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사람들
국내도서
저자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 / 윤우섭역
출판 : 열린책들 200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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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4일 동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 은 나를 지배했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재밌어서 출퇴근 시간, 잠들기 전, 심지어 (사장님께는 좀 죄송하지만) 회사 근무 시간에도 몰래몰래 책을 읽었다. 구입할 당시 재밌을 거라 생각한 책은 아니었는데, 이 책이 올해 읽은 책 중 최고 재밌는 책 중 한 권이 될 줄이야!


  이 소설은 25살의 젊은 소설가였던 나 '이반 뻬드로비치' 가 군병원 침대에 누워 작년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곧 죽는다면, 이 회상기를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할 수도 있겠지?
  내 일생에 있어 매우 어려웠던 지난해가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생각난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것을 쓰고 싶고, 만일 내가 이 일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따분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지나간 감정들이 이따금 나를 아프고 괴롭도록 흔들어 놓는다. 붓 아래서 그것들은 더 조용하고, 더 조화된 성격을 가질 것이며, 그럴 수록 잠꼬대나 불안한 꿈 같은 느낌은 덜해질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여긴다. 글쓰기의 기계적인 활동은 이미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진정시키고 냉정해지도록 만들며, 나의 내부에서 과거의 작가적 습관을 일깨우고 나의 회상과 병적인 몽환을 일, 즉 작업으로서 변환시켜 놓는다…….
-p.26


   소설의 화자인 이반은 '가난한 사람들' 데뷔했던 청년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와 닮은 인물이고그렇다 보니 위에서 발췌한 부분처럼 실제 도스토예프스키를 엿볼  있는 부분이 소설에  많이 나온다. 난 훌륭한 소설을 쓰는 것이 꿈인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반과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둘 다 너무나 좋았다.


 
'상처받은 사람들  시기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고된 수용소 생활과 군역을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뻬제르부르그에 복귀한 때라고 하니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반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군역  간질로 병상에 누워있던 때를 반영했으리라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젠가는 뭔가를  쓰겠다는 신념으로 수용소와 군대에서의 모진 세월을 견뎠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치열하게 소설가이기를 원했던 사람을 어찌 싫어할  있을까.

 
내가 사랑한 인물 넬리에 대해 쓰기 위해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소설가로 성공적으로 데뷔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반은 뻬제르부르그에서 방세가 저렴한 방을 찾아다니다 스미트라는 기분 나쁜 노인의 죽음을 목격한다이반은 스미트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그가 살던 방에 방문하는데  방이 글쓰기에 적당하고 방세도 저렴하여 자기가 사용하기로 한다. 방에서 글을 쓰던 어느 날  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다소 이국적 분위기의 13살쯤  소녀 넬리(엘레나)가 스미트를 찾아오고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그녀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한편 일찍 부모님을 여읜 이반을 친부모님처럼 키워준 양아버지 이흐메네프(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그의 아내 안나 안드로예브나는 홀아비 공작 발꼬프스키(뾰뜨르 알렉산드로비치) 넓은 영지를 성실하게 관리해줬지만, 악랄한 발꼬프스키 공작은 이흐메네프에게 있지도 않은 횡령 혐의를 씌워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결국 부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자 이반의 유일한 사랑 나따샤와 함께 영지를 떠나 뻬제르부르그로 이주하고, 이반은 나따샤와 약혼한다. 하지만 이반의 기쁨도 잠시, 나따샤는 발꼬프스키의 아들 알료샤와 사랑에 빠지고부모님과 이반 모두를 배신하고 알료샤와 함께 야반도주를

  
줄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든 세상 속에서 인물들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서로 질투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화해하고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지만 전혀 어려운 소설은 아니다.   소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 걸작은 아닌지   같긴 하다나부터도 넬리와 이반 나오는 (chapter)  읽기 위해 다른 장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아니 매력을 못 느꼈다기보다는 넬리 외 다른 인물들이 다 미웠다. 심지어 착하디착한 이반도 가끔 꿀밤을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 밉상으로 보인 이유는 내가 넬리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했기 때문이다. 


  넬리는 겨우 13살 밖에 안됐지만 자기를 구해준 이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이 사랑은 존경, 우애 같은 성격의 사랑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사랑 바로 그것이다. 사실 넬리는 이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넬리에게 이반은 아빠이자 엄마, 그리고 친오빠, 친구 그리고 애인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은 중고시장에 가서 넬리 옷도 사주고 아프면 의사도 불러주는 등 정성을 다해 넬리를 돌보지만, 이반이 넬리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동정과 연민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오로지 단 한 명, 나따샤뿐이니까 말이다.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나따샤지만 이반은 끝내 나따샤를 사랑하며 그녀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이렇게 바보 천치 같은 이반이 어찌나 야속하든지.


  그녀는 이 말을 하면서 사랑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날 아침 내내 그녀는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았고, 쾌활하고 상냥하게 보였다. 동시에 그녀에겐 뭔가 부끄러운, 심지어 소심한 태도까지 깃들어 있었다. (중략)

「저는, 저는 당신이 계시지 않을 때 당신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부드러우면서 꿰뚫는 듯한 시선을 나에게 향하고는 온통 얼굴을 붉혔다.

「아, 그래! 맘에 드니?」 나는 면전에서 칭찬받는 작가의 당황함을 느꼈지만, 내가 이 순간 그녀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불가능했다. 넬리는 잠시 침묵했다.

-p.304-305


  내가 이 부분을 발췌한 이유는 읽으면서 이반이 넬리에게 입을 맞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에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인데, 이건 나한테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읽는 소시민이고, 이 세상에는 몇 개 책을 제외해도 좋은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이야기는 꼭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에 있어선 편협한 내가 24살의 장성한 이반이 넬리에게 입을 맞추지 않아 읽으면서 화가 날 지경이라니?! 편협한 내가 24살의 장성한 이반이 넬리에게 입을 맞추지 않아 읽으면서 화가 날 지경이라니?! 그만큼 이 넬리라는 인물의 호소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이 인물을 창조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그렇게 흉악하게  생긴 양반이 (미안합니다. 도선생님...) 누군가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13살 소녀의 마음을 참으로 잘 묘사해 놓으셨다.


