획에 대해 묻지 않았다. 피차 휴가 갈 돈 따위 없는 거 알고, 과사무실에 혼자 근무하기 때문에 '저 일주일 휴가 갑니다.' 하고 과사무실 업무를 일주일 내내 올스탑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급여수준이 그나마 좀 괜찮은 중소기업 그러니까 지금 직장 바로 직전 회사에서는 여름에 휴가 간 적이 없었다. 연차를 아무 때나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회사 다니면서 여행에 돈을 제일 많이 쓴 거 같은데... 매년 추석 연휴쯤 해외여행을 갔으니까.

  직전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부랴부랴 취업하여 벌써 만 4년이 되어가는 지금 회사는 전 직장보다 연봉이 약 천만원 정도 적다. 지금 다니는 회사 다니면서 휴가다운 휴가는 단 한번도 못간 것 같다. 다른 직원들은 나만큼 연봉이 적지 않은데도 다들 집안 사정이 어려운지, 여름휴가를 안 간다. 연차를 내도 하루정도? 당연히 아무도 나한테 휴가 계획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벗어난 곳에서는 여전히 근사한 여름 휴가 계획은 있는지? 언제 어디로 가는지? 다들 그렇게 시덥지 않은 말을 주고 받고 있으려나.

  병원에 다니느라 2019년에 쓸 수 있는 연차 16개를 이미 다 사용한지 오래지만,  연차 수당도 없고, 또 아무도 내 연차에 신경을 안 써서 그냥 난 병원 갈 일 있으면 연차 내고 간다. 내년꺼 땡겨 쓴다는 생각으로 당당하게. 이렇게 시험관 시술이 길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새벽 진료 있는 병원으로 다녔어야 했는데. 뭐 인생이 다 내 예상대로 되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매년 없던 여름 휴가 계획이 갑자기 생겼다. 올 여름 휴가에 난 수술을 하기로 했다. 계속되는 시험관 시술 실패에 오랜만에 지옥 같은 우울함을 맛보고 2월에 난관에 수종이 있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그거라도 제거해보기로 했다. 난관에 있는 물이 자궁으로 흘러서 배아 착상에 방해할 수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2월에 수술한 의사가 막상 복강경 넣어보니 심하지 않다면서 수술 안하고 그냥 난관을 보존했는데, 옮긴 병원 의사 선생님이 계속 실패하니 그거라도 한번 절제를 해보자고 하시더라.

  또 수술하고 입원할 생각하니 너무 끔찍하지만, 7월 이식 때 의사도 거의 임신을 확신했던 배아 상태에서도 실패를 하고 보니 못할 게 없단 생각이 든다.

  수술은 8/30 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