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산시로, 문 까지 3부작 다 읽었다. '문'은 '그 후' 의 다음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인데 생각보다 너무 불행해서 속상했다. 소설 '그 후' 에서 다이스케 보면서 부럽고 질투나고 심지어 화까지 났지만 '문' 에서는 불쌍했다. 소설 주인공은 소스케 인데, 오요네와 서로 의지하며 도쿄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친구의 아내를 동생인 줄 알고 본의 아니게 빼앗아버린 소스케는 3번의 유산 역시 하늘이 내려주는 벌이라고 생각할만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다. '그 후 에서는 친구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미치요와 다이스케가 도망치지만, '문' 에서의 소스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님에도 왜 그렇게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라고 소개한 야스이가 더 잘못 아닌가. 나 때문에 남이 불행해졌다는 느낌을 아직 받아본 적은 없다.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 때문에 남이 불행해졌다는 그 죄책감은 어떤 느낌일까? 소스케처럼 그 어떤 불행이 오더라도 다 예전의 나 때문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일까? 죄책감은 어차피 다가올 수 밖에 없었던 불행까지도 과거의 일과 인과 관계를 억지로 만들 수 밖에는 없는 것일까.
한 때는 그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었다. 남의 인생을 송두리째로 불행하게 만든 적은 없고, 없다고 믿고 있지만, 아주 잠시 한 2년동안 나에게 닥친 불행이 다 과거 내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척, 괴로운 느낌이긴 했다. 후회해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괴로움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으니 우울할 수 밖에는 없다. 3부작을 주인공의 나이순으로 배열해보면 산시로-그 후-문 이 순서가 되는데 날씨 역시 봄 여름-여름 초가을-가을 겨울 순으로 되어 있다. 사랑에 빠지는 봄,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마는 여름,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겨울. '산시로' 읽을 땐 기분이 좋았고, '그 후'는 흥미진진 했는데 '문'은 읽는 것 만으로도 괴로워 지는 책 이었다. 그만큼 나쓰메 소세키가 잘 썼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못된 숙모 말이다. 완전한 악역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유형의 악인 인 거 같다.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르게 아닌 척 나쁜 짓 하는 못된 사람 말이다. 요즘 드라마 유행은 악인한테 한방에 복수하는 거 던데, 이렇게 복수 하는 거 왠지 품위 떨어지는 거 같다. 읽기 괴롭고 화나도 그냥 아무말 못하고 당하는 사람 심리나 모습 보여주는 게 공감이 가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렇게 당하고만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기도 하고 말이다. 소스케도 결국 끝까지 당하고 산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겨울을 지나 봄을 맞지만, 소스케는 다시 겨울이 오겠지. 라고 말을 한다. 결국 소스케와 오요네는 평생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 일까? 나쓰메 소세키는 아무래도 이 부부를 끝까지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나보다. 아 당분간은 재밌는 소설 읽어야지. 우울해지는 소설은 그만 보련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 억지로 읽었다. 내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고난이도의 책이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고, 특별한 주인공도 없고, 특별한 배경도 없고 단지 글쓴이의 생각을 줄줄 나열해 놓은 책인데 나같은 무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사 놓은지 오래되어놔서 왜 이 책을 골랐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내가 이 책을 산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저 사진 때문인가보다. (전에 유리문 안에서 에서 나왔던 이야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핵토르"일화가 생각나는 귀여우신 사진 아닌가)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가지고 다니기 좋은 크기도 한 몫했다. 아 물론 가격도 싸다. 이 책에 나오는 나쓰메 소세키의 견해 사상에 대해 동감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책이 되겠지만, 나로서는 거의 모든 페이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나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님) 나는 책 읽을 때 앞에 부분이 별로면 영원히 읽지 못하는데 이 책은 앞부분이 특히 좋았는데, 내가 이해한 구절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부터는 좀 쉬운 책을 읽겠다.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知)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p.7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소담출판사
풀베개와는 달리 아주 빠른 속도로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최고 좋아하는 장면은 도련님이 시코쿠의 중학교 선생으로 배정되어 교무실에 들어가서는 각 과목 선생들을 묘사하며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뒤 부터는 각 과목 선생 이름 등은 생략하고 모두 다 별명으로만 불리는데, 이 방법은 내 친구들과 내가 자주 애용하는 방법 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가?)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 때 좋아했던 남자들에 대해 말할 때도 친구들에게는 실명을 말하며 설명한 적은 거의 없다. 이 책의 주인공한테 많이 공감한 이유는 주인공도 학교를 벗어나 사회생활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치를 떨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도련님은 후련한 복수를 하고 시코쿠를 떠나와 어렸을 때 부터 자기를 이뻐해주던 (엄마와 다름없는) 하녀와 함께 사는데 나도 여기 도련님 처럼 그런 하급 인간들처럼 되지 않고 고고해야 할텐데 조금 자신이 없다.
