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느낌

일상 2011. 1. 26. 15:30
고등학교 때 시골로 내려갔을 때는 마음이 무척 허했다. 어린 마음에 팝칼럼니스트나 영화평론가 혹은 기자 같은 허세 가득한 직업을 원했던 나는 문화 생활 기회가 적을 수 밖에 없는 시골이 어찌나 감옥처럼 느껴졌는지 모른다. 고등학생이라 어차피 영화볼 기회도 별로 없고 공연은 지금도 잘 안가고 책도 잘 안읽는데 괜히 그랬다. 사춘기라 우울한데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해 내 상황을 더 비관 했는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렇고 보니 고3때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무조건 서울 진출이었다. 대전에 있는 대학을 한군데 쓰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엄마는 거기 학비가 엄청 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거기 가라는 압박을 넣곤 하셨다) 수능 후 생각보다 점수가 안나와서 인서울 대학은 많이 못썼지만, 모든 원서를 수원, 인천 여하튼 서울과 가까운 쪽으로만 썼다.
저번에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기는 영화 감독 하면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게 있었다고 하는 걸 봤다. 왠지 시골 출신이 아니면 예술을 하는 데 딸릴 것 같고 그랬다는데, 서울 사람도 나름대로 저런 컴플렉스 가진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여하튼 깡시골서 태어난 내가 다시 시골로 복귀한 것 뿐인데도 그게 그렇게 속이 쓰리고, 내 자신이 퇴보하는 것 같고 그랬다.
막상 인천와서 살아보니 인천이라고 별 다를 것도 없고 말로만 듣던 서울 거리는 걸어도 그냥 거리일 뿐 이고 사람만 많고 별로 좋을 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학교 다닐 때는 한 학기 중 서울을 두번 가면 많이 가는 편이었다. 꼭 가야만 할 때만 잠깐 갔다오고 말았지. 인천과 서울은 생각보다 엄청 멀어서 한번 갔다오면 한없이 피곤했다. 시골에서 볼 땐 수도권=서울 같았는데 막상 수도권으로 오자 서울땅과 아닌땅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서울은 서울 인천은 인천 경기도는 경기도. 각각 그 지역만의 삶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내가 졸업하던 2007년 2월부터는 하루도 안 거르고 서울을 왔다갔다 했다. 물론 그때도 서울 많은 곳을 돌아다닌 건 아니었지만, 평일에 내가 밟고 있는 땅은 항상 서울땅이었다. 아침 6시 50분에 길을 나서서 항상 몽롱한 상태로 전철을 타서 피곤에 쩔어 지하철 환승로를 걸어다녔고, 제발 제발 제발 회사랑 집 좀 가까웠음 좋겠다고 열망했는데 진짜로 회사와 집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수도 서울, 특별시 서울의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의 분위기란 그것만의 분위기가 있어서 어제는 갑자기 그 시간대 서울을 죽었다가 이제금방 깨어난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싶었다. 너무 너무 지긋지긋했는데 그 시간과 분위기가 그리워질 줄이야.

새로운 직장에서

일상 2010. 9. 28. 09:23
회사에 출근해서 처음으로 딴 짓을 하고 있다. 내일부터 조금 바빠질 것 같은데 오늘은 조용할 거 같다. 좀 있다가 저쪽 다른 건물 한번 가야 하는데 벌써 군기가 빠진건지 다른 때 같으면 부지런하게 아침에 오자마자 본부건물에 가서 제출할 거 제출하고 했겠지만 있다가지 뭐 하고 있다.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약 한달간 여기에서 일한 느낌을 말하자면

