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몇 번 썼지만, 나는 불행히도(?) 아빠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사회성 떨어지고, 외골수인 게 특히 그렇다. 하지만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 좋은 음악도 많이 듣고, 그림도 봤고, 책 읽는 습관도 생겼으니 원망스럽지는 않다.

  아빠 영향으로 좋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거의 B4 사이즈만한 그림책 세트가 있었다. 외국책 이었고 해외 유명 화가들의 (어렴풋이 모네 랑 르누아르 그림을 봤던 기억이 남) 고급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책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봤던 모든 책에는 하나같이 다 크레파스 낙서가 가득한데, (우리 엄마는 내가 하도 벽이나 책에 낙서를 많이 해서 벽면에 큰 종이를 하나 붙여주고 낙서하고 싶으면 여기에 하라고 말씀하셨다. 앨범에 그 낙서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음) 어린 내 눈에도 그 책은 비싸고 좋아보였는지 그 책에는 낙서를 전혀 안했다. 너무 무거워서, 아빠가 꺼내서 펼쳐주시지 않으면 볼 수도 없었다. 10번이 넘는 이사를 하며 우리 가족에게 그 책 세트는 너무 큰 짐덩이리였고, 결국 언젠가 아빠께서 헌책방에 그 책을 팔아버렸는데, 책방 주인이 어찌나 좋아하든지 집에 혹시 이런 책 또 있으면 꼭 자기한테 팔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집에는 007 가방 처럼 생긴 갈색 큰 가방도 있었다. 그건 클래식 음악 테이프 세트였다. 이 세트도 역시 수입된 것이었다. 그 옛날 강원도에서 직수입 책이나 음악세트를 구입하셨던 걸 보면 아빠도 꽤 유별난 사람이었던 거 같긴 하다.

  하긴 세계 최초로 Auto-focus 기능 탑재한 니콘 카메라도 강원도 살 때 샀고, 그 카메라가 아직도 우리집에 있으니.. 역시 돈이 좋긴 좋은건가. 싶다. 그때는 아빠도 안정적 직장에 수입도 많았으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하는 호사를 누리셨다. 그 니콘 카메라 파는 아저씨가 카메라 하나 들고 서울에서부터 우리집인 강원도 홍천까지 오셨고 그 카메라 값을 3년 할부로 갚았다고 하니 당시 엄청난 고가였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세트 60개 테이프 중 아빠가 많이 들으신 건 막 음악이 늘어지고, 안들으신 건 음질이 깨끗했다. 나는 모든 테이프가 다 늘어나서 그 세트를 버릴 때까지 심심하거나 혼자 있으면 그 클래식 음악들을 듣곤 했는데, 어느 날은 뭔지 모르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생했다가 음악이 너무 무서워서 울었다. 봄의 제전은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곡이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한번 들어봤을때도 역시나 봄의 제전은 전혀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건 유명 협주곡을 모아놓은 테이프였는데, (60번 중에서 30번인가 28번인가 그랬음) 나중에 커서 들어보니 그 테이프에 들은 곡은 슈만의 유모레스크,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등등 엄청 유명한 곡들이었다.  

  원래 쓰려던 걸 안쓰고 말이 길었는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빠는 정리정돈형이고 엄마와 동생은 어지르기형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난 엄마에게 집을 치우라든가, 니 방 좀 정리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집을 어지르고 정리를 못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편은 아니지만, 약간의 강박 같은 게 있어서, 샴푸나 폼클렌저, 화장품이 상표가 보이지 않게 세워져 있으면 꼭 상표를 보이게 세워놓고, 자동차 열쇠, 가방, 이어폰 같은 소지품이 항상 있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또 내가 쓰는 서랍은 언제나 찾기 쉽게 정리정돈 되어 있는 편이고. 

  하지만 동생이나 엄마는 손에든 물건은 손 닿는 곳에 두고, 서랍을 열어보면 뒤죽박죽 절대 원하는 물건을 바로 찾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뇌가 좀 다른 것 같다. 동생이 엄마보다 정도가 좀 심한데, 군대를 갔다오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뭐 군대 2년은 사람을 변화시키기엔 너무 짧은 시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냥 엄마나 동생이나 뇌가 나와는 다르다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나보다 더 어지르기형 인간이라 잔소리 안해 좋다... 생각하는데, 아빠는 엄마가 집안 어지르는 것 때문에 가끔씩 크게 화를 낸다.

