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일상 2018. 9. 4. 15:39

1. 적막

  어느날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혼자 TV도 오디오도 안켜고 빨래를 갰다.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빨래를 개며 내가 만약 앞으로 영영 혼자 산다면 매일 매일 이런 밤이겠지. 매일밤이 이렇게 조용하고 적막하고 내가 뭘 하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안들리겠지 싶었다. 순간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교생 실습 나온 선생님들이 다들 엄청 늙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습 나온 선생님들은 다 20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등학생 때 36살인 사람들을 보면 엄청난 중년에 아무것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나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막상 36살이 되고보니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내 본질은 그닥 다를 게 없다. 산술적 나이는 만만찮지만 의외로 내가 엄청나게 늙었단 생각이 안든다. 

  난 혼자살다가 엄마 돌아가시고 쉰살 쯤 되고 직업도 잃고 경제력도 없어서 남루해지면 차에다 번개탄 피워놓고 혼자 죽으려고 했다. (사람 죽은 차는 폐차시킬 수 있지만 집에서 죽으면 그럴 수 없으니 폐끼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쉰' 이라는 나이가 지금 내 생각처럼 어마어마하게 늙은 나이가 아닐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쉰이되어도 난 학생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게 없고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같다. 참 무섭고 슬픈 일이다.


2. 신경

  남동생과 전화하고 며느리 눈치를 보는 엄마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우리 엄마와 며느리는 얼굴 안보고 전화 통화 안한지 거의 3개월 이상 됐다. 며느리가 우리 부모님에게 신경 안쓰는 건 그렇다 치자. 예상했던 바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엄마가 그걸 너무 가슴 아파하신다는 것이다. 아들 장가보내면 그냥 자기들 살림 차리고 살겠지... 하고 엄마 나름의 삶을 살면 좋으련만 우리 엄마는 그게 안되나보다. 엄마가 속상해할 때마다 난 열심히 연준이 처의 좋은 점을 나열해서 엄마를 위로한다. 그런데 아마 내 위로는 하나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 엄마아빠는 동생이 결혼할 때 돈 한푼 못보태줬다는 것 때문에 은연 중에 당신들이 동생 부부에게 죄를 진 것마냥 행동한다. 그래서 동생한테 이랬음 좋겠다 저랬음 좋겠다 말한마디 못하고 그냥 속만 썩는다. 엄마 보면 결혼도 하기 싫고 자식은 더더욱 낳기 싫고 그런다.


3. 시부모님

  내가 우리 엄마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건 우리 엄마와 시어머님이랑 너무 크게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약 한달쯤 전에 심각하게 결혼을 하지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 분들을 대해야 할지 자신이 없고 앞날이 깜깜하다.


4. 인내

  요즘 내 심란함에 대해 정말 친한 사람들한테 구체적 상황을 말하고 의견을 구했는데

  (1) 초반부터 진지하게 시부모님께 의견을 말씀드리고 싸가지 없는 며느리로 찍히고 난 편히 산다.

  (2) 시부모님들이 그냥 회사의 진상 부장님이다 생각하고 네네 하고 대충 얼굴볼 때만 기분 맞춰 드린다.

  (3) 남자친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 남자친구 낳아준 부모님이다 생각하고 참을 수 있다. 

  위와 같이 총 3가지 의견이 있었다. 나름대로 다 도움이 되는 의견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빠진 기분은 다시 좋아지질 않는다.


5. 결혼 후

  빨리 모든 상황 종료되고 신혼여행도 다녀오고 새로운 집에서 회사 왕복하면서 일이나 하고 싶다. 진급하면서 새로 맡은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차라리 잘된 거 같다.


6. 미래 남편

  가까운 미래에 내 남편이 될 사람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해맑기만 한다. 결혼해서도 아마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내 결혼식에 건강하게 참석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항암도 견디시는데, 내가 유부녀가 되면 정말 더 행복할까? 요즘 집관련해서 여러가지 문제와 시부모님의 통제욕구를 참아내고 Bach 음악 들으면서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으려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만약 지금 남자친구와 평생 안헤어지고 연애만 할 수 있다면... 결혼을 할 필요도 없을텐데. 난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평생 안 헤어지고 싶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