1. 무서운 대학원생들
: 나와 가까운 사람 중에는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다들 대학 졸업해서 돈 벌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대학원에 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다. 이런 이유들로 난 대학원생들의 세상을 전혀 몰랐고, 여기와서 일하면서 난생처음 대학원생들을 맞대하고 있다. 내가 있는 과가 우리학교에서 그닥 밀어주는 과도 아니고 워낙 소규모긴 하지만 생각보다 대학원생들이 엄청 많다. 소심한 나는 석사과정 말고 박사과정한테는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도 많이 안 부딪치려고 말을 많이 섞지 않을 예정이다. 특히 아저씨들 한테는 말이다. 난 누가 돈 주면서 공부하라고 해도 할까말까인데 여기 사람들은 몇백씩 줘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보자니 참 이해 안간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솔직히 난 사회나가서 일하면서 내가 대학에서 배운 건 진짜 단 한가지도 필요 없고 그냥 사회로 나오기까지의 유예기간만 늘려주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대학을 안나온 사람들에 대한 편견같은 것에는 자유로울 수 있다지만 일하다 보니 대학 나온 사람이나 고등학교 나온 사람이나 일하는 능력에서의 차이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전문대 나오거나 고등학교 나오서 바로 일한 사람들보다 내가 딸렸으면 딸렸지. (내가 일하는 회사만 그랬을 수도 있다) 대학원에 몸을 담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대학원에서 웅크리고 있어봤자 점점 겁쟁이만 될 거 같다. 또 한가지 신기한 점은 난 내가 나온 이 모교에 대해서 애정이 전혀 없는데 반해 여기 대학원생들은 나름 자부심 갖고 있고 다른 곳에서 대학 나온 사람들을 약간 무시하고 텃새 부리는 느낌인데, 내가 상관할바는 아니라고 해도 좀 같잖다. (역시 난 세상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인가!)

2. 출퇴근 시간과 새로운 세상
: 출퇴근 시간이 짧으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흐흐흐. 무슨 소리인고 하니 난 예전 회사를 다니면서 편도로만 1시간 반이 걸렸기 때문에 퇴근 후에 무언가를 한다는 건 내 기력상 상상할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오래 걸려도 집에 오고 가는데 40분이면 간다. 예전에 마을버스 - 전철 2번 갈아탈 필요도 없고 버스 한번이면 바로 직장으로 도착이다. 칼퇴를 해도 7시 이전에는 절대 집에 올 수 없는 회사를 다니다가 예전회사보다 30분 더 늦게 끝나는데도 집에 오면 7시가 안되는 이상한 느낌에 적응하느라 애를 좀 먹었다. 지금에서야 예전 회사 사람들은 이런 생활을 하니까 퇴근 후에 운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한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침에 눈뜨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예전 직장보다 직장 내 위치도 구리고 월급은 몇십만원이 깍였지만, 몸이 편하니까 전혀 슬프지 않다. 학교고 직장이고 뭐든 가까운 게 제일이야!

3. 윤택한 사무실 생활을 위한 물건들
: 예전에 내가 일하던 회사 사진을 올렸을 때 봤겠지만 난 사무실에 이상한 걸 많이 갖추고 사는 사람 중 하나였다. 큰 건 별로 없지만, 팔꿈치 보호대까지 갖추고 살았으니까. (근데 이 팔꿈치 보호대 사용해보면 다들 좋아할텐데. 정말 안아프다!) 첫 출근을 준비하면서 큰 가방에 짐을 엄청 싸놨는데 2주동안은 일하느라고 하나도 풀지 못했었다. 그게 마음의 짐으로 계속 남아있다가 추석 당일날 결심을 하고 회사에 와서 사무실도 쓸고 닦고 그 짐을 다 풀었다. 원래 사람이 관두기 직전이면 사무실에 애정도 안가고 별로 정리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이해는 하지만 예전 사무실 모습은 너무 비효율적이고 불편하고 지저분했다. 다 정리하고 나니까 마음도 편안해지고 기분 좋고 일도 막 잘되는 거 같고 이제 손 닿는 곳에 비품이 있어서 편하다. 한동안은 커피도 못 내려마셨는데 혼자 커피도 내려마시고, 화분도 가져다 놓고 조금은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아직 모르는 게 엄청 많아서 긴장된 상태긴 하지만 조금씩 나아질 거라 위안하고 싶다.