  휴. 또 이 일기의 결론은 아빠와 엄마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구나. 아빠가 엄마를 좀만 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만약에 누군가와 살게 된다면 어지르기형 인간이더라도 화내지 말아야지... 하고 또 다짐해본다.


월동 준비

일상 2016. 10. 23. 15:39

옷정리

  사계절이 존재한다는 건 정말 좋은 것일까? 우리나라의 뚜렷한 사계절 때문에 여름 겨울 앞두고 옷 정리 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그 엄청난 일을 어제 드디어 해냈다. 만세. 집이 넓으면 사계절 옷 다 한꺼번에 걸어놓고 옷 정리 같은 거 할 필요 없겠지. 넓은 집 사는 사람들 부럽다. 어제 정리하다보니 니트가 너무 너무 많은데, (겨울옷의 4분의 3이 니트) 그런데도 고급 니트는 별로 없다. 싸구려 니트는 이제 그만 사자. 아니 이제 옷을 그만 사고 버릴 건 좀 버려야 한다. 제발


노트북

  14만원 내고 고친 노트북이 엄청 빨라졌다. 윈도우10은 몹쓸 OS 인 것 같다. 다시 윈도우7 을 깔아서 쓰니 이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노트북으로 하는 일이 음악 CD 를 mp3 파일로 바꾸기, 블로그하기 이 두가지 뿐이다. 지금 노트북은 성능은 떨어져도 키보드가 좋으니, 블로그 용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좋다. 윈도우 10으로 업그레이드 한 뒤 부턴 DVD 롬이 작동하지 않았는데, 7으로 돌아오니 이제 DVD 롬도 잘 돌아간다. 14만원이라는 큰 돈 들인 보람이 있다.


사무실 이전

  이전할 사무실 답사(?)를 갔다. 다행히 가산디지털단지 쪽으로 결정됐다. 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울로 이전하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지금 회사 직원이 워낙 없어서, 이전 관련 업무의 90% 이상을 내가 해야만 한다. 눈앞이 캄캄하다. 그나마 가까운데로 오면서 일을 해야 하니 기쁜 맘으로 하리라 맘은 먹었지만, 사무실 이사 한번도 안해봤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잡힌다. 


최대 몸무게 갱신

  2년마다 한번씩 해야 하는 직장 건강검진을 받았다. 몸무게를 재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드디어, 내 몸무게 앞자리가 5가 되어버린 것. 하루종일 우울했다. 딱 50이긴 했어도... 역시 영원히 40키로대 일 순 없구나. 싶었다. 세월이 무상하기도 하고. 대학생 때 몸무게 40키로 초반일 때 스스로 날씬하다는 생각을한번도 안했다. 내 다리가 굵다 생각해서 짧은 치마도, 짧은 바지도 잘 안입었다. 그게 너무 후회스럽다. 거 참... 일생에서 제일 날씬했을 시절인데, 왜 더 몸매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살았던건지. 이 충격 때문에 저녁 밥 안 먹고 있는 중인데, 지금 몸무게를 빼자는 생각보단, 더 찌진 말자고 다짐했다. 회사가 가까워지면 운동 좀 할 수 있으려나.


CT 결과

  지난 월요일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 날은 우리 엄마의 CT 결과 소식을 듣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난소암 항암제로 쓰이는 약은 엄마가 현재 쓰는 세가지 약 이외는 없다. CT 검사로 이제까지 항암치료로도 암이 사라지지 않았음이 밝혀지면 사실상 우리 엄마는 항암 치료는 중단하고 신약이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기적을 바라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조직 검사 결과 들을 때 만큼이나 떨렸다. 다행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이제 4차 항암을 마치고, 수요일에 퇴원하셨는데, 3차 때와는 다르게 훨씬 더 힘들어 하신다. 그래도, 항암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엄마의 면역이 (내가 백혈구, 혈소판 등 면역과 관계 있는 세포들에게 붙여준 애칭) 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길 기원할 뿐이다.