내가 요즘 들어 곰곰히 생각하는 게 있는데 사방에 적이 없는 사람은 사방이 적인 사람들보다 더 경계를 해야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적을 안 만들면서 친구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불가능 하다는 쪽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적이 같아서 친구가 되든가 친구기 때문에 적이 같든가. 둘 중 하나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우애 같은 걸 논하면 웃기겠지만 싸우는 대상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보다는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 같을 경우에 훨씬 친구 사이가 돈독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역시 우정과 의리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100배 이상으로 위대한 것이다. (크크크 새벽에 블로그 하니까 이상한 얘기 막나오네) 직장생활이라는 게 이런 면에서는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현재까지는 잃은 것이 더 많지만, 여기 책 주인공 처럼 나도 나중에 직장 박차고 나가면서 깨닫고 얻는 바가 많을 거라 위로해야지.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옳지 못한 일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 악하게 굴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듯 하다. 가끔 순진하고 솔직한 사람을 보면, '샌님'이니 '쑥맥'이니 하면서 트집잡고 경멸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시간에 왜 '거짓말을 하지 말라' 라든가,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오히려 대담하게 '거짓말하는 비법'이라든가, ' 사람을 믿지 않는 술법', 또는 ' 사람을 속이는 술책' 등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편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p.95
내가 번역된 책을 읽을 때 마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항상 책에서 나오는 특히 일본어 번역체에서 나오는 " ~라든가" 라는 말 밀이다. 일본에는 특별히 많이 쓰는 말일까? 솔직히 말하면 난 평소 때 대화에서나 일기 쓸때도 "~라든가" 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유독 일본어 번역체에는 저 말이 많은 것 같다. (위에 구절도 마찬가지)
얼마전에 산시로를 다 읽었다. 해설부분을 보면 이광수도 이 소설을 읽었다고 써 있다. 이광수 하면 내 친구가 해줬던 일화가 생각나는데 이광수가 친일을 조금 했지 않나. 그래서 김동인이 이광수네 집에 와서 형 그냥 자살하라고 그렇게 하면 후대 사람들이 형을 기억해줄거라고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단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광수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읽은 책에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집착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써 있어서 완전 웃겼다는. (그 필자는 이광수가 죽었음 했나보다) 산시로를 읽은 이유는 요 전에 읽었던 그 후의 바로 앞 이야기라고 해서였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후 남자주인공의 대학생 시절 이야기 쯤으로 생각하면 쉽겠다. 산시로의 첫 부분은 뒷장이 너무 궁금해서 못견딜 정도로 재밌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산시로가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공부하러 상경하는 부분부터 시작을 한다. 산시로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히로시마에 사는 어떤 여자가 아이 장난감을 사러 간다며 기차에 탄다. 중간에 산시로가 여관에서 묵으려고 내리는데 그 여자가 따라 내린다. 그리고선 여관까지 같이 들어와선 목욕하러 가는데 등 밀어드릴까요? 라고 해서 산시로가 놀라며 거절, 심지어 산시로 옆에서 드러누워서 같이 자기까지. 이불이 하나 뿐이라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누워 있는데 이때 산시로가 한 행동은 그 여자와 자신이 누워있는 이불의 경계를 손으로 착착착착 세워서 선을 만들어 놓는 것 이었다. 흐흐흐. "아무일 없이" 하룻밤이 지나고, 여자는 기차를 타는 산시로에게 마지막에 "당신은 참 배짱없는 분이군요." 라고 말을 하고, 산시로는 얼굴이 붉어진다. 산시로의 성격과 처지를 이 에피소드 하나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준 나쓰메 소세키는 역시 멋쟁이. 그런데 산시로의 고향 구마모토 말이다. 작년 여름 휴가 때 한 번 간적이 있던 동네다. 지금도 구마모토는 1930년에 만든 것 같은 전차가 다니고 거리에 사람도 몇 명 없는 깡시골이던데, 웬지 완전 반가웠다. 외국 소설인데 내가 아는 곳이 나오니까.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또 내가 이 책 읽으면서 공감했던 건 대학교 때문에 도시로 올라와서 겪는 산시로에 심리상태인데, 내가 올라와서 공부하겠다고 올라와서 엄마한테 땡깡도 못 부리고 외롭고 힘들긴 하고,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고 고등학교 때랑 달라져가는 심리상태에 좀 혼란스럽고 그런 하여튼 허한 감정에 감정이입 해버렸다. (그 부분은 바로 아래에) 이래서 역시 소설이 좋다.
