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 준비

일상 2016. 10. 23. 15:39

옷정리

  사계절이 존재한다는 건 정말 좋은 것일까? 우리나라의 뚜렷한 사계절 때문에 여름 겨울 앞두고 옷 정리 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그 엄청난 일을 어제 드디어 해냈다. 만세. 집이 넓으면 사계절 옷 다 한꺼번에 걸어놓고 옷 정리 같은 거 할 필요 없겠지. 넓은 집 사는 사람들 부럽다. 어제 정리하다보니 니트가 너무 너무 많은데, (겨울옷의 4분의 3이 니트) 그런데도 고급 니트는 별로 없다. 싸구려 니트는 이제 그만 사자. 아니 이제 옷을 그만 사고 버릴 건 좀 버려야 한다. 제발


노트북

  14만원 내고 고친 노트북이 엄청 빨라졌다. 윈도우10은 몹쓸 OS 인 것 같다. 다시 윈도우7 을 깔아서 쓰니 이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노트북으로 하는 일이 음악 CD 를 mp3 파일로 바꾸기, 블로그하기 이 두가지 뿐이다. 지금 노트북은 성능은 떨어져도 키보드가 좋으니, 블로그 용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좋다. 윈도우 10으로 업그레이드 한 뒤 부턴 DVD 롬이 작동하지 않았는데, 7으로 돌아오니 이제 DVD 롬도 잘 돌아간다. 14만원이라는 큰 돈 들인 보람이 있다.


사무실 이전

  이전할 사무실 답사(?)를 갔다. 다행히 가산디지털단지 쪽으로 결정됐다. 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울로 이전하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지금 회사 직원이 워낙 없어서, 이전 관련 업무의 90% 이상을 내가 해야만 한다. 눈앞이 캄캄하다. 그나마 가까운데로 오면서 일을 해야 하니 기쁜 맘으로 하리라 맘은 먹었지만, 사무실 이사 한번도 안해봤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잡힌다. 


최대 몸무게 갱신

  2년마다 한번씩 해야 하는 직장 건강검진을 받았다. 몸무게를 재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드디어, 내 몸무게 앞자리가 5가 되어버린 것. 하루종일 우울했다. 딱 50이긴 했어도... 역시 영원히 40키로대 일 순 없구나. 싶었다. 세월이 무상하기도 하고. 대학생 때 몸무게 40키로 초반일 때 스스로 날씬하다는 생각을한번도 안했다. 내 다리가 굵다 생각해서 짧은 치마도, 짧은 바지도 잘 안입었다. 그게 너무 후회스럽다. 거 참... 일생에서 제일 날씬했을 시절인데, 왜 더 몸매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살았던건지. 이 충격 때문에 저녁 밥 안 먹고 있는 중인데, 지금 몸무게를 빼자는 생각보단, 더 찌진 말자고 다짐했다. 회사가 가까워지면 운동 좀 할 수 있으려나.


CT 결과

  지난 월요일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 날은 우리 엄마의 CT 결과 소식을 듣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난소암 항암제로 쓰이는 약은 엄마가 현재 쓰는 세가지 약 이외는 없다. CT 검사로 이제까지 항암치료로도 암이 사라지지 않았음이 밝혀지면 사실상 우리 엄마는 항암 치료는 중단하고 신약이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기적을 바라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조직 검사 결과 들을 때 만큼이나 떨렸다. 다행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이제 4차 항암을 마치고, 수요일에 퇴원하셨는데, 3차 때와는 다르게 훨씬 더 힘들어 하신다. 그래도, 항암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엄마의 면역이 (내가 백혈구, 혈소판 등 면역과 관계 있는 세포들에게 붙여준 애칭) 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길 기원할 뿐이다.


클래식 음악

  락으로 시작해서 재즈를 듣다가 클래식으로 가는 게 음악 애호가들의 공식 코스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나에게 대입하면 그 말이 딱 맞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클래식만 듣는 건 아니지만, 몇 년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클래식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선호하는 작곡가나, 연주자도 없지만, 울적하고 날씨까지 흐릴 때 단조라고 적힌 유명 클래식 아무 곡이나 재생하면, 대중적인 곡을 듣는 것 보단 훨씬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월미공원과 여러가지

일상 2016. 10. 10. 09:36

1. 평일에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면서, 운동을 전혀 하지 않다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진다. 환절기라 ​비염 때문에 점점 더 괴로워서 토요일에 내과에 가 약을 받아왔다.