  비련한 소녀 넬리 외에도 인물의 심리를 행동으로 형상화한 부분에도 여러 번 감탄했다. 특히, 소설 초반에 도망간 딸 나따샤를 없는 자식 취급하면서도 남몰래 그리워하는 이흐메네프가 어린 나따샤가 새겨진 메달을 발로 마구 밟다가 흠칫 놀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메달에 미친 듯 입 맞추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에서는 이흐메네프의 터질듯한 감정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두 번이나 실패했던 터라, 그저 싼값에 중고책이 나왔다고 이 책을 샀다가 또 읽기에 실패하고 더불어 나한테 실망하는 것 아닌가 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참고로 대학시절 실패했던 책은 '악령' 과 '미성년'이다. 뭔 배짱으로 '악령' 을 읽으려고 했던 건지 나 원. 아직도 책꽂이에 고이 꽂혀있다...)

  이 책과 함께하는 며칠 동안 진심으로 즐거웠다. 다 읽은 게 아쉬울 정도로.


P.S 1.

이 소설은 악당 발꼬프스키 빼곤 완전히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인데, 딱 두 군데 조금 웃긴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돈이라곤 벌어본 적 없는 알료샤가 이반에게 앞으로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해볼까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의 말을 들은 이반이 '너 까짓 게 소설을 써?'라는 생각에 황당해 하는 부분 좀 웃기고, 두 번째는 아래 부분인데,


그 속에는 최근에 나온 나의 소설에 관해서도 두어 마디 씌어 있었다.

  들여다보니 <통신원>이란 논문이었다. 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칭찬하는 글도 아니어서 나는 대단히 만족했다. 그렇긴 하지만 <통신원>은 나의 글에서 전반적으로 <땀 냄새가 난다> 고 말하고 있었다. 즉 내가 땀이 나도록 온 힘을 기울여 글을 쓰며, 정교하게 그 글을 다듬고 마무리 손질을 가하기 때문에 싫증이 날 정도라는 것이었다.

  출판업자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에게 지난번 소설은 이틀 밤 만에 썼고, 이번에는 이틀 낮과 밤 동안에 인쇄지 세 장 반을 썼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p. 497

: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는 소설 이틀 만에 썼는데도 이런 말 듣는다고 소설 속에서 이반을 통해 잘난 척하고 평론가들 비웃는 것 같아서 좀 웃겼다. ㅋ (근데 진짜로 이틀 만에 썼을 것 같음)


P.S 2. 내가 산 책은 2003년에 출판된 중고책으로 한 권으로 된 책이다. 따라서 표기한 페이지도 현재 판매되는 (상), (하) 로 나누어진 책과는 좀 다를 것이다.


P.S 3. 혹시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맨 앞장 등장인물 소개 절대 보지 말고 바로 읽길 권하고 싶다. 내가 그것만 안 읽었어도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뭔가 억울해!




  혹성탈출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을 어쨌든 끝까지 보긴 봐야할 것 같아서 의리로 극장에 가서 봤다. 다 보고나서 시리즈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의 확고한 취향만 확인하고 왔다. 라라랜드를 보고 나서 뮤지컬은 나와 맞지 않음을 느낀 때와 거의 비슷한 감정이었다. 이제까지 유일하게 재밌게 본 시리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옛날 버전), 팀버튼의 배트맨,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밖에는 없는데, 앞으로도 여기서 더 추가 되진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라 여기는 스타워즈도 안보고 있고, 대학 시절 다들 최고라고 환장했던 반지의 제왕도 나는 진짜 지루해서 환장할 뻔 했고, 매트릭스도 키아누 리브스님 미모를 큰 스크린에서 볼 생각에 싱글벙글하며 전편 극장가서 보긴 했지만, 1편 빼고는 그닥 좋아하지 않으니.


  혹성탈출 첫번째 편을 보고 세계를 다스리는 자들의 악행과 그로 인해 고통받고 착취 당하는 자에 대한 정교한 은유에 나 또한 열광했다. 하지만 2편부터는 아주 제한된 몇 개의 대사만을 하는 유인원들을 2시간 내내 보고 있다보니 좀 지겨웠다. 


  3편이 개봉되기 전에 미국에서 이 영화 평점이 그야말로 '대박' 쳤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름 기대를 품고 극장에 갔지만.. 결과는 실망이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파괴는 종말을 재촉할 뿐이다!! 이놈들아~!> 라는 메시지는 잘 알겠는데, 약자와 강자를 유인원과 인간으로 치환한 이 시리즈의 화법이 조금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어 피곤했다. 

  근데  영화 보기 전부터 유인원이 인간을 어떻게 멸종시킬 것인지? 그 방법이 참 궁금했는데 이 영화에서 택한 인간이 멸종한 이유는 아주 탁월했다. 흔해 빠진 자멸도 아니고, 갑자기 유인원이 닥치는대로 인간을 살육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결국 인간들은 뭔가에 의해 망해버리고 마는데.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스포일러라서 더 말은 안하겠지만.


  미국 평론가들이 왜 열광했는지는 알 것 같다. 설국열차 북미 개봉 때 평점이 높았던 것과 동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음... 그래도 난 영화가 더 수준 높아지려면 인간 세상에 대한 은유가 더 은근하고 상징적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성탈출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단도직입적었다. 그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지만, 나한테는 단점이었다.

  어쨌든 이제까지 감사했습니다. 시저님. (비판만 실컷해놓고 감사하대 ㅋㅋㅋㅋ)


  P.S 포스터에 있는 노바 역 맡은 여자 아이 진짜 최고 예쁘다. 실존하는 애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 CG 로 만들어도 저보다 예쁘게는 못 만들 것. 정말 대단해. 너무 예뻐.