클래식 음악

  락으로 시작해서 재즈를 듣다가 클래식으로 가는 게 음악 애호가들의 공식 코스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나에게 대입하면 그 말이 딱 맞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클래식만 듣는 건 아니지만, 몇 년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클래식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선호하는 작곡가나, 연주자도 없지만, 울적하고 날씨까지 흐릴 때 단조라고 적힌 유명 클래식 아무 곡이나 재생하면, 대중적인 곡을 듣는 것 보단 훨씬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월미공원과 여러가지

일상 2016. 10. 10. 09:36

1. 평일에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면서, 운동을 전혀 하지 않다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진다. 환절기라 ​비염 때문에 점점 더 괴로워서 토요일에 내과에 가 약을 받아왔다.

요즘 친구 만나서 웃고 떠들 기분이 아니고 또 공교롭게도 주말마다 몸이 좋지 않아, 요근래 주말에는 거의 요양하며 집에 있는다.

2. 점점 아빠와 외출을 꺼리게 된다. 아빠가 야외에서 사고 칠까봐 외출해서도 내내 눈치보고 노심초사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아빠와 내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걸 느끼며 안타까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엄마가 많이 아픈데도 전혀 변화 없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더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고 그렇다. 아빠와 최소한의 대화를 하고 최소한 짧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해답인 거 같다. 저번 상담해주시던 선생님 조언대로 아빠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엔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빠다. 하지만 그런 말을 아빠에게 하는 거 조차 힘겹고, 수고스러워 관두기로 했다. 아빠의 병은 일종의 발달 장애니까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바뀔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요즘 들어선 엄마가 아빠의 성격을 왜 평생 참고 사신 건지 원망스러운 기분도 든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도 그 나름의 고충과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엄마아빠가 서로 맞지 않는 걸 인정하고 헤어졌으면 요즘 이처럼 괴로운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다.  

3.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번 주 목요일에는 가족이 주는 행복과 불행 중 대체 뭐가 더 큰 걸까. 하는 생각에 유서라도 먼저 써놔야 되나 싶었다. 엄마가 또 아빠 때문에 또 힘든 일을 겪는다면 정말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4. 토요일에 아빠가 대전에 가셔서 모녀만 집에 남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월미공원에 갔다. 주말에 엄마 데리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아빠만 집에 혼자두기 뭐해서 못갔는데 토요일에는 기회가 좋았다.

바람이 너무 세서 약간 추웠지만,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때문에 엄마도 나도 기분전환 확실히 했다. 오랜만에 토끼들을 가까이서 봤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여워 걔네들 노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도 아빠랑 외출하는 것 보단 나랑 나가는 게 편하실 테니 시간 나면 함께 시간 보내드려야지.. 하고 다짐했다.

5. 여기 쓴대로만 보면 난 인생 포기한 것처럼 사는 것 같지만 의외로 회사 생활 착실히 잘 하고,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한테 우울한 모습도 안 보인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대 단점은 월급인데 이걸 무마할 정도로 큰 장점이 몇 개 있다. 몇 개를 나열하자면, 회식이 거의 없는 점, 야근 없는 점, 전화 응대 적은 점,직원들이 사생활 관련 질문 안 하는 점. 정도? 특히 마지막 장점이 너무 좋다. 전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나에게 했는가.. 정말 끔찍했다. 엄마가 치료 받으시는 동안은 군말없이 지금 회사에 몸 담으며 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엄마가 입원하실 때마다 눈치 안보고 휴가 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 중 하나이니.

6. 저번 주에 노트북이 완전히 고장나서 AS 센터에 보냈는데, 수리비가 14만원이 나왔다. 하드디스크가 완전히 못쓰게 됐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SSD로 교체했는데, 과연 얼마나 좋아졌을지. 돈을 들였으니 앞으로 한 10년은 더 쓰려고 한다.