4. 점심메뉴 고민
: 사무실을 혼자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점심은 여기 같은 단과대학 소속 사람들이랑 먹어야만 한다. 그래서 11시 30분 정도가 되면 맨날 네이트온 창을 켜서 메뉴를 정하는데 난 그냥 제일 가까운 저쪽 사범대학 쪽 식당가서 밥 먹고 빨리와서 쉬고 싶은데 사람들은 그 메뉴를 골라서 맨날 멀리까지 간다. 또 그 단과대학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내가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거짓말 하고 혼자 사범대학 식당가서 먹고 그럴 때도 꽤 있다. 가끔 도움 받을 일이 있어서 아예 모른 척은 못하고 있지만, 차라리 혼자 밥먹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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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날 월미도.

일상 2010. 7. 20. 22:48
과외를 하는 집 중 다른 한 집은 내가 과외를 하러 가면 애가 없거나, 애가 있는데도 병원을 가야되서 과외를 못하는 날이 많다. 우리집이랑 가까운 집이긴 하지만, 그렇게 사정이 생기면 나한테 문자 하나만 딱 보내주셔도 정말 감사할텐데, 내가 그 집 앞에 있는 문앞에 가서 전화를 하면 그때서 오늘 안된다고 답변이 온다. 그나마 전화가 연결이 되면 다행인데 그것도 안되서 30분 정도 기다리다가 문자만 남기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복도식 아파트라 여름은 괜찮은데 이거 겨울에 복도에서 기다리려면 춥겠구나 하는 걱정도 한다. (그때까지 할지 안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매일 기다리는 일이 많다보니 어렸을 때 눈높이 선생님에게 갑자기 죄송해지기도 하고 그렇다. 난 어렸을 때 눈높이 수학도 하고 눈높이 영어도 했다. 나 초등학교 때는 그게 아주 선풍적인 인기였다. 가격도 저렴하고, 또 난 엄청 효과도 봤다. 그러나 당연히 난 교재를 엄청 밀렸고, 너무 밀려서 도저히 수습이 안되는 날에는 눈높이 선생님이 문을 두드려도 집에 없는 척을 했다. 미안해요. 눈높이 선생님. 흑. 아무래도 그때 쌓은 업보를 지금 받는 모양이다.
어제도 버스를 타고 그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안될 거 같다고. 이미 버스를 탄 상황이고 우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월미도로 향했다. 마침 해가 딱 지는 시간이라 노을도 보고 우울한 마음도 달래고 좋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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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간거라 핸드폰 카메라로 좀 찍었는데, 딱 적절할 때 도착하여 해 지는 모습까지 보고 왔다. 그 주변에 은근히 집이 많아서 산책하러 나온 사람도 많고 다양한 연령대의 연인들도 있지만 난 혼자였다. 생각해보면 회사다니면서 월미도 혼자 왔을 때 엄청 춥고 심적으로도 엄청 힘든 때 였다. 지금도 뭐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는 걸 실감했다. 돈은 그때보다 없지만.
오는 길에는 2번 버스와 12번 버스를 햇갈려서 이상한 곳까지 갔다왔는데, 이제 내가 진짜 인천 사람이라고 느낀게 버스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데도 별로 불안하지도 않고, 대충 버스 번호 보니까 어느 쪽 가는지 감이 왔다. 항상 어떤 지역의 이방인 이었던 내가 그렇게 능수능란(?) 하게 생전 처음 보는 동네에서도 집을 찾아오고 나니 정말 인천이 내 고향이 된 거 같았다.
사람들 보면 고향 떠나기 싫어서 좋은 직장, 학교에 붙었으면서도 갈까 말까 고민하는 걸 보면서 정말 이해가 안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도 그런 기분을 이해할 것 같다. 사실 과외만 하면서도 대충은 먹고 살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취직에 대한 의지가 살짝 꺽인 상태였다. 그러다가 어제 과외가다가 전화온 위의 저 집에서 돈을 너무 안 주시니까 이놈의 짓도 못할짓이다 싶어서 이틀동안 미친 듯이 구직 사이트를 뒤졌는데 인천에서 출퇴근이 불가능한 곳은 별로 가고 싶지가 않고 그렇다. 인천에서 그냥 일하면서 먹고 사는게 가장 큰 소망이고, (앞으로 혹시 인천을 떠나게 되는 일을 안 만드려고) 장롱면허에서 탈출하여 강남이나 분당 일산 같은데 그냥 아빠차 끌고 갔다올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할 생각이다.

