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배정

일상 2016. 9. 29. 13:53

 대학 시절 전문적이지 않은, 한마디로 별볼일 없는 학문을 배운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제까지 행정 업무를 해왔다. 첫 직장에서 맡은 일은 행정이 아니었지만, 성격에 안맞았고, 이후 직장은 모두 "행정" 이라고 칭할 수 있는 업무를 했다. 행정이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못하는 일은 아니라.. 그럭저럭 밥 벌어먹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행정업무를 한 건 모교였다.

 첫직장을 때려치고 모교에서 학사행정 업무를 하니, 너무 수월했다. 안그런 교수도 있었지만, 교수들은 아무래도 공부만 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보다 좀 순수한 면이 있었고, 학생 애들은 말할 것도 없이 직장인들보다 순진했다. 학생들보다 나이가 더 먹고 나서 보니 어찌나 귀엽든지. 또 한가지 스트레스를 덜 받았던 이유는 마감기한이 없다는 점 이었다. 학교 업무는 교수가 요청하거나, 애들이 찾아와서 읍소하면 마감기한은 무조건 무한 연장 되니까, 사실 명시된 마감기한은 실제 마감일과는 언제나 달랐다.

 내가 학사행정 업무를 했던 시절, 제일 신경써서 했던 업무는 '장학금 배정' 업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학기 300 넘는 돈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안타까웠던 일이 몇 번 있는데, 학년 전체에서 2등 학점을 받아놓고 장학금 신청도 안하고 서류도 전혀 제출하지 않은 채 군대에 가버린 남자애 때문에, 그 집 엄마와 누나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해서 장학금 한푼 못받았던 일이 있었다. (훈련병 기간이라, 전화통화도 불가능했다. 안타까웠던 아이..) 또 장학금 받을 수 있으니 서류 제출하라고 어떤 여자애한테 전화를 하니 지금 지방 집에 있어서 서류 제출 못하겠다고 한 황당한 일도 있었다. 

 여하튼, 난 장학금 받을 수 있는 애가 제출한 서류가 미비하거나 행여 연락이 두절이어도, 어떻게든 걔의 부모님 혹은 형제자매한테라도 전화해서 끝까지 장학금을 줬다. 어쩌면 그게 학사 행정 업무의 유일한 보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교에서 일하던 중, 신기한 장학금을 하나 생겼는데, 이름하여 '성적향상' 장학금 이었다. 학점 1점대~2점 초반인 애들 중에 선별해서 (특히 공부 못하는 애로 선별) 다음 학기 목표학점을 설정하고 실제 오른 점수 폭만큼 %로 환산해서 그만큼 장학금을 주는 아주 좋은 취지의 장학금이었다. 그 때 애들 리스트를 쫙 뽑아서 제일 학점 낮은 애한테 목표 점수 제출하라고 했더니만, 4.0 이상을 적어내서 속으로 좀 웃었다. 알고보니 걔가 군 전역한지 한 달도 안된 애라 과하게 열의가 넘치는 상태. 결국 내가 4.0 말고 3.8 정도로 써서 내라고 했고 다행히 걔는 학기 끝나고 장학금 받아갔다.

 여러가지 장학금에 얽힌 얘기가 있지만,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애는 계약기간 마지막 학기에 장학금을 준 남자 애다. 어떤 재단에서 기초학문 하는 학생들 중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비 전액을 매년 지원해 주고 있었다. 특정과 학생들에게만 혜택을 줄 수 없어서 매년 과 별로 돌아가면서 한명씩 추천 했는데, 그 학기는 우리 과 차례였다.

 당시 전공주임 (학과 행정 업무 총괄 하는) 교수님이 워낙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수님이셔서, 특히 이 장학금에 신경을 많이 쓰셨고, 나는 전학년 학생들에게 문자 보내고 홍보도 엄청 열심히 했는데 신청서는 딱 한명 제출했다.

 장학금 신청서를 자필로 써서 내야만 했는데, 걔는 글씨도 썩 잘썼고, 군대 가기 전에 학점도 좋은 애였다. (다음 학기에 복학 예정인 학생이었음) 그런데 그 신청서가 난 아직도 참 기억에 남는다. A4 절반 정도를 썼는데, 자기 집안 형편이 왜 어려운지, 그리고 이 장학금을 받으면 장래에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쓴 글이었는데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어찌나 글을 잘 썼는지 난 그 신청서를 여러번 읽었다. 그 신청서가 더 좋았던 건, 걔가 지금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과하게 자기 자신을 동정해달라는 식으로 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장학금을 꼭 받아야 한다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뭔가.. 끝까지 자기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글 이었다.

 교수님도 그 신청서를 읽으신 후, 개인적으로 걔를 불러서 면담을 했다. 아마 그 교수님은 걔가 졸업할 때까지 잘 챙겨주셨으리라.

 결국 걔는 교수님의 정성어린 추천서와 본인이 쓴 (엄청 잘 쓴) 신청서 덕분에 졸업 때까지 학비 지원을 받게 됐다. 가끔 좀 궁금하다 걔도 졸업하고 이제 일한지 꽤 됐을텐데, 그 신청서에  쓴 대로 살고 있을지. 자기 앞 길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한 아이니까 당연히 잘 살고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