울보

단문 2016. 10. 5. 18:21

원래 잘 우는 편이지만, 엄마가 편찮아지신 뒤, 시도때도 없이 감동받고 훌쩍 거린다.
이것 또한 늙었다는 증거 인건지..
며칠전 전철에서는 갓난아이를 안고가는 젊은 엄마가 아기 머리를 쓰다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울고 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의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간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이대로 몇 년 더 지나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슬프겠지. 영영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다면.
나보다 더 사랑하는, 대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건 어떤 기분일까.
TV같은 데서 생각보다 암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나오는 이야기의 90%이상 결말이 투병 중 사망이다. 투병 중 완쾌되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게 옛날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요즘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프다.
결국 난 점점 더 주책맞아지고 있다. 날 아는 누군가의 앞에선 아직 한번도 운 적 없지만, 하루에 한번씩은 찡해지고 혼자 눈물을 닦곤 한다.
즐거운 일이 전혀 없다.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에서 뜬금없이, 식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뮤지컬 영화 마냥 I say a little prayer 를 부른다. 줄리아 로버츠 옆에 앉은 극 중 그녀의 남자 동료가 줄리아 로버츠를 사랑하는 척, 엄청나게 불안정한 음정 박자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가 너무 좋아서, 영화 끝나고 찾아 들었다.

사랑한다고 열렬히 고백하는 것 보다, 틈틈이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와닿았으니까.

Aretha Franklin 버전도 좋지만, 이 영화를 워낙 재밌게 봐서 그런지 내 핸드폰 플레이 리스트에는 이 OST 버전이 들어있다.

 이 영화는 줄리아 로버츠가 오랫동안 친구로만 지냈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니 그제서야, 남자친구의 결혼을 막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줄리아 로버츠와 친구가 끝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발랄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카메론 디아즈를 볼 수 있는 것도 큰 재미 중 하나다. 저렇게 예쁘고 착한 여자와 사귀고 결혼을 약속해놓고 그냥 친구로만 지낸 여자에게 가는 건 말이 안되니까.

아마 다른 영화들 처럼 약혼녀를 버리고 줄리아 로버츠와 키스하며 끝났다면 화났을 것이다.


 요즘 이 음악을 들으며, 또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하며 내가 하는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그러다보니 '너를 위해 기도할게.' 라는 말의 다른 의미는 '너를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는 말과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기도라도 하면 그 혹은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한 것 같지만, 사실 난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이쯤되니, 기도가 정말 상대방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의심도 든다. 어쩌면, 기도는 그 사람보다 나의 심신 안정을 위해 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 사람을 위한다면, 눈 감고 기도하기 보다 적극적으로 뭐라도 해보려고 발벗고 나설 것이다.

퇴근 후 피곤하고, 엄마가 괜찮다고 하시니까... 와 같은 이런 저런 핑계로 요즘들어 내가 엄마에게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든다.

난 엄마를 위해 틈만나면 기도를 하고 있지만, 정작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무언가를 실제 행하고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9월에 일기를 한번도 못쓴 것 같다.

요즘에는 회사에서 괜히 바쁘고, 집 노트북도 대책없이 너무 느리고, 티스토리 아이폰 앱은 도저히 너무 너무 후져서 활용하기 힘들고, 뭘 쓰고 싶은 생각도 전혀 안들지만, 내 인생 어쩌면 가장 힘든시기로 기억될 요즘 기분을 최소한이라도 기록해 놓고 싶어 쓴다.

어제 우리 엄마는 아픈 엄마라도 있는 게 너희들에게 좋은 거 겠지? 라고 물으셨다.

난 그럼~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며 용케도 전혀 울지 않았다.

예전에는 성경에 아픈 사람들이 제발 내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비는 장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저번주 어느 날 그 장면을 읽는데 마음이 찡했다.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스쳐서 병을 고치고 싶었던 환자들 처지가 지금 내 마음과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다.

내일 3차 항암치료를 하는 엄마가 저번 같은 부작용 없이, 무사히 마치시길, 또 기도한다.