산시로가 가만히 연못 수면을 응시하고 있으려니까 커다란 나무가 몇 그루인가 물 속에 비치고 그 속에 푸른 하늘이 보인다. 산시로는 이 때 전차보다도 도쿄보다도 일본보다도 멀고 또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느낌 속에 옅은 구름과도 같은 외로움이 온 몸으로 퍼져왔다. 지금 노노미야씨의 지하실에 들어가 홀로 앉아 있는 듯한 적막감을 느꼈다. 쿠마모토의 고등학교에 있을 때도 이보다 조용한 타츠타야마에 오르기도 하고 달맞이 꽃만이 온통 피어있는 운동장에 눕기도 하며 완전히 세상을 잊은 듯한 기분이 든 적은 몇 번인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고독감은 지금 처음으로 느꼈다. ----p.23
책 자체에 대해 불평을 말하자면, 설명 같은 거 제대로 써 있는 건 좋은데 예전 사회과부도같이 무겁고 번떡거리는, 수성펜을 사용할 시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무거운 종이라 출퇴근 시간에 들고다니느라 무거워서 혼났다.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숲
나쓰메 소세키가 지병으로 죽기 직전에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놓은 산문집. 글씨가 아주 큼지막하고 생각보다 무지하게 얇아서 빨리 읽힌다. 난 그냥 Yes24 에서 유리문 안에서를 치고 맨 위에 있는 책을 샀는데 사고 보니 이 책 디자인에 돈을 많이 들인 책 이었다. 저 표지에 있는 사진이 표지에 인쇄된 게 아니라 표지 바로 안에 인쇄가 되어 있는거고 검정색 표지는 저 사진이 보이도록 구멍이 뻥 뚫려있다. 그런데 왜 이 책 내용과 전혀 관계 없는 저 그림이 들어가 있는 지 모르겠다. 소금호수라고 하던데. 차라리 이 산문집과 정말 관계 있는 나쓰메 소세키가 실제로 집에서 보았던 유리문 밖 풍경을 보여주든가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래도 뭐 가볍고 재밌었으니까 참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철학이나 불행했던 어린 시절 등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책을 덮고나서 첫번째로 생각나는 건 나쓰메 소세키가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핵토르 였다는 것 이었다.;;; 강아지 이름을 핵토르로 지은 것을 말하면서 핵토르는 아킬레스에게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죽은 뒤 시체가 말에 매달린 뒤 질질 끌려갔다는 일화까지 소개해주시는 센스. 어쨌든 강아지한테 핵토르라고 이름 지어준 걸 보면 역시 나쓰메 소세키 아저씨는 그 외모에 부응하는 꽤나 귀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람된 말이지만 난 나쓰메 소세키 아저씨 귀엽게 생기신 거 같어;;)
'그 후' 를 읽고 관심이 폭증하여 사놓은 나쓰메 소세키 책이 아직 몇 권 더 있는데 어서 읽어야겠다. 생각보다 하루에 책읽는 시간이 매우 적어 일년에 읽는 책의 양은 안습수준. 그렇다고 책을 읽고 싶지 않을 때 억지로 읽는 건 싫고. 지금 읽는 건 '도련님' 인데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산시로' 와는 달리 엄청 재밌다!!!!
