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몇 번 썼지만, 나는 불행히도(?) 아빠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사회성 떨어지고, 외골수인 게 특히 그렇다. 하지만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 좋은 음악도 많이 듣고, 그림도 봤고, 책 읽는 습관도 생겼으니 원망스럽지는 않다.

  아빠 영향으로 좋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거의 B4 사이즈만한 그림책 세트가 있었다. 외국책 이었고 해외 유명 화가들의 (어렴풋이 모네 랑 르누아르 그림을 봤던 기억이 남) 고급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책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봤던 모든 책에는 하나같이 다 크레파스 낙서가 가득한데, (우리 엄마는 내가 하도 벽이나 책에 낙서를 많이 해서 벽면에 큰 종이를 하나 붙여주고 낙서하고 싶으면 여기에 하라고 말씀하셨다. 앨범에 그 낙서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음) 어린 내 눈에도 그 책은 비싸고 좋아보였는지 그 책에는 낙서를 전혀 안했다. 너무 무거워서, 아빠가 꺼내서 펼쳐주시지 않으면 볼 수도 없었다. 10번이 넘는 이사를 하며 우리 가족에게 그 책 세트는 너무 큰 짐덩이리였고, 결국 언젠가 아빠께서 헌책방에 그 책을 팔아버렸는데, 책방 주인이 어찌나 좋아하든지 집에 혹시 이런 책 또 있으면 꼭 자기한테 팔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집에는 007 가방 처럼 생긴 갈색 큰 가방도 있었다. 그건 클래식 음악 테이프 세트였다. 이 세트도 역시 수입된 것이었다. 그 옛날 강원도에서 직수입 책이나 음악세트를 구입하셨던 걸 보면 아빠도 꽤 유별난 사람이었던 거 같긴 하다.

  하긴 세계 최초로 Auto-focus 기능 탑재한 니콘 카메라도 강원도 살 때 샀고, 그 카메라가 아직도 우리집에 있으니.. 역시 돈이 좋긴 좋은건가. 싶다. 그때는 아빠도 안정적 직장에 수입도 많았으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하는 호사를 누리셨다. 그 니콘 카메라 파는 아저씨가 카메라 하나 들고 서울에서부터 우리집인 강원도 홍천까지 오셨고 그 카메라 값을 3년 할부로 갚았다고 하니 당시 엄청난 고가였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세트 60개 테이프 중 아빠가 많이 들으신 건 막 음악이 늘어지고, 안들으신 건 음질이 깨끗했다. 나는 모든 테이프가 다 늘어나서 그 세트를 버릴 때까지 심심하거나 혼자 있으면 그 클래식 음악들을 듣곤 했는데, 어느 날은 뭔지 모르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생했다가 음악이 너무 무서워서 울었다. 봄의 제전은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곡이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한번 들어봤을때도 역시나 봄의 제전은 전혀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건 유명 협주곡을 모아놓은 테이프였는데, (60번 중에서 30번인가 28번인가 그랬음) 나중에 커서 들어보니 그 테이프에 들은 곡은 슈만의 유모레스크,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등등 엄청 유명한 곡들이었다.  

  원래 쓰려던 걸 안쓰고 말이 길었는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빠는 정리정돈형이고 엄마와 동생은 어지르기형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난 엄마에게 집을 치우라든가, 니 방 좀 정리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집을 어지르고 정리를 못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편은 아니지만, 약간의 강박 같은 게 있어서, 샴푸나 폼클렌저, 화장품이 상표가 보이지 않게 세워져 있으면 꼭 상표를 보이게 세워놓고, 자동차 열쇠, 가방, 이어폰 같은 소지품이 항상 있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또 내가 쓰는 서랍은 언제나 찾기 쉽게 정리정돈 되어 있는 편이고. 

  하지만 동생이나 엄마는 손에든 물건은 손 닿는 곳에 두고, 서랍을 열어보면 뒤죽박죽 절대 원하는 물건을 바로 찾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뇌가 좀 다른 것 같다. 동생이 엄마보다 정도가 좀 심한데, 군대를 갔다오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뭐 군대 2년은 사람을 변화시키기엔 너무 짧은 시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냥 엄마나 동생이나 뇌가 나와는 다르다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나보다 더 어지르기형 인간이라 잔소리 안해 좋다... 생각하는데, 아빠는 엄마가 집안 어지르는 것 때문에 가끔씩 크게 화를 낸다.

  휴. 또 이 일기의 결론은 아빠와 엄마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구나. 아빠가 엄마를 좀만 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만약에 누군가와 살게 된다면 어지르기형 인간이더라도 화내지 말아야지... 하고 또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