요즘 친구 만나서 웃고 떠들 기분이 아니고 또 공교롭게도 주말마다 몸이 좋지 않아, 요근래 주말에는 거의 요양하며 집에 있는다.

2. 점점 아빠와 외출을 꺼리게 된다. 아빠가 야외에서 사고 칠까봐 외출해서도 내내 눈치보고 노심초사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아빠와 내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걸 느끼며 안타까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엄마가 많이 아픈데도 전혀 변화 없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더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고 그렇다. 아빠와 최소한의 대화를 하고 최소한 짧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해답인 거 같다. 저번 상담해주시던 선생님 조언대로 아빠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엔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빠다. 하지만 그런 말을 아빠에게 하는 거 조차 힘겹고, 수고스러워 관두기로 했다. 아빠의 병은 일종의 발달 장애니까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바뀔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요즘 들어선 엄마가 아빠의 성격을 왜 평생 참고 사신 건지 원망스러운 기분도 든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도 그 나름의 고충과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엄마아빠가 서로 맞지 않는 걸 인정하고 헤어졌으면 요즘 이처럼 괴로운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다.  

3.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번 주 목요일에는 가족이 주는 행복과 불행 중 대체 뭐가 더 큰 걸까. 하는 생각에 유서라도 먼저 써놔야 되나 싶었다. 엄마가 또 아빠 때문에 또 힘든 일을 겪는다면 정말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4. 토요일에 아빠가 대전에 가셔서 모녀만 집에 남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월미공원에 갔다. 주말에 엄마 데리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아빠만 집에 혼자두기 뭐해서 못갔는데 토요일에는 기회가 좋았다.

바람이 너무 세서 약간 추웠지만,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때문에 엄마도 나도 기분전환 확실히 했다. 오랜만에 토끼들을 가까이서 봤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여워 걔네들 노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도 아빠랑 외출하는 것 보단 나랑 나가는 게 편하실 테니 시간 나면 함께 시간 보내드려야지.. 하고 다짐했다.

5. 여기 쓴대로만 보면 난 인생 포기한 것처럼 사는 것 같지만 의외로 회사 생활 착실히 잘 하고,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한테 우울한 모습도 안 보인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대 단점은 월급인데 이걸 무마할 정도로 큰 장점이 몇 개 있다. 몇 개를 나열하자면, 회식이 거의 없는 점, 야근 없는 점, 전화 응대 적은 점,직원들이 사생활 관련 질문 안 하는 점. 정도? 특히 마지막 장점이 너무 좋다. 전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나에게 했는가.. 정말 끔찍했다. 엄마가 치료 받으시는 동안은 군말없이 지금 회사에 몸 담으며 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엄마가 입원하실 때마다 눈치 안보고 휴가 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 중 하나이니.

6. 저번 주에 노트북이 완전히 고장나서 AS 센터에 보냈는데, 수리비가 14만원이 나왔다. 하드디스크가 완전히 못쓰게 됐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SSD로 교체했는데, 과연 얼마나 좋아졌을지. 돈을 들였으니 앞으로 한 10년은 더 쓰려고 한다.




장학금 배정

일상 2016. 9. 29. 13:53

 대학 시절 전문적이지 않은, 한마디로 별볼일 없는 학문을 배운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제까지 행정 업무를 해왔다. 첫 직장에서 맡은 일은 행정이 아니었지만, 성격에 안맞았고, 이후 직장은 모두 "행정" 이라고 칭할 수 있는 업무를 했다. 행정이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못하는 일은 아니라.. 그럭저럭 밥 벌어먹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행정업무를 한 건 모교였다.

 첫직장을 때려치고 모교에서 학사행정 업무를 하니, 너무 수월했다. 안그런 교수도 있었지만, 교수들은 아무래도 공부만 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좀 순수한 면이 있었고, 학생 애들은 말할 것도 없이 직장인들보다 순진했다. 학생들보다 나이가 더 먹고 나서 보니 어찌나 귀엽든지. 또 한가지 스트레스를 덜 받았던 이유는 마감기한이 없다는 점 이었다. 학교 업무는 교수가 요청하거나, 애들이 찾아와서 읍소하면 마감기한은 무조건 무한 연장 되니까, 사실 명시된 마감기한은 실제 마감일과는 언제나 달랐다.