*사진 출처 - Daum 영화


'왕자와 거지'를 읽고

위로 2017. 10. 23. 09:50

 

왕자와 거지
국내도서
저자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남문희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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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을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여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왕자와 거지' 와 '피터팬'을 샀다. 그중 '왕자와 거지'부터 읽었다. 그리고 이 책과 함께 며칠 유쾌한 시간 보냈다.
  '왕자와 거지'의 줄거리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긴 소설인지는 처음 알았다. 각 장마다 거지였다가 왕자가 된 톰 캔티, 왕자였다가 거지가 된 에드워드 튜더의 이야기가 아주 유려하게 전환된다. 이쯤에서 우리 똘똘한 톰이 궁금한데? 라고 생각하면 다음 장에 톰 얘기 나오고, 우리 불쌍한 에드워드는 또 무슨 고생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하면 틀림없이 다음 장에 에드워드 얘기가 나온다. 작가가 어쩜 이렇게 귀신같이 독자 마음을 잘 알까 싶어서 읽는 내내 진짜 신기했다.
 
  마흔을 향해가는 나도 참 재밌게 읽었지만, 책을 좀 좋아하는 고학년 어린이도 펭귄클래식 버전 그대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전 연령대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참 흔치 않은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 중 하나다.
  16세기의 잉글랜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주석을 참조해서 당시 왕실과 빈민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특히 왕자 대신 매 맞아주는 '회초리 시동' 이 기억에 남는다. 관련 주석을 보니 작가가 지어낸 게 아니라 실존했던 것 같다. 근데 너무 불쌍하잖은가. 오로지 맞기 위해 궁에 있는 어린 소년이라니. 원래 소설에 포함되었다가 막판에 제외되어 부록으로 실린 '한 소년의 모험'이라는 에피소드는 온전히 회초리 시동의 이야기인데, 특별히 이런 에피소드까지 쓴 걸 보면 마크 트웨인 역시 왕 대신 매를 맞던 옛날 회초리 시동 소년이 딱했던 모양이다.
  주인공 아이 톰과 에드워드가 의젓한 왕 같다가도 결국 영락없는 어린이라 읽다 보면 그들의 귀여움에 절로 미소 짓게 된다. 에드워드가 죽을 위기에 처해 눈물을 줄줄 흘릴 땐 너무 안쓰럽고, 톰이 옥새로 호두 까먹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또 너무 깜찍하다. 
  일단 '왕자와 거지'는 지루할 틈 없이 재밌었다. 부디 '피터팬'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톰은 녹초가 된 죄수 같은 기분이 들어, 혼자 하겠다는 눈짓을 보내고 장화를 벗으려고 했지만, 역시 대기 중이던 방해자가 잽싸게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들었다. 그 밖에 두어 가지를 더 혼자 해보려고 시도 했지만 번번히 방해를 받았고, 결국 톰은 포기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숨도 나 대신 쉬어주겠다고 나서지 않는 게 용하네!"

-p.52


고향에 돌아가기만 하면 다들 그의 귀환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할거라고 기대했건만, 오히려 지독한 냉대 속에 죄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기대와 현실의 격차가 너무나 벌어져, 넋이 나가고 만 것이다.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괴상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지개를 기대하며 어깨춤을 추고 나갔다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p.216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소년은 마른 몸에 예의 바르되 잘 웃지 않는 아이로 유머 감각이 신통치 않을뿐더러 날 때부터 우울한 기질을 타고 났다.

-p.279 ('부록: 한 소년의 모험' 중)

: 앞에 말한 부록의 회초리 시동에 대한 마크 트웨인의 묘사. 잘 웃지 않고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마른 몸의 소년이 괜히 마음에 들어 적어 둔다.



  여름동안 날은 덥고 할 일은 없어서 극장과 집에서 영화를 엄청 봤더랬다. 토요일 일요일 한 편씩. 아무것도 안하고 영화만 본 거 같아서 민망하지만 어쨌든 리뷰 쓴다.



  좋아하는 소설을 영화화 했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보고, 역시 책이 낫다고 거의 매번 영화에 실망하지만, 그래도 괜히 궁금해서 본다. 실망할 때 하더라도 보고 실망하고 싶어서.

  아주 아주 평이한 연출이었다. 소설은 전혀 그런 분위기 안나는데 영화는 뭔가 교훈을 주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고. 소설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토니의 딸이 태교하고 출산하는 등의 이야기는 왜 넣은건지 당최 모르겠다. 태교와 출산을 돕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소설보다는 토니가 덜 혐오스럽게 보이긴 한다. 흠. 이게 목적인가???

  소설에서는 베로니카가 158cm 의 아담한 키로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170cm 넘는 키에 어마어마하게 몸매 좋은 여자가 베로니카로 나온다. 내가 이걸 왜 기억하냐면 내 키가 158cm 기 때문에, (자랑은 아님)  그 부분 읽으면서 영국에도 160cm 안되는 여자가 흔한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 아마 흔하지 않으니 굳이 줄리언 반스가 158cm 라고 썼겠지만. (저번 여름에 쟀을 때 158.7 정도 나왔는데, 이건 키가 컸다기 보단 일자목이 되서 그런듯 ㅋㅋㅋ)

  런던 여행 갔을 때 가장 좋았던 순간 중 하나가 테이트 모던 앞에 있는 밀레니엄 브릿지 걸었던 시간인데, 노인이 된 토니가 베로니카랑 재회하는 장소가 바로 그 다리였다. 화면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이랑 테이트 모던 미술관 보니 여행 갔다온 보람 느끼고 또 가고 싶고 그랬다. 하지만 영국이나 아일랜드는 다신 못갈 것 같긴 하다. 물가가 비싸도 너무 비싸서...