엄마가 걸린 난소암은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이 11% 밖에 안되고, 재발확률은 70% 가 넘는다고 한다.
건조하게 적혀 있는 난소암 관련 수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수술도 굳세게 이겨내고, 1차 항암도 씩씩하게 견디고 있는 엄마가 항암을 마침내 다 마쳐도, 평생 재발하지 않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원하면서 사는 수 밖에 없다.
출퇴근 길에 개신교 목사들이 쉽게 쓴 성경을 조금씩 읽고 있다. 개신교에서 만든 성경이라 그런지 구약이 뒤에 있고 신약인 마태복음이 제일 처음 나온다. 하루 두 세장씩 마태복음을 읽는 중인데, 난 마태복음에 이렇게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이제까지 일요일 신앙 이었던 내가 이번 일을 계기로 내 곁에 예수님이 계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기도를 하며 우리 엄마가 완치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나면 거짓말같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 엄마는 9월 5일에 2차 항암 치료를 앞두고 있다. 1차 보다 훨씬 힘드시겠지만, 이겨내시리라 믿는다.
유방암을 이겨내고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에게 유방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조직검사 결과 듣는다고 했는데 어제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 나쁜 소식임을 예감했다.
아직도 3주에 한번씩 치료를 받는데, 항암 끝난지 5개월 밖에 안됐는데, 왜 또 재발을 한건지... 병원에서도 흔치 않은 경우라고 했다는데, 또 수술을 해야 하는 친구가 너무 안타깝다.
그리고 겁이 나기도 했다. 치료는 너무 어려운데 암이 생기는 건 친구 사례를 보더라도 정말 순식간이니까..
친구는 복직 후,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했는데, 그 활동을 평일 밤 12시까지 종종 하곤 했다. 피로감을 쉽게 느끼는 나는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리한 스케줄 이었다.
암에 직접적 원인은 없겠지만, 동호회 때문에 늦게자고 일찍 일어났던 게 재발에 약간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로 일도 많이 하고 여행도 하고 동호회도 하던 친구가 이제 정말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다. 힘들겠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고백을 해도 차일 것 같다.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걔를 좋아하는건지.. 내 상황이 힘들어서 누구라도 필요해서 자꾸 생각이 나는건지.
금요일에는 진짜 오랜만에 카페하는 친구네 가기로 했다. 오정세를 좋아하는 친구가 한국 코메기 영화의 명작 '남자사용설명서'를 아직도 안봤다고 하여 맥주와 함께 감상하기로 했다.
얼마만에 가족 혹은 회사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기다려진다.


간병

일상 2016. 8. 20. 23:45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파서 그런지, 내 몸의 변화에 무척 민감하다. 아프기 직전의 느낌도 알고, 열이 날 때도 내 체온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맞는다.

아픈 것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나는 몸이 아플 것 같으면 만사 제쳐두고 쉰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무실에는 상비약이 언제나 완비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 잘 안다니던 사람은 필요이상으로 병에 민감한 나와는 달리 타이레놀 하나 먹는 것도 꺼리고, 병원도 웬만해선 잘 안가는 것 같다.

우리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아무리 병원에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아프면 약 먹으라고 해도 그렇게 완고하게 약을 드시지 않곤 했다.

재작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엄마는 올해 2월 쯤 돌보는 할머니 하나가 너무 증세가 심각하여, 그 할머니를 돌보고 집에오면 방광과 허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며 끙끙 앓았다. 나는 그렇게 아프면 일을 당장 그만두고, 가까운 기독병원 (우리동네에서 가장 예약이 쉬운 종합병원) 이라도 가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는 끝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그리고 올해 초여름부터 무리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 집만 돌봐도 힘든데, 세 집을 돌아다니며, 어쩔 때는 밤 10시에도 부르면 일을 가시곤 했다.
엄마가 쉬엄쉬엄 일을 하나만 해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살 수 있는데, 내가 그렇게 그만하라고 말려도 엄마는 뭐라도 홀린듯 그렇게 돈을 벌려고 기를 쓰고 일을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가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무리해서 일을 많이 한 건 다 동생의 전화 때문이었다. 6월달 어느 새벽에 성남에서 경찰이 전화를 했다. 난 통성명도 안하는 경찰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직도 그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경찰인지 아닌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여하튼 그 사람은 전화로 당신 아들이 지금 성남 길에서 누워서 자고 있으니 당장 와서 데려가라고 말했다.