 내가 학사행정 업무를 했던 시절, 제일 신경써서 했던 업무는 '장학금 배정' 업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학기 300 넘는 돈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안타까웠던 일이 몇 번 있는데, 학년 전체에서 2등 학점을 받아놓고 장학금 신청도 안하고 서류도 전혀 제출하지 않은 채 군대에 가버린 남자애 때문에, 그 집 엄마와 누나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해서 장학금 한푼 못받았던 일이 있었다. (훈련병 기간이라, 전화통화도 불가능했다. 안타까웠던 아이..) 또 장학금 받을 수 있으니 서류 제출하라고 어떤 여자애한테 전화를 하니 지금 지방 집에 있어서 서류 제출 못하겠다고 한 황당한 일도 있었다. 

 여하튼, 난 장학금 받을 수 있는 애가 제출한 서류가 미비하거나 행여 연락이 두절이어도, 어떻게든 걔의 부모님 혹은 형제자매한테라도 전화해서 끝까지 장학금을 줬다. 어쩌면 그게 학사 행정 업무의 유일한 보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교에서 일하던 중, 신기한 장학금을 하나 생겼는데, 이름하여 '성적향상' 장학금 이었다. 학점 1점대~2점 초반인 애들 중에 선별해서 (특히 공부 못하는 애로 선별) 다음 학기 목표학점을 설정하고 실제 오른 점수 폭만큼 %로 환산해서 그만큼 장학금을 주는 아주 좋은 취지의 장학금이었다. 그 때 애들 리스트를 쫙 뽑아서 제일 학점 낮은 애한테 목표 점수 제출하라고 했더니만, 4.0 이상을 적어내서 속으로 좀 웃었다. 알고보니 걔가 군 전역한지 한 달도 안된 애라 과하게 열의가 넘치는 상태. 결국 내가 4.0 말고 3.8 정도로 써서 내라고 했고 다행히 걔는 학기 끝나고 장학금 받아갔다.

 여러가지 장학금에 얽힌 얘기가 있지만,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애는 계약기간 마지막 학기에 장학금을 준 남자 애다. 어떤 재단에서 기초학문 하는 학생들 중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비 전액을 매년 지원해 주고 있었다. 특정과 학생들에게만 혜택을 줄 수 없어서 매년 과 별로 돌아가면서 한명씩 추천 했는데, 그 학기는 우리 과 차례였다.

 당시 전공주임 (학과 행정 업무 총괄 하는) 교수님이 워낙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수님이셔서, 특히 이 장학금에 신경을 많이 쓰셨고, 나는 전학년 학생들에게 문자 보내고 홍보도 엄청 열심히 했는데 신청서는 딱 한명 제출했다.

 장학금 신청서를 자필로 써서 내야만 했는데, 걔는 글씨도 썩 잘썼고, 군대 가기 전에 학점도 좋은 애였다. (다음 학기에 복학 예정인 학생이었음) 그런데 그 신청서가 난 아직도 참 기억에 남는다. A4 절반 정도를 썼는데, 자기 집안 형편이 왜 어려운지, 그리고 이 장학금을 받으면 장래에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쓴 글이었는데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어찌나 글을 잘 썼는지 난 그 신청서를 여러번 읽었다. 그 신청서가 더 좋았던 건, 걔가 지금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과하게 자기 자신을 동정해달라는 식으로 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장학금을 꼭 받아야 한다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뭔가..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글 이었다.

 교수님도 그 신청서를 읽으신 후, 개인적으로 걔를 불러서 면담을 했다. 아마 그 교수님은 걔가 졸업할 때까지 잘 챙겨주셨으리라.

 결국 걔는 교수님의 정성어린 추천서와 본인이 쓴 (엄청 잘 쓴) 신청서 덕분에 졸업 때까지 학비 지원을 받게 됐다. 가끔 좀 궁금하다 걔도 졸업하고 이제 일한지 꽤 됐을텐데, 그 신청서에  쓴 대로 살고 있을지. 자기 앞 길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한 아이니까 당연히 잘 살고 있겠지만.