2008년 내내 읽은 책들 중에서 최고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들이었다. 다른 블로거들 처럼 정성스러운 서평은 1년에 한 번도 잘 못쓰는 나이지만, 로알드 달에 대해서는 진짜로 뭐라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소설이 다들 너무 너무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 재밌는 소설의 세계로 빠졌으면 하기 때문에. 아침에 로알드 달 소설 읽다가 두번씩이나 내려야할 서울역을 지나 시청역까지 갔었다.
저번 봄 휴가 때 나들이 나간 영풍문고 세일코너에 로알드 달의 "세계챔피언"과 "맛"이 있었는데 내 절친 민양이 이사람 책 진짜 진짜 재밌다고 둘다 너무 재밌다고 두권 다 사라고 적극 추천을 했더랬다. 그래도 한권만 골라줘봐 했더니 "맛" 을 골라줬었다. 결국엔 나중에 "세계챔피언"도 사고 "개조심"도 사고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 "당신을 닮은 사람" 도 사버렸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와 당신을 닮은 사람은 아직 못 읽었다.(근데 당신을 닮은 사람은 앞 서 읽은 소설이 많이 중복되더라) 난 안톤 체호프 같이 간결하고 위트있고 뒤가 너무 궁금해서 빨리 이 페이지를 넘기고 싶어서 안달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이런 책 안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 안톤 체호프 책 이후 이렇게 재밌는 단편 소설집은 정말 처음이다.
Roald Dahl (1916.10.03 ~ 1990.11.23)
'에드가 앨런 포' 상을 두 차례.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사람. 1916년 사우스웨일스에서 태어나 영국의 랩턴 스쿨을 다녔다. 부모는 노르웨이 이민자들이었다. 재기와 상상력으로 충만한 꺽다리 소년이 억압적인 학교교육과 충돌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나가는 성장기 이야기는 그의 자전소설 [보이] 에 잘 그려져 있다. 랩턴 스쿨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그가 선택한 진로는 석유회사 쉘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공군에 지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1942년 워싱턴 영국 대사관의 공군 무관으로 부임한 뒤, 정보국으로 옮겨 공군 중령으로 종전을 맞았다. 그의 작가적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전장의 경험을 담은 단편소설들을 미국의 유력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했고 기발한 이야기 솜씨는 단번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첫 단편집 [개조심 (원제: Over to you)] 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어 두번째 단편집 [당신을 닮은 사람] 이 나왔고 이 책으로 '에드거 앨런 포'상과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수상했다. [찰리와 초코릿 공장],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등 전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한 술수 등 인간사의 미묘한 국면을 차근차근 밀도 높은 이야기로 조여붙이는 그의 솜씨는 마침내 절묘한 유머와 반전을 선사한다. 2000년 '세계 책의 날' 전세계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혔다.
내동생 책상 위에서 로알드 달의 책. 흠 뜬금없는 말이지만 내동생 책상밑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스터가 깔려있다.
1. 맛 (원제 : Taste)
- 목사의 기쁨 (Parson's Pleasure)
- 손님 (The Visitor)
- 맛 (Taste)
- 항해거리 (Dip in th Pool)
-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Mrs Bixby and the Colonel's coat)
- 남쪽 남자 (Man from the South)
- 정복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queror)
- 하늘로 가는 길 (The Way up to Heaven)
- 피부 (Skin)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Lamb to the Slaughter)
- 목사의 기쁨 : 목사로 꾸미고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시골집에 숨겨져 있는 오래되고 비싼 가구를 찾아 헐값에 사고 비싼 값에 파는 보기스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을 읽고 "오 신선한데?" 라는 생각에 다음 소설에도 기대하기 시작했다. 끝 마무리가 아주 산뜻하다! -회색박스 안은 소설 줄거리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발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전문가라면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만한 가구였다. 문외한은 별 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더러운 흰 페인트로 덮여 있을 때는. 하지만 보기스 씨에게 이것은 고가구상의 꿈이었다. 보기스 씨는 유럽과 미국의 다른 모든 고가구상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18세기 영국 가구 가운데 누구나 선망하는 가장 유명한 물건은 '치펀데일 장' 이라고 알려진 가구 세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태연하게 치펀데일 장 옆을 지나가면서 경멸감을 드러내듯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다. "몇 파운드는 나가겠군요. 안됐지만 그 이상은 안되겠어요. 안타깝게도 좀 조악한 복제품인 것 같네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흰색으로 칠한 건가요?"