엄마는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전혀 드시지 않는 분이었다고 한다. 엄마도 거의 술을 안드시고, 평생 취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엄마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아빠가 가끔 친구들과 술을 드시면 크게 화를 내시곤 했는데, 제일 아끼는 아들이 그렇게 증오하고 혐오해 마지 않는 술을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길에서 자고 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그날 밤 엄마는 밤새 속상해 하셨다.

사건 다음날 동생과 엄마가 전화를 하는 중에 엄마가 동생에게 왜 그랬냐 물어보니, 동생이 '요즘들어 내가 결혼하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동생이 결혼하기 힘들겠다고 한 건, 작년에 동생이 엄청 좋아해서 3개월 만에 얘랑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던 여자에게 차인 상처가 아직까지도 너무 크고, 걔만한 여자를 평생 못찾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다는 말이었을텐데, 언제나 돈에 열등감을 가진 엄마는 그걸 또 당신이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을 하셨던 거다.

엄마는 동생이 돈이 너무 없어서 결혼 못할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결혼할 때 동생에게 돈 천만원이라도 주려고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했다고 수술 다음 다음날 고백하셨다.

난소암 진단을 받기 한달 전부터 엄마는 열이 며칠동안 계속 나는데도 새벽6시 반부터 밤8시까지 미친듯이 일을 하셨다. 내가 화를 내며 그만하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들에게 천만원을 주겠단 엄마의 강한 의지를 꺽은 이는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었다.

10년 넘게 계속 다녔던 내과의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침대에 누워보라고 하신 뒤 배를 눌러보고 증세를 보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증세는 간단한 병이 아닌 것 같다고, 당장 인하대병원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외래 예약까지 해주셨다. 엄마는 거기서도 크게 아픈거 아닌데, 꼭 대학병원까지 가야하냐고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내과 선생님이 당장 가셔야 한다고 소견서까지 써주셨다.

그렇게 인하대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 끝에 결국 난소암 진단을 받았고, 대수술 후 이제 항암 1차를 마쳤다. 

20대에 6개월 넘게 엄마 병간호를 했던 경험이 있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는, 환자 외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프면 안되는게 병간호의 첫째 조건이라고 이 말 명심하고 안아프게 체력 관리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요즘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아빠와 내가 같이 하고 있지만, 집안일에 요령이 없는 우리 둘은 뭘 하나 해도 엄마처럼 빠르고 옳게 되질 않는다.

제일 힘든 건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거다. 자취할 때도 미역국 한번 안 끓였던 내가 반찬이나 국을 하며 출퇴근까지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요리책을 세권이나 샀는데, 책에 있는 간단한 재료도 결국엔 마트를 한 번은 가야하고, 마트에서 장보는 걸 싫어하던 내가 간신히 장을 보고 집으로 오면 벌써 어질어질 하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재료도 다듬어야 하고, 요리 한번 하면 설거지는 또 산더미처럼 나온다.

엄마는 이 모든 일을 이제까지 애 키우면서 일하면서 다 혼자 하셨다는건데, 엄마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맞벌이하는 여자들에게 무한한 경외감을 느낀다.

결국 익숙치 않은 생활에 나도 힘이 들었는지, 이번주 내내 미열이 났다. 체온이 참 신기하다. 1도만 높아도 사소한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참 힘이 든다. 열이 나는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는 집안일을 하려니 힘들었다. 엄마 외 아무도 아프면 안되는 게 간병의 첫번짼데, 벌써 첫번째부터 나는 글러 먹은 것이다. 이제서야 내 약한 체력이 후회스럽고, 운동 좀 해놓을걸..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엄마는 항암을 몇 차까지 할 지, 의사도 장담을 못하겠는 모양이다. 다만 3차 마다 검사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하셨는데, 제발 빠른 시일 내 차도가 있어서 길게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이 고되도 엄마를 보면서 내가 힘든 건 엄마의 100분의 1도 안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엄마 수술 부위에 붙어 있던 습식 드레싱을 제거했다. 거의 30cm 에 걸쳐 있는 무자비한 봉합 자국을 보고나니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아주 잠깐 아빠를 원망했다. 아빠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도 엄마에게 잘해드린 거 하나 없다. 엄마에게 일 그만하라고 화 내기 전에 차라리 그냥 내가 모은 돈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할걸.. 하는 후회가 든다. 어쩌면 내 탓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 다 쓸 데 없다.