  소설보면 토니가 베로니카가 나랑 사귄지 꽤 됐는데도 같이 안 자준다. 이 나쁜년..  뭐 이런 말은 안나오는데 결국 토니는 그로 인해 자꾸 상처받고 나중에 베로니카가 몸을 허락한 후 아주 보란 듯 베로니카를 차버린다. 소설과 영화에서 토니는 나는 헤어지고 나서야 베로니카와 잤다고 하지만, 아니야 앞뒤 맥락 따져보면 토니는 드디어 베로니카랑 자고 아주 미련없이 차버린 꼴이거든. 뭐... 잠자리 문제 외에도 나 혼자만 베로니카에 목맨 기분 들고 그러니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베로니카와 헤어졌겠지만. (또 마침 펍에서 만난 다른 여성도 있었고) 토니가 한 짓이 비열하긴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 토니라는 인물에 정이 가는 건 아니고.... 나이 먹고 베로니카 만나서도 어떻게 한 번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게 애처롭기도 하고. 결국 남자란 끝내 마음 안준 여자한테 집착할 수 밖에 없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뭐 그랬다.

  주연 배우들이 영국에서도 주목받는 신예들로 다들 풋풋한데, 난 애드리언 핀이 너무 몸이 건장한 청년이라 놀라버렸다. 내가 상상한 애드리언의 이미지는 그게 아니었는데.... 소설에서 키가 크다고는 나오지만 이미지 상 그리 건강해 보이면 안될 것 같았는데. 럭비 잘하게 생긴 어깨 넓고 보기좋게 살집 붙은 금발 청년이 애드리언으로 나와서 의외였다. 얼굴은 엄청 잘 생겼다. 베로니카가 첫 눈에 반할만 해. ㅋ

  이 영화에 내가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두 명 나오는데 소설에서는 노인으로 나오는 역사 선생 조 헌트 역을 매튜 구드가 맡았다. 어우. 이름 모를 어린 청년들 보다가 갑자기 화면에 매튜 구드 나와서 너무 놀랐고 눈부신 외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열올리며 리뷰 썼던 모리스의 제임스 윌비 아저씨가 베로니카 아빠로 나온다. 젊은 시절 윤기 촤르르 흐르던 아름다운 금발은 이제 온데 간데 없었다. 머리 숱 너무 많이 빠져서 안타까웠다. 하긴 58년 개띠시고 내년에 환갑이시니... 흑 ㅜㅜ 그래도 아저씨 젊은 시절 미모는 내가 기억하니까.

  제일 놀란 건 베로니카 엄마 사라 포드로 나온 여배우 분. (이름은 에밀리 모티머 라고 함.. 처음 보는 배우심..) 중년의 나이 임에도 어쩜 그렇게 상큼하신지? 스포일러가 되니 더 말은 못하지만 사라 포드는 중년의 여성이어도 꼭 매력적이어야만 하는 인물인데, 정말 잘된 캐스팅이었다. 빨래 걷으면서 토니한테 막 손 흔드시는데 베로니카보다 더 예쁘셨다.

  나이든 베로니카 맡은 샬롯 램플링 이 배우 역시 난 처음 보는 배우였는데 (영국에서는 무지 유명하신 분인듯)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집에와서 젊은 시절 사진 찾아보고 그랬다.

  영화는 너무 올바르고 교과서적으로 찍은 느낌이라 굳이 꼬집을 것도 없지만 또 칭찬할 거리도 없었다. 그래도 난 이런 분위기 영화 워낙 좋아해서, 보고 나선 기분 좋았다.


* 사진 출저 - Daum 영화


더블린 사람들
국내도서
저자 :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 한일동역
출판 :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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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9월 어느날 난 더블린에 갔다. 그때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사치스럽게 보낸 일주일이었는데, 그 일주일 동안 나는 런던(잉글랜드)-에딘버러(스코틀랜드)-더블린(아일랜드) 이렇게 세 군데를 홀로 여행했다. 더블린은 보통 사람들이 안 가는 곳인데, 이상하게 꼭 하루라도 있고 싶었고, 딱 1박 2일 체류하다 왔다.

  그때 더블린 공항에 내려 시내로 가던 버스 안에서의 기분 정말 잊지 못한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순수하고 청량한 공기, 파란 하늘, 녹색 잔디, 아담한 건물들, 한가한 고속도로. 첫인상은 런던, 에딘버러보다 100배는 좋았다. 더블린의 가장 번화가에 호텔을 잡았는데, 나름 한 나라의 수도이고 어엿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은 평화롭고 느긋하고 조용했다. 이 시골같은 도시가 한 때는 영국에서 (독립 전에는 아일랜드도 영국의 일부였으니)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더블린에서 뭘 할지 거의 정해놓질 않아서 정처 없이 떠도는 것 외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런던에 비해 여행책자도 너무 없었고, 1박 밖에 안돼서 본격적으로 뭘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고도서관에 가는 것과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오스카 와일드 생가를 보는 것외 특별히 한 일 없이 런던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며 4년전 괜히 더블린에 가서 쏘다닌 게 얼마나 잘한 일인가 싶었다. 물론 제임스 조이스가 살던 시대의 더블린과 내가 정처없이 걸어다닌 더블린은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골목이나 공원 등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못가본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에 줄기차게 나오는 상트 페테르부르그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 전 로알드 달의 단편 '카티나' 읽었을 때처럼 '더블린 사람들'도 전철 안에서 다 읽은 후 주책맞게 눈물을 쏟았다.

  8월에 다 읽었으니 읽은 지 벌써 2개월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있다. 이 소설이 왜 그토록 슬펐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저히 행복해지지 않을 것 같은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이 너무 딱해서였던 것 같다. 대단한 행운 혹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흔히 사람들은 '소설같다.' 고 한다. 그런데 이 단편집에는 전혀 소설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만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백만장자 옆에 있는 어떤 젊은이,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그 저널리스트를 친구로 둔 사람,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아니라 선거 운동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그냥 하숙인, 직장인, 학생 등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일상은 발전없는 도시 더블린에서 어떠한 일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고 그들은 또 그렇게 지겨운 오늘을 살아간다.  

  '더블린 사람들'의 등장 인물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낙담해있고 뭔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버리며, 어떠한 일에도 크게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설령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절대 의욕적으로 나설 것 같지도 않다. 그들에겐 그럴만한 용기도 배짱도 의지도 없다. 