- 남쪽 남자 : 호텔에서 벌어지는 미국인 남자와 남쪽에서 온 중년 남자간의 내기. 로알드 달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기'에 대한 얘기로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설인 듯 하다.
"자 불은 여기 있습니다. " 미국인 청년이 라이터를 치켜들었다. "바람 때문에 소용없을 거요." "천만에요. 잘 켜질겁니다. 언제든지 잘 켜지거든요." 작은 남자는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서 떼어내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남자가 천천히 되물었다. "그럼요. 한 번도 안 켜진 적이 없거든요. 적어도 제가 켰을 때는요." (...중략...) "그럼 작은 내기를 한번 해볼까?" 남자는 청년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중략...) "미친 짓이라니. 젊은이가 라이터를 열 번만 켜면 캐딜락은 그쪽 게 되는데. 캐딜락이 갖고 싶지 않소?" "갖고 싶죠. 캐딜락이야 물론 갖고 싶습니다." 청년은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럼 좋아. 우리는 내기를 하는 거고. 나는 캐딜락을 걸겠소." "그럼 나는 뭘 겁니까?" 작은 남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시가에서 빨간 띠를 조심조심 떼어냈다. (...중략...) "없어도 그만인 작은 걸 하나 거시오. 혹시나 잃게 되더라도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을 만한 거. 알겠소?" "예를 들어 어떤 거죠?" "예를 들어. 어디 보자. 젊은이 왼손의 새끼손가락 같은 거."
2. 세계 챔피언 (원제 : The Champion of the World)
- 클로드의 개 (Claud's Dog)
세계 챔피언 (The Champion of the World) 피지 씨 (Mr. Feasey) 쥐잡이 사내 (The Rat Catcher) 러민스 (Rummins) 호디 씨 (Mr. Hoddy)
- 탄생과 재앙 (Genesis and Catastrophe)
- 조지 포지 (Georgy Porgy)
- 로열 젤리 (Royal Jelly)
- 달리는 폭슬리 (Galloping Foxley)
- 소리 잡는 기계 ( The Sound Machine)
- 윌리엄과 메리 (Willian and Mary)
- 세계 챔피언 : 세계 최고의 꿩 밀렵꾼이 되기 위한 클로드와 고든의 눈물겨운 노력. 내가 좋아하는 덤엔더머 삘 소설이라 좋다!
"건포도를 잊은 모양인데. 자 들어봐. 우선 건포도를 구해야 돼. 건포도를 물에 담가서 불려. 그런 다음 면도칼로 한쪽에 조그만 흠집을 내고 속을 약간 파놓는 거야. 그리고 빨간 수면제 캡슐을 열고, 가루를 그 속에 쏟아 넣어. 그리고 나서 바늘하고 실로 아주 꼼꼼하게 그 구멍을 꿰매면?" (...중략...) "게다가, 이 방법을 쓰면 정말 크게 한탕 할 수 있어. 원한다면 건포도 스무 알도 준비할 수가 있다구. 우린 그저 해질녘에 사육장 주변에 건포도를 뿌려놓고 가면 돼. 반시간 후쯤 우리가 돌아와보면 약효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해서 나무 위에서 잠든 꿩들은 갑자기 어지럼증 때문에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고 하겠지. 건포도를 한 알이라도 먹은 꿩은 곧 졸도해서 땅에 떨어질 거야. 이봐. 꿩들이 나무에서 사과처럼 떨어질 거라고!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가서 줍기만 하면 되는거야!" 클로드는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세상에." 그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 달리는 폭슬리 : 고등학교 때 지독히도 자신을 괴롭히던 폭슬리를 어른이 되어서야 출근길 전차 안에서 만나게 된 윌리엄에 대한 이야기.