불행에 이유를 찾다보면, 언제나 불행이 확대 재생산 되는 법이니, 엄마가 왜 몹쓸 병에 걸렸는지는 앞으로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다시 느끼는 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건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부질 없는 그 돈 때문에 엄마가 평생 마음을 졸였다니... 정말 가슴 아프다.

P.S 사실 상 엄마를 살린 건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다. 엄마가 바깥 활동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면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정말 고마운 분.


수술 후

일상 2016. 8. 16. 12:54

엄마가 그렇게 아파하는 걸 처음 봤다. 수술 전에 엄마랑 농담으로 애 낳는게 아플까. 이 수술이 더 아플까. 하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마취에서 깨서 정신 없는 와중에도 이게 백배는 더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수술 전날 입원한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울었다.

엄마가 입원하기 전까지는 계속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좀만 더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우리 엄마는 건강하게 일도 하고 평소처럼 깔깔깔 웃으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환자복 입고, 병실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정말 현실이구나 싶었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엄마도 나도 엉엉 울 것 같아서 엄마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간신히 엄마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엄마가 60대가 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건강하실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보다 일찍 엄마와 이별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 혼자 남겨놓고 가면 도저히 편히 눈을 못감을 것 같다고 하신 것이 떠올라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아무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수술 침대에 누워서 울고 계시는데, 나는 도저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걸 못볼 것 같아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내가 엄마 손을 잡아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우리 엄마는 결국 4기초 진단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의사가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간혹 전이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서 개복하자마자 닫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수술을 6시간 가량 하셨으니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좌절하다가, 지금은 엄마가 항암치료가 가능한 정도라는 것에 감사드린다.

일요일에 교회만 가는 정도였는데, 큰 고난이 닥치고보니, 종교가 큰 힘이 된다. 기도를 하면 엄마가 완치될 것만 같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제 나도 책임이 좀 무거워졌다. 제일 걱정인 건, 아빠다. 아빠가 잘 하실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다르게 엄마 마음 편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이런 때 일수록 나나 동생이 아빠랑 잘 지내서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어쨌든 2016년 이 덥고 또 더운 여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잊고 싶은 여름이 되겠지만, 아마 절대 잊지 못하겠지. 


우리 엄마

일상 2016. 7. 24. 23:21

엄마가 결국 난소암 판정을 받으셨다. 8월 4일이 수술이고, 개복 후 조직검사를 해야 병기나 이후 항암 치료 등등 그 외의 것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금요일에 엄마와 함께 병원을 가서 의사가 검사 결과를 말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결과를 들은 뒤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어린 튜링 연기한 애가 연기를 참 잘했다고 느꼈던 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아이의 표정 때문이었다.

사람이 너무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면 울음도 나오지 않고 슬프지도 않다. 그 영화 속 아이처럼 그냥 어리둥절 하게 된다.

금요일에 내가 그랬다. 동생은 회사에서 뛰쳐나와서 울면서 인천까지 한걸음에 왔지만, 난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엄마는 수술을 받으신 뒤 항암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극복하실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원자력병원에 의사로 있는 이종사촌 언니에게 난소암은 예후도 좋고 완쾌도 가능한 암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왔다.

엄마는 죽는 건 아무 상관 없다고 하는데, 치료비가 많이 나올까봐 걱정이라고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몰래 다시 병원에 전화해서 사는데 문제 없으니 암수술 안한다고 말했다는 걸 듣고 화가 너무 났다.