엄마가 걸린 난소암은 4기 환자의 5년 생존율이 11% 밖에 안되고, 재발확률은 70% 가 넘는다고 한다.
건조하게 적혀 있는 난소암 관련 수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수술도 굳세게 이겨내고, 1차 항암도 씩씩하게 견디고 있는 엄마가 항암을 마침내 다 마쳐도, 평생 재발하지 않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원하면서 사는 수 밖에 없다.
출퇴근 길에 개신교 목사들이 쉽게 쓴 성경을 조금씩 읽고 있다. 개신교에서 만든 성경이라 그런지 구약이 뒤에 있고 신약인 마태복음이 제일 처음 나온다. 하루 두 세장씩 마태복음을 읽는 중인데, 난 마태복음에 이렇게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이제까지 일요일 신앙 이었던 내가 이번 일을 계기로 내 곁에 예수님이 계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기도를 하며 우리 엄마가 완치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나면 거짓말같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 엄마는 9월 5일에 2차 항암 치료를 앞두고 있다. 1차 보다 훨씬 힘드시겠지만, 이겨내시리라 믿는다.
유방암을 이겨내고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에게 유방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조직검사 결과 듣는다고 했는데 어제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 나쁜 소식임을 예감했다.
아직도 3주에 한번씩 치료를 받는데, 항암 끝난지 5개월 밖에 안됐는데, 왜 또 재발을 한건지... 병원에서도 흔치 않은 경우라고 했다는데, 또 수술을 해야 하는 친구가 너무 안타깝다.
그리고 겁이 나기도 했다. 치료는 너무 어려운데 암이 생기는 건 친구 사례를 보더라도 정말 순식간이니까..
친구는 복직 후,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했는데, 그 활동을 평일 밤 12시까지 종종 하곤 했다. 피로감을 쉽게 느끼는 나는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리한 스케줄 이었다.
암에 직접적 원인은 없겠지만, 동호회 때문에 늦게자고 일찍 일어났던 게 재발에 약간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로 일도 많이 하고 여행도 하고 동호회도 하던 친구가 이제 정말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다. 힘들겠지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고, 고백을 해도 차일 것 같다.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걔를 좋아하는건지.. 내 상황이 힘들어서 누구라도 필요해서 자꾸 생각이 나는건지.
금요일에는 진짜 오랜만에 카페하는 친구네 가기로 했다. 오정세를 좋아하는 친구가 한국 코메기 영화의 명작 '남자사용설명서'를 아직도 안봤다고 하여 맥주와 함께 감상하기로 했다.
얼마만에 가족 혹은 회사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기다려진다.


요리

일상 2016. 8. 24. 12:01

주중에 요리를 하는 ​건 포기했고, 되도록이면 주말에 반찬이나 요리를 많이 하기로 했다.

평소 음식 사진을 별로 안 찍는 편인데, 앞으로 주말에 한 요리는 간단하게라도 사진으로 남기려고 한다.



이제까지 내가 한 요리는 미역국, 볶음밥, 닭도리탕, 브로콜리볶음, 계란국 이다. 

바로 밑 포스팅에 집안일 하느라고 힘들다고 엄살 부렸는데, 생각보다 만든 요리가 별로 없구나. (하지만 시간은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 흑)

내가 찍은 사진만 봐선 막 맛있어 보이진 않지만, 처음 한 거 치곤 꽤 맛있었다.

맛있을 수 밖에 없는 게, 난 요리에 대해 아무런 기초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책에 나온대로 정량을 지켜 요리를 하니, 맛있을 수 밖에 없다.

엄마가 뭘 먹어도 싱겁다고, 나중에 소금을 엄청나게 많이 넣으시는 바람에 닭도리탕은 몇 번 데우니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요리를 해서 드려도 엄마는 맛있게 드실 수 없다는 사실이 좀 슬프다.


이번 주말에는 뭘 해서 먹어야하나... 고민 중인데, 일단 집에 황태가 엄청나게 많으니 황태죽은 확정이고.. 황태죽 이외 무슨 밑반찬과 국을 만들어야 할 지 심사숙고 중이다.