"이번엔 어떻게 할래? 가운 입고 여섯 대, 아니면 벗고 네 대?" 나는 이 질문에 감히 한 번도 대답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잔뜩 겁에 질린 채 더러운 마룻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이 키 큰 소년은 곧 가늘고 긴 흰 막대기로 천천히, 과학적으로, 능숙하게, 합법적으로, 거기에다가 재미까지 느껴가면서 나를 내리칠 것이고, 내 몸에서는 피가 나게 될 거라는 생각 뿐이다. (...중략...) 아. 그 끔찍했던 날들. 폭슬리의 토스트를 태우면 '매로 다스릴 죄' 였다. 폭슬리의 축구화에 묻은 진흙을 털지 않아도 그랬다. 폭슬리의 우산을 다른 방향으로 잘 못 말아도 그랬다. (...중략...) 사실 폭슬리에게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매로 다스려야 할 죄였다. 언뜻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벌써 거의 다 도착했네.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는지 [더 타임스]는 펼치지도 않고 있었다. 폭슬리는 내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아 아직도 [데일리 메일]을 읽고 있었다.
3. 개조심 (원제 : Beware of the Dog)
- 어느 늙디늙은 남자의 죽음 (Death of an Old Old Man)
- 아프리카 이야기 (An African Story)
- 마담 로제트 (Madame Rosette)
- 카티나 (Katina)
- 어제는 아름다웠네 (Yesterday was Beautiful)
- 그들은 늙지 않으리 (They shall not grow Old)
- 개조심 (Beware of the Dog)
- 오직 이뿐 (Only This)
- 당신 같은 사람 (Someone like You)
: 실제로 조종사로 제2차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으로 어떤 소설이 더 좋았다고 뽑을 수 없을만큼 모든 소설이 다 폼나고 멋있었다. 전쟁에 대한 환멸, 조종사로서 전투에 나서는 자의 두려움 등이 꼭 전쟁영화보는 것 처럼 생생하다. (역시 난 연애 소설 체질은 아닌 것 같다.)
- 어느 늙디늙은 남자의 죽음 : 어느 독일군 조종사와 어느 영국인 조종사간의 전투. 그리고 그 끝.
그는 더 이상 발버둥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버둥거리지 않으니 얼마나 상쾌한가, 그는 생각했다. 발버둥쳐봤자 아무 소용 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열심히 발버둥치다니 나도 참 아둔한 놈이지.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끼었는데 햇빛을 달라고 기도하다니 진짜 미련해. 진작부터 비를 달라고 기도했어야지. 진작부터 비를 달라고 소리쳤어야 해. 비를 뿌리세요. 좍좍 뿌리세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소리쳤어야해. 그러면 쉬웠을텐데. 그러면 한결 쉬웠을 텐데. 난 오 년 동안 발버둥쳤지.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 이게 한결 나아. 이게 훨씬 나아. 저기 어딘가 내가 걷고 싶은 숲이 있는데 그 숲을 발버둥치면서 걸을 수는 없잖아. 저기 어딘가 내가 함께 자고 싶은 아가씨가 있는데 그 아가씨와 발버둥치면서 잘 수는 없잖아. 그 어떤 것도 발버둥치면서 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도 삶을 발버둥치면서 살 수는 없지.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몽땅 할거야. 더이상 발버둥 치는 일은 없을거야.
- 마담 로제트 : 이탈리아군과 싸우기위해 리비아에 주둔하던 영국 조종사 스터피와 수사슴이 주인공. 악덕 포주인 마담 로제트로부터 아가씨들을 구출하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에 키 큰 흑발 아가씨가 수사슴 팔짱끼는 장면이 백미!