세상을 좀 오래 살다보니 돈으로 되는 것 중 중요한 건 단 한가지도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대체 엄마는 평생 얼마나 돈에 시달리셨으면 죽어도 상관 없으니 돈을 안쓰겠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지금 하시는 건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작년에 암에 걸린 친구에게 치료비는 정말 얼마 안된다는 걸 들어서 그 얘기를 하고, 보험회사에 다 전화해서 보험금으로 받는 돈 액수를 구체적으로 엄마에게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엄마가 본인의 건강보다 돈 걱정을 하는 걸 보고 돈이 더 싫어졌다. 내 팔자에 아마 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살 일은 없을텐데. 부모님의 돈 걱정을 전해 듣는 건 너무 괴롭다.

하지만 엄마에게 화도 안내고 잘 견디고 있다.

엄마가 병원에 계신동안 아빠와 둘이 어떻게 지내야할지... 나와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언제나 큰 일이 터졌는데. 엄마가 아픈 중에 신경 쓰이지 않도록 아빠랑 잘 지내야 할텐데. 내가 그냥 죽은 듯 살아야 할텐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휴. 역시 사람은 이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만 생각하다니.

하나님이 못되 처먹은 나에게 벌을 주신 것 같다. 차라리 나에게 주실 것이지 왜 평생 고생만 한 엄마에게 주신걸까.

난 작년이 너무 최악이었기 때문에 올해는 좀 즐거운 일이 생길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가 작년보다 더 최악이다 매년 매년 작년보다 올해가 더 최악이라는 생각만 하면서 산지 벌써 이게 몇 년 째인지 모르겠다.

죽지 못해 살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잘해드려야만 한다.

공부도 하면 할수록 잘해지고, 운동도 그렇고, 경험이 쌓이면 뭐든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는데 불행은 그렇지 않다. 불행한 일을 계속 겪으면 사람은 점점 약해진다. 견딜 수 있는 힘이 커지는 게 아니라 점점 잃게 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힘으로 어떻게든 이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 엄마에게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이니 힘을 내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겠다.


작년과 올해

일상 2016. 7. 16. 15:58


작년 이맘 때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에서 짤렸다. 내가 사표를 내긴 했지만, 사표를 쓰라는 압력이 있었으니 짤린 거나 다름 없었다.

이 모든게 겨우 1년 밖에 안된 일이라니... 아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작년 여름의 가장 더운 시절은 모교에서 보내고, 지금 직장에 온지도 1년이 되간다.


저번 주 화요일에는 교육 때문에 신답역에 갔다. 서울에 이렇게 아담하고 귀여운 역이 있다니... 흥미로웠다. 플랫폼에 저렇게 작은 수풀도 우거져 있고, 단 하나뿐인 출구로 나와도 어찌나 고요한지. 서울은 언제 어디서나 북적거리고 사람으로 넘쳐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신답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집 인천에서 이렇게 먼 곳을 누비며 회사 생활을 할 지 꿈에도 몰랐다. 난 대학 졸업할 때도 이직을 고려할 때도 항상 인천 우선으로 직장을 구했는데, 이상하게 인천이랑은 연이 닿질 않는다.


작년에 몹쓸 여자 하나 때문에 회사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올해는 좀 평안하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요즘 우리집 분위기는 오늘 날씨만큼이나 우울하다.


엄마가 8월 4일에 수술을 하신다. 암인지 아닌지는 수술해서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직검사하는데 한 일주일은 걸리니까.. 8월 둘째주까지는 엄마의 병이 암이 아니길 하면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궁근종이야 워낙 흔한 병이고, 주변 자궁근종 환자들도 근종 제거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우리 엄마는 생긴 모양이나 위치가 누가봐도 양성 근종은 아닌 모양이다.


너무 큰 비극은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비관론자라고 해도 누구나 '나에게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리 없다' 고 생각하는 일은 엄청나게 많으니까..

난 당연히 엄마가 큰 병이 아닐 거라 믿고 있다. 만약 암이라고 해도 폐나 간, 대장암보다는 제거가 쉬운 부위고 완치율도 높은 암이니 씩씩하게 치료 받으시면 완치될 거라 믿고 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 엄마가 암 판정을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엄마의 병이 별거 아니라는 말을 지금 당장 들을 수 있다면, 작년에 회사에서 당한 수모를 열번 쯤 더 당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현재로선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