뭐가 됐든 이번 주말에는 세 가지 이상 요리하는 게 목표인데, 가능할 지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큰어머니와 시흥사는 이모가 반찬을 만들어서 주셨는데, 음식 솜씨 차이가 너무 현격했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먹어야겠지만, 시흥 이모의 국은 도저히 그냥 먹을 수가 없었다. 시흥 이모의 국을 먹은 후, 앞으로 내 요리에 자부심을 느껴도 되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그에 반해 큰어머니가 주신 깻잎이랑 동치미는 꿀맛이었다.


병문안 오시는 분들이 과일을 많이 사들고 오신다. 요즘에는 포도가 너무 너무 맛있고, 작년까지 너무 비싸서 배불리 먹지 못했던 황도와 백도를 올해는 원없이 먹고 있다.

엄마 덕분에 삼시세끼를 고단백으로 너무 잘 챙겨 먹고, 과일까지 엄청나게 먹어서 나는 평소 여름 몸무게보다 무거운 상태다. 여름에라도 날씬해야 하는데.


요리를 좀 해보니 요리하는 과정은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다. 요리를 할 수 있게끔 만들기 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 그래도 요리는 내가 하면 하는 만큼 눈에 보이는 거라 꽤 보람차고, 뜻깊다.

이왕이면 요리 잘하는 아줌마로 늙는게 못하는 아줌마보단 좋을거라 생각하며, 당분간은 열심히 연마해볼 생각이다.


간병

일상 2016. 8. 20. 23:45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파서 그런지, 내 몸의 변화에 무척 민감하다. 아프기 직전의 느낌도 알고, 열이 날 때도 내 체온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맞는다.

아픈 것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나는 몸이 아플 것 같으면 만사 제쳐두고 쉰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무실에는 상비약이 언제나 완비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 잘 안다니던 사람은 필요이상으로 병에 민감한 나와는 달리 타이레놀 하나 먹는 것도 꺼리고, 병원도 웬만해선 잘 안가는 것 같다.

우리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아무리 병원에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아프면 약 먹으라고 해도 그렇게 완고하게 약을 드시지 않곤 했다.

재작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엄마는 올해 2월 쯤 돌보는 할머니 하나가 너무 증세가 심각하여, 그 할머니를 돌보고 집에오면 방광과 허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며 끙끙 앓았다. 나는 그렇게 아프면 일을 당장 그만두고, 가까운 기독병원 (우리동네에서 가장 예약이 쉬운 종합병원) 이라도 가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는 끝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그리고 올해 초여름부터 무리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 집만 돌봐도 힘든데, 세 집을 돌아다니며, 어쩔 때는 밤 10시에도 부르면 일을 가시곤 했다.
엄마가 쉬엄쉬엄 일을 하나만 해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살 수 있는데, 내가 그렇게 그만하라고 말려도 엄마는 뭐라도 홀린듯 그렇게 돈을 벌려고 기를 쓰고 일을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가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무리해서 일을 많이 한 건 다 동생의 전화 때문이었다. 6월달 어느 새벽에 성남에서 경찰이 전화를 했다. 난 통성명도 안하는 경찰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직도 그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경찰인지 아닌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여하튼 그 사람은 전화로 당신 아들이 지금 성남 길에서 누워서 자고 있으니 당장 와서 데려가라고 말했다.

엄마는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전혀 드시지 않는 분이었다고 한다. 엄마도 거의 술을 안드시고, 평생 취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엄마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아빠가 가끔 친구들과 술을 드시면 크게 화를 내시곤 했는데, 제일 아끼는 아들이 그렇게 증오하고 혐오해 마지 않는 술을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길에서 자고 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그날 밤 엄마는 밤새 속상해 하셨다.

사건 다음날 동생과 엄마가 전화를 하는 중에 엄마가 동생에게 왜 그랬냐 물어보니, 동생이 '요즘들어 내가 결혼하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동생이 결혼하기 힘들겠다고 한 건, 작년에 동생이 엄청 좋아해서 3개월 만에 얘랑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던 여자에게 차인 상처가 아직까지도 너무 크고, 걔만한 여자를 평생 못찾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다는 말이었을텐데, 언제나 돈에 열등감을 가진 엄마는 그걸 또 당신이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을 하셨던 거다.