  '더블린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소설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래서 조금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려낸 무기력한 도시와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피곤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사소한 행동과 그저 그런 일상을 이토록 잘 쓰고 또 한 권의 책으로 엮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블린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라도 결국 대부분은 이 소설 속 주인공들 처럼 살고 있다. 멋지고 폼나게 비참하거나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으니까.

  제임스 조이스는 그 누구도 소설로 쓰고 싶지 않고 남루하고 하찮고 보잘 것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삶도 누군가는 알아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도저히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 소설을 다 읽은 뒤 오히려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이 쭉 지금과 같더라도 나름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깊이 절망했지만 끝내 나에게 희망을 준 역설적 소설 '더블린 사람들' 을 아마도 난 영원히 사랑하겠지. 아...  더블린에 또 가고 싶어졌다.


  아침마다 나는 앞 응접실 마루에 누워 그녀의 집 문을 지켜보았다. 창틀에서 1인치 정도의 틈새만 남기고 차일을 내렸기 때문에 내가 남의 눈에 띌 리는 없었다. 그녀가 현관 층계로 나올 때면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서 책을 움켜쥐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한시도 그녀의 갈색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다다른다 싶으면 얼른 걸음을 재촉해서 그녀 곁을 지나쳤다. 이런 일이 매일 아침 일어났다. 어쩌다가 우연히 몇 마디 말을 나눈 일 말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나의 온몸의 어리석은 피를 불러 모으는 소환장과도 같았다.


-p.37 ('애러비' 중)


  그녀는 갑자기 겁에 질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벗어나야 해! 벗어나야만 한다! 프랭크가 그녀를 구해 주리라. 그가 그녀에게 새 삶을, 그리고 아마 사랑 또한 주리라. 그녀는 살고 싶었다. 왜 그녀가 불행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프랭크가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고, 꼭 감싸줄 것이다. 그가 그녀를 구해 주리라.


-p.49 ('이블린' 중)


  " 그런데 내가 떠나기 전날 밤 넌즈 아일랜드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데, 누가 유리창에 돌은 던지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유리창이 비에 젖었기 때문에 밖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입고 있던 그대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뒤편 정원으로 나가 봤더니, 그 애가 가엾게도 정원 한구석에서 몸을 벌벌 떨면서 서 있는거예요."

(중략)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애원했지요. 이러다가는 비를 맞아 죽을 거라는 얘기도 했고요. 그랬더니 그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그때 그 애의 두 눈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 애는 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담벼락 끝에 서 있었어요."


-p. 281 ('죽은 사람들' 중)


P.S. 나 진짜 마지막 소설 '죽은 사람들' 에서 마이클 퓨리 죽는 부분 읽고 눈물 대폭발했다. 어쩌면 이 소설집 전체에서 분위기상 제일 이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격정적(?)인 부분인데 어찌나 슬프든지. 어린 것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부분부터 슬펐는데 결국 그가 죽는 부분에선 수습불가 수준으로 울어버리고 말았다네...




  처음 나왔을 때 부터 보고 싶었던 판의 미로를 이제서야 봤다. 중간에 잔인한 장면은 눈 질끈감고 빨리감기를 해버려서 완전히 이 영화를 다 봤다고 할 순 없지만, 아... 역시 듣던대로 좋은 영화였다. 진정한 반전영화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프랑코쪽 정부군인 비달 대위 이 개자식의 악랄함에 진저리치며 봤는데, 실제 전쟁은 영화보다 훨씬 더 끔찍하겠지. 정말 상상조차 못하겠다. 우리나라의 625도 스페인내전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에 오필리아가 피흘리며 죽을 땐 진짜 가슴이 찢어진다. 그냥 좀 찡한 정도가 아니라 말그대로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느낌이라 펑펑 울었다.

  스페인어로 된 영화 거의 처음봐서 신기했고, 미술이 끔찍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아름다워서 잊지 못할 화면이 끝도 없이 나온다. 오필리아 역 맡은 여자 아이 '이바나 바쿠에로' 의 까만 눈이 이상하게 좀 슬픈 느낌이 들어 적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부인이 아역 오디션에 동석했는데, 이바나 연기하는 걸 보고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바나가 시나리오의 오필리아보다 살짝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캐스팅된 것이라고. (나도 영화에서 오필리아가 죽기 전에 아직 갓난아이인 동생을 안고 내동생을 죽일 순 없다고 울먹일 때 부터 슬펐다. 그러다 총맞고 죽어가는 장면에서 울음 대폭발) 어린 아이가 죽는 장면 보는 거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심적으로 너무 괴롭다. '그을린 사랑' 에서도 기독교 민병대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는 5살 정도 밖에 안된 무슬림 부모를 둔 여자애 등에 총을 여러발 쏴서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 보고 며칠 우울했다. 잊지 말자. 전쟁은 결국 이렇게 잔인하고 악마적이라는 걸.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  


  한창 직장생활로 힘들 때, 정수리에 감정 on/off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종종했다. 상사 말 한마디에 열받고 상처받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일하는 동안은 감정을 off 해놓고 오로지 로보트처럼 일만 하고 싶었다. 이 영화는 내가 했던 생각과 비슷한 컨셉으로, 모든 감정을 범죄로 규정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설정에 비해 영화는 좀 밋밋했다.

  배경만 미래일 뿐 결국 사랑이야기인데, 남녀 주인공이 현재 헐리우드에서 제일 잘생기고 예쁘다는 니콜라스 홀트랑 크리스틴 스튜어트인데도 하나도 떨리지가 않았다. 두 미남미녀가 다 벗고 둘이 같이 샤워를 하는데도 이상하게 하나도 야하지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나지않아 당황스러웠다. 렛미인이나, 화양연화에서는 둘이 손만 잡아도 '헉' 하며 가슴이 쿵쿵쿵 뛰었는데....

