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입원

투병 2020. 7. 21. 14:51

  오늘 결국 또 입원을 하신다. 딱 삼일동안 꿈결같은 퇴원생활을 누리시고, 집에서 된장국도 끓여 드시고, 이마트몰에서 장도 잔뜩 봤는데... 오마야 시술 하고 mtx 항암을 하기로 하셨댄다.

  저번 전뇌방사선 때 처럼 미친듯 카페를 검색했다. 역시나 대부분 1년 내 사망. 1년은 엄청 긴거고 대부분은 6개월내 돌아가시는 수순이다.

  엄마가 퇴원할 땐 엄마가 이제 화학항암 하고 뱃속 암만 잘 다스리면 2-3년 더 사실 것 같았다. 다시 절망이다. 내가 애 낳는 걸 보기도 전에 결국 돌아가실 것 같다. 오늘부터 또 울 것같다.

  엄마... 엄마... 퇴원해서 꿈만 같았는데.


엄마의 퇴원

투병 2020. 7. 20. 16:42

  27일을 입원하시고 도저히 더 못있겠다면서 퇴원을 하셨다. 퇴원 뒤로 오히려 입원 때보다 몸이 더 좋아지신 느낌이다. 그래서 엄마 퇴원하신 뒤로 기도하면서 울지도 않았다.

  폐암 카페에서 전뇌방사선 받은 환자들의 예후를 보니, 우리 엄마 같이 부작용 없는 사람도 거의 없다. 물론 조사량이 적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인지기능에 아무 이상없고 혼자 화장실 가고 오늘은 된장찌개까지 끓여드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감사할 뿐이다.

  계속 내가 감사하려면 엄마 척수와 뇌에 암이 재발을 안해야 하는데, 이제까지 엄마의 발병 역사를 볼 때 그러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재발을 하더라도... 제발 한 2년 이상만 갔으면 좋겠다.

  그래도 꿈만 같다. 의사선생님 전화 받았을 당시에는 그대로 호스피스로 가야하는 줄 알았는데 퇴원을 하시다니. 글자 그대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엄마 꿈

투병 2020. 7. 16. 10:21

  어제 밤에는 엄마가 내 꿈에 나와서 항암 두건을 쓰고 거실에 앉아서 감자를 다듬으셨다. 혈색도 좋고 건강하고 날 보며 웃으셨다. 새벽에 엄마 꿈을 꾸고 일어나서 한숨을 푹 쉬었다. 

  간수치가 심상치 않아, 입원 이후 계속 맞던 스테로이드제를 끊었다. 뇌부종이 오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아침 저녁으로 주님께 기도드리고 출근해서는 찬송가 한 곡을 듣고 성격책도 읽고 있다. 이렇게 가련한 노력을 한다고 한들 우리 엄마 암세포가 죽지는 않겠지만 그냥 내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한다.

  우리 엄마 오늘 꿈에서처럼 감자 다듬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입원 이틀 전 우리한테 줄 김치 담그어 놓았다고 뿌듯해하셨는데... 그 아픈 와중에도 왜 김치를 담궈. 미련한 엄마.


두 아기

투병 2020. 7. 15. 15:33

  오늘 임신 6주 6일째. 병원가서 아기 둘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저번 주말에 엄마집 청소하고 이사짐 정리하느라고 힘들었는데 아기 둘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 엄마 생각을 잊고 기뻐해도 되는 거겠지. 아기들이 고맙다. 이런 시기에 엄마에게 와줘서. 니들이 내 희망이고 행운이고 삶의 낙이야.


전뇌 방사선 종료

투병 2020. 7. 14. 10:44

  전뇌 방사선 10회가 종료됐는데 어제 밤에 방사선 받기 전에 아팠던 부위가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맞았다고 한다. 설마 전뇌 방사선 아무 효과가 없었던건가. 무섭고 두려워서 아침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임신 부작용인지, 약 부작용인지 모르겠는데 코가 부어 올라서 아프다. 난 내일 초음파 보는데 아기들 잘 크고 있으려나. 이렇게 허구헌 날 우리 엄마 걱정하고 우는데, 애기들한테 미안하다. 매일 매일 즐거워해도 모자란데.

  우리 엄마 정말 전뇌 방사선 효과가 아예 없었던건가. 60% 정도 환자들한테 효과가 나타난다는데 설마 우리 엄마가 그 40% 인건가. 무섭다. 무섭다.... 퇴원하자마자 똑같은 두통이 생길까봐. 제발 하나님 매일 울면서 기도하잖아요. 들어주세요.


원망

투병 2020. 7. 13. 15:55

  엄마를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기도드리고 기독교 서적을 읽고 찬송가도 듣는다. 내 모든 걸 아시는 건 주님 뿐인데, 그렇다면 내 모든 슬픔을 만드신 것도 주님 아닌가.

  대체 우리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세번의 개복수술과 몇십번 넘는 항암을 이겨냈으면 살려주실 법도 하지 않은가. 충분히 무서웠고, 충분히 고통받았는데 왜 우리 엄마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나빠지기만 할까.