엄마는 동생이 돈이 너무 없어서 결혼 못할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결혼할 때 동생에게 돈 천만원이라도 주려고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했다고 수술 다음 다음날 고백하셨다.

난소암 진단을 받기 한달 전부터 엄마는 열이 며칠동안 계속 나는데도 새벽6시 반부터 밤8시까지 미친듯이 일을 하셨다. 내가 화를 내며 그만하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들에게 천만원을 주겠단 엄마의 강한 의지를 꺽은 이는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었다.

10년 넘게 계속 다녔던 내과의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침대에 누워보라고 하신 뒤 배를 눌러보고 증세를 보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증세는 간단한 병이 아닌 것 같다고, 당장 인하대병원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외래 예약까지 해주셨다. 엄마는 거기서도 크게 아픈거 아닌데, 꼭 대학병원까지 가야하냐고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내과 선생님이 당장 가셔야 한다고 소견서까지 써주셨다.

그렇게 인하대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 끝에 결국 난소암 진단을 받았고, 대수술 후 이제 항암 1차를 마쳤다. 

20대에 6개월 넘게 엄마 병간호를 했던 경험이 있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는, 환자 외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프면 안되는게 병간호의 첫째 조건이라고 이 말 명심하고 안아프게 체력 관리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요즘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아빠와 내가 같이 하고 있지만, 집안일에 요령이 없는 우리 둘은 뭘 하나 해도 엄마처럼 빠르고 옳게 되질 않는다.

제일 힘든 건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거다. 자취할 때도 미역국 한번 안 끓였던 내가 반찬이나 국을 하며 출퇴근까지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요리책을 세권이나 샀는데, 책에 있는 간단한 재료도 결국엔 마트를 한 번은 가야하고, 마트에서 장보는 걸 싫어하던 내가 간신히 장을 보고 집으로 오면 벌써 어질어질 하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재료도 다듬어야 하고, 요리 한번 하면 설거지는 또 산더미처럼 나온다.

엄마는 이 모든 일을 이제까지 애 키우면서 일하면서 다 혼자 하셨다는건데, 엄마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맞벌이하는 여자들에게 무한한 경외감을 느낀다.

결국 익숙치 않은 생활에 나도 힘이 들었는지, 이번주 내내 미열이 났다. 체온이 참 신기하다. 1도만 높아도 사소한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참 힘이 든다. 열이 나는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는 집안일을 하려니 힘들었다. 엄마 외 아무도 아프면 안되는 게 간병의 첫번짼데, 벌써 첫번째부터 나는 글러 먹은 것이다. 이제서야 내 약한 체력이 후회스럽고, 운동 좀 해놓을걸..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엄마는 항암을 몇 차까지 할 지, 의사도 장담을 못하겠는 모양이다. 다만 3차 마다 검사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하셨는데, 제발 빠른 시일 내 차도가 있어서 길게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이 고되도 엄마를 보면서 내가 힘든 건 엄마의 100분의 1도 안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엄마 수술 부위에 붙어 있던 습식 드레싱을 제거했다. 거의 30cm 에 걸쳐 있는 무자비한 봉합 자국을 보고나니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아주 잠깐 아빠를 원망했다. 아빠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도 엄마에게 잘해드린 거 하나 없다. 엄마에게 일 그만하라고 화 내기 전에 차라리 그냥 내가 모은 돈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할걸.. 하는 후회가 든다. 어쩌면 내 탓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 다 쓸 데 없다.

불행에 이유를 찾다보면, 언제나 불행이 확대 재생산 되는 법이니, 엄마가 왜 몹쓸 병에 걸렸는지는 앞으로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다시 느끼는 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건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부질 없는 그 돈 때문에 엄마가 평생 마음을 졸였다니... 정말 가슴 아프다.

P.S 사실 상 엄마를 살린 건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다. 엄마가 바깥 활동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면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정말 고마운 분.


수술 후

일상 2016. 8. 16. 12:54

엄마가 그렇게 아파하는 걸 처음 봤다. 수술 전에 엄마랑 농담으로 애 낳는게 아플까. 이 수술이 더 아플까. 하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마취에서 깨서 정신 없는 와중에도 이게 백배는 더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수술 전날 입원한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울었다.