  주연 남녀의 외모도 사랑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연출과 연기라는 걸 다시한번 깨달았다. 뮤직비디오 같은 감각적 화면과 최신 사운드 그리고 마냥 훤칠하고 잘생긴 니콜라스 홀트 보는 재미는 있었다.


*사진 출처-Daum 영화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국내도서
저자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김욱동역
출판 : 문학수첩 200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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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한번도 안 펼쳐본 것 같은 새책을 아주 싼값에 구입해서 읽었다.이 책에는 마크 트웨인이 쓴 다섯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첫번째 소설인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에서는 정직하고 의젓한 주민들이 모여사는 것으로 유명한 마을 해들리버그 주민들에게 원한을 가진 어떤 젊은이가 기필코 그들의 마을을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묘하게 어떤 사건을 꾸며 결국 마을 주민들을 온 세상에 망신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소설 정말 신기한 게 젊은이가 왜 그렇게까지 주민들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젊은이가 원한을 품게된 이유가 아니라 근엄한 척 살고 있는 주민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가식적인지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 있기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과감하게 과거 사건에 대한 서술은 생략해 버렸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구구절절 서술하지 않고 오로지 한가지 확실한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보니 굉장히 간결한 느낌이 든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캘러버러스군(郡)의 악명 높은 점핑 개구리' 였다. 이 작품이 그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데뷔 소설이라는데, 소설가로서 처음 내놓은 소설이 이 정도라니, 역시 인정받는 덴 다 이유가 있나보다. 다 합쳐 3장 정도 밖에 안되는 아주 짧은 소설인데,  요즘에도 가끔 이 소설의 주인공 '스마일리' 생각에 피식피식 웃는다. 켈러버러스군에 살고 있는 스마일리라는 젊은이는 내기에 미쳐 있는데, 하루종일 거의 모든 일에 푼돈을 건다. 이 스마일리가 얼마나 내기에 미쳐 있는지 써놓은 본문의 한 부분을 읽으면 내가 왜 피식피식 웃을 수 밖에 없는지 알 것이다.


  참으로 묘한 녀석이었다고. 언젠가 한번은 워커 목사님의 부인이 앓아누워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 어느 날 아침, 목사님이 나타나자 녀석이 다가가 그에게 사모님 소식을 물었지. 목사님이 상당히 좋아졌다고 대답했어. (중략) 그러자 스마일리 녀석은 아무 생각도 없이 불쑥 이렇게 말하는거야.

  "하면, 전 사모님이 완쾌되지 않는 쪽에 2달러 50센트를 걸겠습니다."


-p.177


  2달러도 아니고 2달러 <50센트>를 사모님이 완쾌되지 <않는다> 에 거는 이 부분 너무 웃기지 않은가. ㅋㅋㅋㅋㅋㅋ

  내기에 미친 이 얼간이 스마일리는 어떤 개구리를 잡아 멀리 점프하는 훈련을 시켜 가지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개구리 멀리 뛰기 내기를 제안하고 다닌다. 상대방이 내기할 개구리가 없다고 제안을 거절하면 다른 개구리를 손수 잡아다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말 스마일리 이 캐릭터는 마크 트웨인 아니면 창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머지 '100만 달러 수표'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귀신 이야기' 도 읽으며 즐거웠다.  그가 이 소설들을 통해 꼬집고 싶었던 건 돈 앞에서는 영락없는 노예면서 아닌 척하는 당시 미국 사람들과 그 세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풍자한 우스꽝스러운 사람들 모두 2017년 한국 어딘가에서도 분명히 한번쯤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틀에 박힌 말이지만, 이 소설들 역시 시대를 초월했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국내도서
저자 :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 최세희역
출판 : 다산책방 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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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이미 읽었기 때문에,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를 무척 기다렸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배우 한명 안나오는데도 정식 개봉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줄리언 반스의 원작 소설의 인기 덕분이리라.

  영화를 보며 나는 정말 나의 기억력에 놀랐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망각력' 에 놀랐다. 분명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강력한 책이었다. 그런데 소설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결말 외에는 기억나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었고, 이 영화를 기점으로 독후감을 제대로 쓰기로 마음 먹었다. 좀 밀리긴 했지만 아직까진 잘 지키고 있다.


  조금 두렵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각색을 거쳐 쓸 수 밖에 없겠지만, 약 10년 전 내가 겪은 일을 말해보고자 한다. 이 사건을 이렇게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소설 속 '베로니카' 처럼 어떤 남자에게 나를 저주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내가 받은 건 이메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나에게 품은 건 이 소설의 주인공 '토니 웹스터'가 베로니카에게 그랬던 것 처럼, 오로지 증오와 혐오 뿐이었다. 내가 그런 편지를 받은 이유는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익명이긴 해도) 썼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오랜 시간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바보같이 난 그가 내 블로그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블로그였으니까. 어떻게 내 블로그를 알게됐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내가 블로그에 그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나고 그가 나에게 썼던 편지 내용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거다. 그 편지에 내가 답장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이렇듯 사람은 이기적이다. 내가 블로그에 쓴 글이 그에 못지 않게 지저분한 내용이었을 수도 있는건데 그건 전혀 기억이 안나니 말이다.


  베로니카와 비슷한 사건을 한번 겪고 보니, 내가 어린 나이에 치기어린 마음으로 써갈겨 친구 혹은 애인에게 건낸 수많은 편지를 근거로 누군가 나의 인생을 연구한다면 나는 얼마나 추하고 봐주기 힘든 인간일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찔해졌다. 내 필체와 완벽히 일치하는 그 증거들을 앞에 둔다면 사실은 내가 이 정도로 별로인 인간은 아니었다고 변명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수치심을 못이겨 바로 죽고 싶은 맘이 들지도 모른다.