  더 웃긴건 우리 엄마가 저렇게 고통 받아도 난 차마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의 큰 뜻이 있다고 해도 대체 왜 그 대상을 우리 엄마로 삼으신걸까. 이모는 그게 그냥 니 엄마의 복이고 팔자라고 하는데 그런 팔자 정하는 게 누군데. 하나님이잖아. 왜 우리 엄마와 나를 이런 팔자로 태어나서 살게 하신건데.


주말의 엄마

투병 2020. 7. 6. 15:27

  엄마 척수 전이 소식을 들은 뒤론 매일 하나의 의식처럼 울면서 기도를 한다. 토요일에 엄마를 보고 왔다. 22일 입원 후로 한 번도 씻지도 못한 데다 갑작스럽게 살이 빠져 희고 곱던 엄마의 피부가 정말 망가졌다.

  남동생네 부부도 왔다갔는데, 참 사람이 내 맘 같지 않다. 남동생네 부부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엄마도 아빠도 조금은 섭섭함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어차피 남동생이 같이 살 사람은 며느리라고 둘이 사이좋으면 됐다 생각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고 위로했는데 집에 와선 나 역시 못내 서운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아빠가 분명 언제가 됐든 며느리한테 한 소리하실텐데 그러다가 남동생네가 완전히 아빠한테 발길을 끊어버릴까 봐 무섭다. 내가 전화해서 빌고 또 비는 수밖에 없겠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겁먹을까봐 관련 정보를 하나도 안 찾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라도 찾아보는 사람도 있다. 난 후자 쪽인데 엄마가 전뇌 방사선 받기로 하셨을 때 국내 암 커뮤니티를 싹 뒤져서 온갖 정보를 다 찾아봤다. 전뇌 방사선 후 인지능력이 갑자기 확 떨어지거나 못 걷는 경우가 꽤 많이 발생해서 어느 정도 각오는 했다. 제일 무서웠던 부작용은 갑자기 안 보이게 되었다는 건데, 다행히 우리 엄만 복시로 보이는 현상이 더 심해지진 않는 것 같다.

  저번주에 의료진이 연명치료 거부서와 장기기증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가져왔다는데 우리 엄마는 연명치료 중단이 항암치료 중단이라는 의미인 줄 알고, 왠지 자살을 택하는 기분이 들어서 아직 싸인을 안 했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드렸다. 꽤 중요한 서류인데 환자한테 그런 서류 갖다 주면서 어느 정도는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뇌부종 때문에 스테로이드를 때려붓고 있어서 그런지 간수치가 계속 상승 중이다. 전뇌 방사선 끝나면 항암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데 지금 이 간수치면 아무것도 못한다.

  대부분 뇌척수 전이 환자들은 1년내 사망이지만, 어제 유방암으로 뇌척수 전이 후 6년째 잘살고 있다는 글을 봤다. 그분은 30대에 확진받은 거라 엄마보다 훨씬 젊고 암이 재발하면서 뇌척수 전이가 발생한 건 아니라 엄마와 좀 경우가 다르지만, 때론 이론만으로 설명 안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구나.. 생각했다.

  난 우리 엄마도 이론과 달리 4기여도 완치되어 하나님의 기적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리라 자신했다. 대체 뭔 자신감이었을까. 2016년 7월 진단 이후로 엄마가 멀쩡했던 기간을 다 합쳐봤는데 2년이 안된다. 이외 시간은 수술 입원이거나 항암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2016년 7월 마지막주에 확진받았는데 이제 곧 만 4년이다. 만 5년까진 무난할 줄 알았는데... 헛된 꿈이었다.


목소리

투병 2020. 7. 3. 11:13

  월요일 아침 통화한 이후 처음으로 엄마와 통화했다. 한고비 넘겼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시력은 어쩌냐고 물어봤는데 말끝을 흐리는 거 봐선 점점 더 나빠지는 모양이다. 엄마에게 척수 전이되면 천천히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도저히 못 드렸다.

  괴롭기만한 뇌척수 전이 증상들과 임종 시기를 검색해본다. 시신경이 압박받은 기간이 길지 않으면 기적적으로 방사선 치료 후 시력이 회복되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력부터 시작해서 청력을 잃고 나중에는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 같다.

  못된 생각이지만, 난 차라리 엄마가 그렇게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자식한테 폐끼치는 걸 싫어하는 엄마가 만약 그 지경이 되면 내가 자식들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 견디지 못하실 것이다.

  주말에 병원 올 때 자두를 씻어서 가져오라고 하셨다. 먹고 싶은 게 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하다.

  블로그에는 이렇게 포기한 듯 쓰지만, 어제 밤에도 미친 듯 울면서 기도했다. 우리 엄마가 국립암센터의 전설이 되게 해 달라고. 뇌척수 전이돼서 가망 없었는데 여전히 살아계신 분 계시다면서 다른 환자들이 희망을 갖도록 만드는 불사신이 되게 해 달라고.