엄마가 입원하기 전까지는 계속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좀만 더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우리 엄마는 건강하게 일도 하고 평소처럼 깔깔깔 웃으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환자복 입고, 병실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정말 현실이구나 싶었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엄마도 나도 엉엉 울 것 같아서 엄마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간신히 엄마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엄마가 60대가 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건강하실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보다 일찍 엄마와 이별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 혼자 남겨놓고 가면 도저히 편히 눈을 못감을 것 같다고 하신 것이 떠올라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아무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수술 침대에 누워서 울고 계시는데, 나는 도저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걸 못볼 것 같아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내가 엄마 손을 잡아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우리 엄마는 결국 4기초 진단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의사가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간혹 전이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서 개복하자마자 닫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수술을 6시간 가량 하셨으니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좌절하다가, 지금은 엄마가 항암치료가 가능한 정도라는 것에 감사드린다.

일요일에 교회만 가는 정도였는데, 큰 고난이 닥치고보니, 종교가 큰 힘이 된다. 기도를 하면 엄마가 완치될 것만 같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제 나도 책임이 좀 무거워졌다. 제일 걱정인 건, 아빠다. 아빠가 잘 하실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다르게 엄마 마음 편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이런 때 일수록 나나 동생이 아빠랑 잘 지내서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어쨌든 2016년 이 덥고 또 더운 여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잊고 싶은 여름이 되겠지만, 아마 절대 잊지 못하겠지. 


노상

일상 2016. 7. 25. 18:21

퇴근 길 성수역 2번 출구에는 항상 꽃을 판다.
비가 오지 않는 퇴근길에는 항상 크지 않은 평상에 파스텔톤의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노상의 꽃은 일반 꽃집 가격의 4분의 1 가격이다. 어쩔 때는 꽃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10m 밖에서부터 꽃향기가 난다.
사장님의 안목이 출중하여 꽃의 종류나 색이나 언제나 참 곱다.
그 노상앞을 지나갈 때마다 꽃을 좀 살까 말까 망설이지만, 예쁜 꽃을 들고 신도림역에서 시루떡 같은 동인천급행을 타면 꽃이 다 상할 것 같아서 포기한다.
오늘 같이 더운 날에도 노상의 싱그러운 꽃들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오늘 노상에는 험상궂게 보이는 덩치 큰 아저씨가 손님으로 오셔선 다홍색과 흰색의 이름모를 꽃을 한아름 사셨다. 사장님은 뜨거운 햇빛 아래서 꽃을 포장하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꽃을 사는 사람, 꽃을 파는 사람 두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 꽃을 받는 분은 누구일까. 정말 부러워.


우리 엄마

일상 2016. 7. 24. 23:21

엄마가 결국 난소암 판정을 받으셨다. 8월 4일이 수술이고, 개복 후 조직검사를 해야 병기나 이후 항암 치료 등등 그 외의 것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금요일에 엄마와 함께 병원을 가서 의사가 검사 결과를 말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결과를 들은 뒤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어린 튜링 연기한 애가 연기를 참 잘했다고 느꼈던 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아이의 표정 때문이었다.

사람이 너무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면 울음도 나오지 않고 슬프지도 않다. 그 영화 속 아이처럼 그냥 어리둥절 하게 된다.

금요일에 내가 그랬다. 동생은 회사에서 뛰쳐나와서 울면서 인천까지 한걸음에 왔지만, 난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엄마는 수술을 받으신 뒤 항암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극복하실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토요일에는 원자력병원에 의사로 있는 이종사촌 언니에게 난소암은 예후도 좋고 완쾌도 가능한 암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왔다.

엄마는 죽는 건 아무 상관 없다고 하는데, 치료비가 많이 나올까봐 걱정이라고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몰래 다시 병원에 전화해서 사는데 문제 없으니 암수술 안한다고 말했다는 걸 듣고 화가 너무 났다.