"괜찮은 여자더군." "물론 괜찮은 여자죠. 있잖아요. 수사슴?" "왜?" "오늘밤에 그 여자와 데이트하고 싶어요." 두 사람은 거리를 가로질러 조금 더 걸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래? 로제트에게 전화를 걸어봐." "뜬금없이 로제트가 누구예요?" "마담 로제트. 굉장한 여자지." (...중략...) "세상에, 정말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겠군요. 마담이 진짜로 아가씨들을 모질게 부려먹나요?" "일전에 제33비행중대에게 들었는데 아가씨들을 거의 공짜로 부려먹는다더군. 하룻밤에 이십 아케르 정도만 준다나. 그러면서 고객들이게는 일인당 백에서 이백 아케르를 받아내지. 매일 아가씨 한 명당 오백에서 천 아케르를 마담에게 벌어주는 셈이야." (...중략...) 그들은 복도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악쓰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여자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며, 이에 맞춰 계속 악쓰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말을 할 줄 아는 분노한 황소의 소리였다. 수사슴이 말했다. "이제 서두르게. 아가씨들을 구해야지. 그리고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행동해야 해. 아주 진지하게."
- 카티나 : 나 솔직히 이 소설 읽고 출근길에 울었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그리스 소녀 카티나를 영국 공군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이다. 소설 맨 앞에 ' 제1차 그리스 작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한 짧은 글' 이라고 적혀있다. 저번 독일 월드컵 때 영국 축구팬들이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본토를 폭격한 독일을 조롱하는 문구의 티셔츠를 입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봤는데, 독일이 유럽에선 아시아의 일본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유럽에선 전쟁의 주범이 독일. 아시아에선 일본.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추측일 뿐이다)
소녀를 제일 먼저 본 사람은 피터였다. 소녀는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아주 가만히,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소녀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온 사방에서는, 작은 거리 곳곳에서는 사람들이 물동이를 들고 앞 뒤로 뛰어다니며 불타는 가옥들의 창문에 끼얹고 있었다. 길 건너편 자갈밭에는 소년의 시체가 있었다. 사람들 발에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누군가 길섶으로 치워둔 모양이었다. 좀더 아래쪽에서는 한 노인이 돌 파편 더미를 파헤치고 있었다. 노인은 돌덩이를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여 옆쪽에 치웠다. 때때로 그는 허리를 굽히고 잔해 속을 들여다보며 어떤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불렀다. 사방은 온통 고함소리와 허둥대는 발걸음과 불길과 물동이와 먼지투성이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돌 위에 조용히 앉아 꼼짝 않고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 왼쪽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는 턱을 타고 꾀죄죄한 날염 원피스 위에 뚝뚝 떨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권은 완전히 실망스러웠다. 진부하고 또 진부했다. 진부함을 노리고 이렇게 쓴 거라면 대성공. 물론 나는 아사다 지로의 만분의 일 만큼도 글을 못쓰지만 어찌되었든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물론 여타 소설가 나부랭이라고 우리나라 서점가를 완전히 점령해버린 젊은 일본작가들보단 괜찮지만.
나카조삼촌의 사랑(보스의 여자를 사랑한다는 뻔한)도, 경찰과 야쿠자가 화해하는 과정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인 기도 고노스케 라는 작자도 마음에 안들었다. 더 괜찮은 캐릭터가 나와줬음 했는데 나나 라는 여자도 매력 없고 기분 나빴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와타나베 간사와 가가와 신스케 라는 사람이 등장했던 것.
이렇게 평면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돌머리를 탓하시든지 말든지. 기도 고노스케 라는 인물은 애정을 갖고 봐달라는 캐릭터인지 환멸하라는 캐릭터인지 이해가 안간다. 아무리 성질머리가 드럽다고 해도 정이 가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요 캐릭터는 정말 아니올시다 이다.
물론 기도 고노스케 라는 인물이 그렇게 폐륜아가 되어버린 건 그로 인해 나카조 삼촌하고 친엄마가 죄책감을 안겨주기 위한 설정이라는 것은 알겠다. 내가 기분 나쁜 건 기도 고노스케가 아니다. 개페미 라고 해도 이 말은 해야겠는데, 남자한테 얻어터지고 막말을 들어가면서도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건 개잡스런 허상이다. 설마 모든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여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하겠지만 아무리 소설이고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요코라는 인물이 이해가 안가고 나나 라는 인물도 이해가 안간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역겨워하고 혐오스러워 마지 않는 것이 이런 관계다. 이렇게 기분 나쁜 상태에서 왜 계속 읽느냐 집어쳐라 라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그냥 시작은 했으니 끝은 봐야겠다.