  뇌척수 전이를 찾아볼 때마다 대부분 3개월 안에 돌아가신 것을 보고 가슴을 쥐어뜯다가도 아니야 하나님이 살려주실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가졌다가 정신을 못 차리다가 다시 차리다가 그러면서 오늘 또 하루를 보내본다.


만약에 엄마가 이번 고비 넘기고 퇴원해서 집에 가시면... 집에 있는 엄마를 본다면 보자마자 껴안고 엉엉 울어버릴 것 같다.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도 안 나겠지.

퇴근과 동시에 눈물이 터지고 할 수 있는게 기도뿐이라 기도만 드린다.

내 행복의 마지막 퍼즐은 엄마다. 엄마의 건강. 엄마만 건강하면 만 36년 동안 그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것이다.

주말에 엄마보러 병원에 가는데, 마주할 자신이 없다. 환자가 울면 기운이 빠지니까 안 울어야 하는데,

저번 주말 병원가서도 용케도 안 울고 집에 잘 왔는데 일주일사이 많이 쇠약해진 엄마를 어떻게 볼지. 자신이 없다.


신태인 이모

투병 2020. 7. 1. 16:14

  우리 엄마가 처녀 시절 회사 생활할 때 엄마처럼 밥도 챙겨 먹이고, 돌봐줬던 큰 이모는 정읍 신태인에 사셔서 통상 신태인 이모라고 한다.

  엄마가 도저히 전화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 전화기까지 고장나서 답답한 마음에 신태인 이모께서 어젯밤에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이번에는 엄마가 다시 못 일어나실 것 같다고 하니 죽으려나 보다고 하면서 우리 엄마가 시집가기 직전까지 얼굴은 아주 순진하게 생겨가지고 애기 같았는데 시집가선 내내 가난하게 살면서 정신적으로도 고생했다고 말하며 우셨다. 그러면서 복 없이 생기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렇게 불쌍하고 복이 없냐고 하시더라.

  엄마는 아빠의 불같은 성격때문에 항상 노심초사하고 아빠의 그 문제적 성격 때문에 아빠가 직장 생활이 불가능해지면서부터는 거의 엄마가 돈을 버셨다. 아빠를 직장에 내보냈다가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고, 나도 엄마도 차라리 아빠가 집에 혼자 계시는 게 속이 편했기 때문에 돈 안 버는 아빠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우리 모녀에겐 사고를 안치는 아빠가 돈버는 아빠보다 더 중했으니까. 

  남동생이 몇년전 엄마한테 전화해서 결혼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엄마 가슴을 찢어놓았는데, 그때부터 우리 엄마는 요양보호사 일을 미친 듯 하셨다. 한 여름에 그 땡볕을 돌아다니면서 노인 집에 가서 똥오줌 치우는 일만 하루 10시간씩. 거기에 막말까지 들어가면서 말이다.

  내가 제발 일 그만하라고 해도 엄마는 말을 듣지 않으셨다. 그러다 난소암 진단을 받고 그제서야 엄마는 일을 관뒀다. 나중에 물어보니 남동생 장가갈 때 단돈 천만 원이라도 주고 싶어서 그러셨단다. 하루 10시간씩 죽어라 해도 당시 세후 100만 원 겨우 넘는 돈을 겨우 받았을 뿐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렇게 애쓰셨던 거다. 몸도 약하면서.

  나중에 병에 걸린 뒤론 엄만 하나님께서 일그만하고 쉬라고 병걸리게 한 것 같다고 했는데, 요즘 들어선 평생 우리 엄마 고생시킨 아빠를 벌주기 위해서 엄마를 아프게 한 것 같다. 만약 아빠가 아팠으면 온갖 짜증과 화 다 우리 가족한테 풀었을 거고 그럼 또 나도 엄마도 맘고생을 많이 했겠지.

  아빠 친구분중 부인이 교통사고로 즉사하여 몇 년 전부터 혼자 살고 계신 분이 있다. 그분은 부자고 자식들도 다 돈 잘 벌어서 혼자 사는데도 큰 어려움이 없고 오히려 이젠 누군가와 같이 살 자신이 없다고 그러셨단다.

  근데 우리 아빠는 모아놓은 재산도 없고 자식이라고는 나랑 남동생인데 둘다 벌이도 시원찮고... 엄마가 아픈 뒤로도 내가 그렇게 제발 고치라고 애걸복걸해도 전혀 못 고친 아빠의 성격, 엄마가 돌아가신다고 고쳐지진 않겠지.

  다시 한번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남편이 없었음 엄마가 다 받아주던 아빠 성격 내 차지였으리라.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아빠 때문에 함께 고통받았던 나의 엄마. 나이 들어 아빠 병수발들고 고생하느니 아빠보다 빨리 가시는 게 차라리 나은 걸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젠 갈 때 가시더라도 제발 고통없이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보려고 한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랑 재밌게 얘기하고 주무시듯 돌아가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