  이렇게 수많은 헛발질과 실패를 하며 제법 나이가 들고보니 가끔 지인들이 나에게 고민을 상담할 때마다 내 대답은 거의 '하지마.' 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의 고민이 뭔지 들을 필요도 없는 경우도 꽤 많다. 뭔가를 안한다면, 적어도 최악은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꼰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 품위와 자존심을 다 버리면서 나는 왜 사랑을 했을까. 나는 왜 그딴 편지를 썼을까. 나는 왜 매달렸을까. 왜 울었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한동안 나는 '왜 했을까?' 라는 생각에 수없이 괴로워했다. 하지만,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도 난 아마 그렇게 충동적으로 고백을 하고 글을 쓰고 또 편지를 쓰며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말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도 베로니카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는 결국 썼고 보냈고, 그 일을 의도적으로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


  줄리언 반스는 한 사람의 역사이든 한 나라의 역사이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기억' 혹은 '추억' 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토니 웹스터' 라는 정안가는 주인공을 통해 서술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는 토니 웹스터 혹은 베로니카 였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난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모두가 어떤 기억은 남김없이 다 지웠거나 혹은 나에게 유리한대로 왜곡하여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고 또 한번 결심했다. 죽는날까지 자기 미화의 욕구와 싸우며 살겠노라고. 나란 인간은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간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말이다.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입니다."

 (중략)

  "그 일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소하달 순 있지만요. 그러나 최근 일이지요. 따라서 역사로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 단 한장의 문서 '엄마 미안해' 라고 쓴 한 장의 유서가 있습니다. (중략) 선생님, 그러니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롭슨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여자친구도 사라져버리고, 어쨌거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에, 어느 누가 롭슨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까요? 문제점이 보이시나요, 선생님?"


-P. 34~35



지루한 이야기
국내도서
저자 : 안똔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 석영중역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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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여름에 이 소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 '니콜라이' 처럼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볼 때, 눈부신 시절로 기억할 수 있는 때가 몇이나 될까? 나에겐 한순간도 없을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내 인생의 최고의 시절은 아직 안 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고 보니 내 인생 좋은 시절은 아직 안온 것이 아니라, 그냥 영원히 안 오는 것이고 내가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그 시절이 어쩌면 내 인생의 절정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설령 눈부신 시절이 있었다고 한들 늙고 병든 자기의 노년 시절을 마냥 즐겁고 흐믓하게 보낼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존경받는 의대 교수이자 고위급 3등 문관으로 살고 있는 '니콜라이'는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내 '바랴'도 아이스크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딸 '리자'도, 애정을 다해 친딸처럼 기른 친구의 딸인 '까쨔'도 모두 니콜라이가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모두 흉측하게 변했고, 예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니콜라이는 변해버린 그들이 어색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바로 자기 자신이 점점 흉하게 변해가는 것을 끊임없이 자책한다. 가족은 물론이고 맘씨 좋은 동료교수 '미하일 표도로비치'도 자기의 교수 자리를 물려받을 조수 '뾰뜨르 이그나찌예비치' 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일 뿐이고, 니콜라이에게 위로가 되긴 커녕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조차 괴로울 뿐이다. 

  남겨진 인생에 대한 남루함을 끊임없이 토로하는 이 소설은 가슴이 아리지만, 제목처럼 지루하지만은 않다. 체호프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을 읽다보면 주인공 니콜라이의 인생에 진심으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인생이란 나중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외롭고 비루하고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세상 누구에게도 엄청나게 큰 기쁨도 슬픔도 되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니콜라이 같은 사람도 그 누구라도 결국... 결국, 인생은 슬픈 것일까!!

  이런 생각에 '지루한 이야기'를  다 읽고나선 결국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대체로 식사 후 부터 한밤이 될 때까지 사이에 나의 신경성 흥분은 극에 달한다. 나는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는다. 이 시간이면 누군가 방에 들어올까봐 두렵고 갑자기 죽을까봐 두렵고 내 눈물이 부끄럽다. 전반적으로 내 영혼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이상 램프도 책들도 마룻바닥 위의 그림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참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거칠게 아파트에서 끌어낸다.


-p.57


  "바람결에 저 멀리 어딘가 술집에서 손풍금 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담장을 따라 달려가는 뜨로이까 썰매의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도했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가슴뿐 아니라 심지어 위장과 다리와 팔까지 행복한 감정으로 가득 찼어.……손풍금 소리와 멀어져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상상 속에서 내가 의사가 되는 그림을 그려보았어. 그럴 때마다 매번 더 멋지게 그렸지. 그리고 자, 봐, 내 꿈은 실현되었어. 나는 내가 감히 꿈꾸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어. 30년 동안 나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고 탁월한 동료들을 알고 지냈고 찬란한 명성을 만끽했어. 나는 사랑에  빠졌고 열정적인 사랑 끝에 결혼했고 아이들을 가졌어 한마디로 말해서 뒤를 돌아보면 내 인생 전체가 재능있는 손끝에서 창조된 아름다운 예술품 처럼 느껴져.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저 피날레를 망치지 않는 일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죽어야만 하지. 만일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닥쳐온 위험이라면 나는 그것을 교사이자 학자이자 그리스도교 국가의 시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맞이해야 되겠지. 즉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지금 피날레를 망치고 있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너에게 손을 내밀며 도와달라고 애원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그냥 빠져 죽으라고, 그게 순리라고 말하고 있어."


-p.63-64



  그런데 이 소설, 내내 슬프기만 하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중간중간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게 되는 부분도 많다.


  우리 집에서는 나와 아내와 딸 외에도 딸아이의 여자 친구 두세명, 그리고 리자의 숭배자이자 청혼자인 알렉산드르 아돌포비치 그네께르가 함께 식사한다. 그는 30세를 넘기지 않은 금발 청년으로 중키에 어깨는 떡 벌어지고 몸집은 상당히 투실투실한 편이다. 귀부터 나 있는 붉은 볼수염과 왁스 칠을 한 콧수염은 그의 우둥퉁하고 반질반질한 얼굴에 일종의 장난감 같은 인상을 더해준다. 그는 화려한 색상의 조끼에 짤막한 재킷, 허리께는 풍성하고 발목 쪽은 매우 좁은 커다란 체크무뉘 바지를 입고 노란색 단화를 신고 다닌다. 두 눈은 새우 눈깔처럼 볼록하고 넥타이는 새우 꼬리와 비슷해서 이 젊은 녀석의 존재 전체에서 새우 수프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p.49


: 새우 눈깔, 존재 전체에서 새우 수프 냄새ㅋㅋㅋㅋㅋㅋ (이 부분 읽고 한동안 이 닦다가도, 세수하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아내와 하인들은 "저분이 바로 그 약혼자이셔" 라며 의미심장하게 속삭거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를 보면 내 식탁에 줄루족이 앉아 있기라도 하듯 당혹스럽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기만 하는 딸 애가 저 넥타이와 저 눈깔과 저 흐물거리는 뺨따귀를 사랑한다는 것이 사뭇 이상하기만 하다……


-p.51


: 흐물거리는 뺨따귀.......