다음은 인상 깊었던 구절.
"어느 날 밤, 학교에 가보니 캠퍼스가 개판이 되어 있더군. 책상과 의자는 바리케이드로 변하고, 영문 모를 구호가 캠퍼스에 메아리치고, 한구석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어. 교정은 폐허나 마찬가지였지.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우리는 아냐. 부모에게 학비 받으면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학교에 오는 놈들이었어. 대단한 말들을 하더군. 일본제국주의 타도, 안보반대, 체제분쇄라고 말이야. 제국주의가 대체 어디 있는데. 그런 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허리까지 차는 눈길을 헤치고 고향을 떠나 개처럼 일을 해서 이제 겨우 대학이라는 문을 뚫고 들어왔는데. 즐거움이라고는 고작해야 일요일 밤에 신주쿠의 라이브 찻집에서 고함 한번 질러보는 것밖에 없었던 나한테 제국주의니 안보니 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냔 말이야. 그렇지 않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이런 말 할 자격 없는 편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살아온 인물이지만.. 취업전선에 있으면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오빠가 했던 말처럼 '그 사람들이 뭔데 사람 평가를 해?'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말 재주가 없어서 제대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충분한 비용이 있어야 하며,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하며, 충분한 심적 여유가 있어서 내 의지에 의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예정대로 행한 사치와도 같은 '고생' '고뇌'에 대하여 그것의 자신의 심오한 경험인양, 마치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양 포장하는 것도 짜증이 났고, 그 포장대로 옳타쿠나 하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짜증이 났다. 그에 비해 예상치도 못하게 내가 정말 피하고 싶은 고통을 남들한테 말한마디 못하고 고독하게 아무도 모르게 다 감당해온, 그걸 견디느라고 남들은 멋있다고 말하는 경험 한 번 해 볼 기회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왜 위에 말한 별것도 아닌 것들보다 못나게 그리고 불행하게 살아야 하느냔 말이다. 그리고 왜 더 게으르고 할 일없이 시간만 보낸 한심한 인간 대접을 받느냐 이거다.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서 억울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난 그야말로 귀찮아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니까 이 벌을 달게 받겠지만,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승승장구 하고 정말로 힘들게 견뎌온 사람이 겉에서 보기에는 초라하디 초라한 20대를 보내고 있다는 게 조금 화가 났다. 저 가가와 신스케의 말 처럼 말이다. 그냥 남들이 하는 거 평균정도만 하기에도 여러가지로 힘든 사람들이 있는거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안그런 사람들을 평생을 두고 비웃고 애송이라 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억울한데 당하는 사람은 어떻겠어.
다음은 내가 결정적으로 실망했던 계기.
나카조 오야붕은 주위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흥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구먼. 자, 이제 칸막이도 없어졌으니 여기서는 딱딱한 이야길랑 집어치우고 신나게 한번 놀아봅시다.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면 또 어떻소. 어이! 술,술 가져와. 술이고 안주고 있는 대로 몽땅 가지고 와!" 예잇, 하고 여급들이 먼저 웃음을 되찾고 달려나갔다. 까까머리를 맞댄 채 손을 꼭 잡고 있던 구로다와 마쓰쿠라 계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오물이라도 만진 듯 손을 털고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돌렸다.
이 앞에서 부터 위의 장면이 있는 페이지를 읽으면서 대략. '설마 아사다 지로.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경찰과 야쿠자가 화해하는 것은 아니겠지.' '헉. 왠지 불길한 예감이' '아아아아악. 안돼. 아사다 지로.. ㅠㅠ' 이런 상태였다. 소.. 솔직히 난 더 드라마틱한 화해를 원했다고.
어찌되었든 난 2권을 다 읽었고 현재 3권 즉 겨울 이야기 편을 읽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반 정도 읽은 지금 내 느낌으로 봐서는 가을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 같다. 이게 시리즈 물이고 어떤 권을 맨 처음으로 읽든지 내용파악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리포터처럼) 인물소개를 또 해주고 또 해주고 하는 건 좀 지겹지만.
아아. 그래도 아사다 지로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 지겹지 않게 해주셔서.; 적응안되는 저 표지는 그렇다 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