세상을 좀 오래 살다보니 돈으로 되는 것 중 중요한 건 단 한가지도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대체 엄마는 평생 얼마나 돈에 시달리셨으면 죽어도 상관 없으니 돈을 안쓰겠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지금 하시는 건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작년에 암에 걸린 친구에게 치료비는 정말 얼마 안된다는 걸 들어서 그 얘기를 하고, 보험회사에 다 전화해서 보험금으로 받는 돈 액수를 구체적으로 엄마에게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엄마가 본인의 건강보다 돈 걱정을 하는 걸 보고 돈이 더 싫어졌다. 내 팔자에 아마 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살 일은 없을텐데. 부모님의 돈 걱정을 전해 듣는 건 너무 괴롭다.

하지만 엄마에게 화도 안내고 잘 견디고 있다.

엄마가 병원에 계신동안 아빠와 둘이 어떻게 지내야할지... 나와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언제나 큰 일이 터졌는데. 엄마가 아픈 중에 신경 쓰이지 않도록 아빠랑 잘 지내야 할텐데. 내가 그냥 죽은 듯 살아야 할텐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휴. 역시 사람은 이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만 생각하다니.

하나님이 못되 처먹은 나에게 벌을 주신 것 같다. 차라리 나에게 주실 것이지 왜 평생 고생만 한 엄마에게 주신걸까.

난 작년이 너무 최악이었기 때문에 올해는 좀 즐거운 일이 생길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가 작년보다 더 최악이다 매년 매년 작년보다 올해가 더 최악이라는 생각만 하면서 산지 벌써 이게 몇 년 째인지 모르겠다.

죽지 못해 살고 있지만, 그래도 엄마에게 잘해드려야만 한다.

공부도 하면 할수록 잘해지고, 운동도 그렇고, 경험이 쌓이면 뭐든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는데 불행은 그렇지 않다. 불행한 일을 계속 겪으면 사람은 점점 약해진다. 견딜 수 있는 힘이 커지는 게 아니라 점점 잃게 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힘으로 어떻게든 이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 엄마에게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이니 힘을 내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겠다.


작년과 올해

일상 2016. 7. 16. 15:58


작년 이맘 때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에서 짤렸다. 내가 사표를 내긴 했지만, 사표를 쓰라는 압력이 있었으니 짤린 거나 다름 없었다.

이 모든게 겨우 1년 밖에 안된 일이라니... 아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작년 여름의 가장 더운 시절은 모교에서 보내고, 지금 직장에 온지도 1년이 되간다.


저번 주 화요일에는 교육 때문에 신답역에 갔다. 서울에 이렇게 아담하고 귀여운 역이 있다니... 흥미로웠다. 플랫폼에 저렇게 작은 수풀도 우거져 있고, 단 하나뿐인 출구로 나와도 어찌나 고요한지. 서울은 언제 어디서나 북적거리고 사람으로 넘쳐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신답역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집 인천에서 이렇게 먼 곳을 누비며 회사 생활을 할 지 꿈에도 몰랐다. 난 대학 졸업할 때도 이직을 고려할 때도 항상 인천 우선으로 직장을 구했는데, 이상하게 인천이랑은 연이 닿질 않는다.


작년에 몹쓸 여자 하나 때문에 회사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올해는 좀 평안하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요즘 우리집 분위기는 오늘 날씨만큼이나 우울하다.


엄마가 8월 4일에 수술을 하신다. 암인지 아닌지는 수술해서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직검사하는데 한 일주일은 걸리니까.. 8월 둘째주까지는 엄마의 병이 암이 아니길 하면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궁근종이야 워낙 흔한 병이고, 주변 자궁근종 환자들도 근종 제거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우리 엄마는 생긴 모양이나 위치가 누가봐도 양성 근종은 아닌 모양이다.


너무 큰 비극은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아무리 비관론자라고 해도 누구나 '나에게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리 없다' 고 생각하는 일은 엄청나게 많으니까..

난 당연히 엄마가 큰 병이 아닐 거라 믿고 있다. 만약 암이라고 해도 폐나 간, 대장암보다는 제거가 쉬운 부위고 완치율도 높은 암이니 씩씩하게 치료 받으시면 완치될 거라 믿고 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 엄마가 암 판정을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엄마의 병이 별거 아니라는 말을 지금 당장 들을 수 있다면, 작년에 회사에서 당한 수모를 열번 쯤 더 당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현재로선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