  "아까 강의를 마치고 가는데 글쎄 층계에서 저 늙은 멍청이 NN을 만나지 않았겠어요. 그 양반 늘 그렇지만 그 말 주둥이 같은 턱을 쑥 내밀고 걸어가면서 두리번거리더라고요. 자기 편두통이랑 마누라랑 자기 강의 안 듣는 학생들 욕을 하고 싶어서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던 거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 양반이 저를 본거 같더라니까요. 이제 저는 망한거지요. 끝장이 난 거지요……"


-p.65


: 가끔 나도 회사에서 미하일 처럼 나는 망했지요. 끝장이 난 거지요 같은 기분 느낀다. 이 문장도 너무 웃겼다.


  내 현재 기분으로는 그와 딱 5분만 같이 있어도 영겁의 시간 동안 함께 있어온 것처럼 지긋지긋하다. 나는 그 비참한 인간이 싫다. 그의 조용하고 고른 음성과 책 읽는 듯한 말투는 나를 잠재우고 그의 이야기는 나를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든다. 그는 나에 대해 오로지 가장 훌륭한 감정만을 품고 있으며 오로지 나를 즐겁게 해주겠다는 일념에서 주절거리지만 나는 그 댓가로 마치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한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러나 그는 나의 정신적인 암시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머문다, 머문다, 머문다……


-p83


: 물러가라고 속으로 세번이나 생각했는데도 안 물러간다. 머문다 머문다 머문다 도 세 번씩이나 쓰신 체호프님.


 

또 한 군데 감탄한 부분이 있다. 동료 교수 미하일은 까쨔를 사랑하고 있는데 체호프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나는그의 눈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가 까짜한테서 컵을 받아 들 때, 혹은 그녀의 말을 경청할 때, 혹은 무언가를 가지러 방을 나서는 그녀를 눈으로 뒤쫓을 때, 그의 시선에서 온순하면서 애원하는 듯한, 그리고 순수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p.62


P.S 쓰다보니 너무 많이 내용을 발췌했는데, 창비에서 뭐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 정말 이 소설 특이한 소설이었다. 나를 이렇게 웃겨놓고 막판에는 그렇게 눈물을 쏙 빼놓다니. 체호프를 사랑할 수 밖에.



  워낙 끔찍한 내용이라, 볼까 말까 망설이던 작품이었는데 보길 정말 잘했다. 마음착한 여고생이었던 '조이' (브리 라슨) 는 낯선 남자를 따라갔다가 비좁은 방에 감금된다. '룸'에 갇혀 7년 내내 성폭행을 당해야 했던 '조이'(브리 라슨) 와 그녀가 겪은 고통의 증거이자 유일한 삶의 이유인 아들 '잭' (제이콥 트렘블레이)이 세상으로 나와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이야기다. 

  조이가 겪은 일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보는내내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끓어오르는 분노만을 유도하진 않는다. 대신 인간이 어느 정도의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지, 또 어떻게 다시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되는지 그저 그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필력이 짧아 도저히 더 쓰진 못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감동은 엄마가 아프셨을 때 전철에서 성경을 읽고 울었던 감동에 맞먹는 것이었다. 종교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안나오지만 이 영화를 감히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 영화는 정말 성스러운 영화라고. 영화보고 내 삶을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P.S  감동과 슬픔을 쥐어짜내는 연출을 안하는데도 불구하고, 내용 자체가 워낙 슬프기 때문에 나는 영화 후반부에는 거의 통곡에 가까울 정도로 울고 말았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울어버린 이유의 팔할은 잭을 연기한 '제이콥 트렘블레이' 때문이다. 정말... 얘는 천재다. 문자 그대로 천재. 연기 천재! 대사 톤 하며, 눈빛, 행동 정말..............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가 있지? 마지막에 강아지 "셰이무스"를 보고 밝아지던 그 표정과 병원에서 퇴원한 엄마를 향해 달려가던 그 모습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이상하다. 난 이 영화가 왜이렇게 좋은 지 모르겠다. TV 에서 하면 무조건 끝까지 보게 된다. 볼 때마다 어떻게 '알렌 튜링'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딴 대우를 받았는지 기가 막히고, 또 한편으론 가슴이 미어진다. 영화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대사로 말해버리는 다소 촌스러운 연출이지만 그런 연출조차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EBS에서 해주길래 결국 끝까지 또 보고 말았다. 다시보니, 알렌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고 표현해도 좋을만큼 연기를 탁월하게 잘했더라. 셜록으로 너무 유명세를 타서 셜록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는 셜록과 전혀 다른 이런 역도 멋지게 잘 해낼 수 있는 배우다.

  독특한 그의 저음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 도입부에서 그의 독백을 듣다보면 그야말로 영화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도저히 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다소 거만한 성격이면서도 자기가 옳다는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 끝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천재, 알렌 튜링은 그러나 안쓰럽게도 자살로 쓸쓸히 삶을 마감하고 만다. 이 모순적 삶을 살다간 알렌 튜링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정말 잘 연기했다.

  대단한 사람이 평생 외롭게 살다 자살하는 이야기를 이렇게 사랑하게 되리라곤 극장에서 처음 볼 땐 미처 몰랐다.


사진출처-Daum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