아까는 미숫가루를 타 먹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살았던 주안8동 안국아파트 시절 생각이 확 났다. 원래 기억이란 게 냄새나 노래, 맛, 음악 등이 가미되면 더 강렬해지는 거니까.(나같은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 맡았던 냄새에 엄청 민감해서 그 냄새를 맡으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해지곤 한다) 주안 8동 살 때 우리집은 13평이었는데, 엄마가 미숫가루에 얼음을 넣어주거나 아니면 그때 당시 엄청 유행하던 아이스크림 만드는 틀에 넣고 미숫가루를 얼려주시곤 했다. 내가 살던 주안8동 안국아파트는 한신휴플러스 라는 고급 아파트로 재건축이 되었고, 난 화수목요일 과외를 가기 위해 그 아파트 앞을 마을버스 타고 지나다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안국아파트를 떠나서 대전 정읍을 거쳐 28살 때 다시 그 앞을 이렇게 매일 지나다니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런거 보면 정말 사람일은 모르는거다.
원래는 월미도 다녀온 이야기만 하고 싶었는데 너무 이야기가 길었다. 점점 이 블로그가 인천 예찬 블로그가 되어 가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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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인천.

일상 2010. 6. 2. 16:35

난 우리집이 인천의 끝인 줄 알았다. 1호선을 보면 우리집은 분명 끝에서 두번째에 있는 곳이다. 캐나다에서 몇 년 살다가 잠깐 들어온 사촌 오빠는 인천이 엄청 큰 것 같댄다. 부평 쯤 가니까 여기가 인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동네는 (고종사촌 오빠고 고모는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계신다) 완전 시골 같다고 했다.
나도 처음 여기를 왔을 때 뭐 이런 동네가 다 있나 싶었다.바로 옆에는 연탄공장이 있고, 또 바로 앞으로 기차가 지나다닌다. 기차가 지나갈 때는 기차 앞에 아저씨들이 호루라기 불면서 빨리 피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여름에는 그 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깬다. 우리 베란다 앞으로 난 길은 연안부두로 난 길이라, 바퀴가 4개 달린 자동차는 전체 자동차의 10% 이내. 기본 바퀴가 8개 이상 달리고 3톤 이상은 되야 우리 베란다 앞 길을 달릴 자격이 된다.
가끔 그런 큰 차들 운전하는 아저씨들끼리 신경전 붙으면 그 경적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한 아저씨가 경적 누르면 옆에 아저씨가 누르고 또 다른 아저씨가 누르고 정신 없어진다)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어 아기를 낳아서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아마 엄청 참담한 심정일 거다. 우리 동네 찻길에서 교통사고가 난다면 "꽥" 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거 같으니까.
미세 먼지는 또 어찌나 많은지, 우리 동네는 저번에 전국 미세농도 2위에 랭크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인천 도시 축전 기간 동안에는 공항에서 부터 지나가는 버스 노선을 변경했을 정도로 인천시 자체적으로 수치스러워 하는 동네다. 그런데 인천시 말이야. 그렇게 이 동네가 쪽팔리면 보기 좋게 해줄 생각은 안하고 노선 변경하는 꼴이라니. 오늘이 선거날이지만, 뭐 보나마나 또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당선될 게 뻔하다. (혹시나 하여 선거 다른 사람한테 하고 오긴 했지만)
 
우리 동네에 대한 악담을 늘어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우리 동네에 이미 정이 들었다. 좋다. 살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 이상한 분위기가 말이다. 구월동이나 송도 같은 삐까뻔쩍 한 동네는 진짜 인천이 아니다. 그 쪽은 가짜 인천이고, 우리 동네가 진짜 인천이다. 항구도 있고, 후줄근 하고 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한 진짜 인천.

아직 여러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것도 있고, 아직까지는 다른 곳에 또 취직을 하여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난 내 생활유지를 위하여 과외를 시작하였다. 난 사실 대학생 때도 마트에서 물건 파는 몸으로 뛰는 알바만 했지 과외 같은 아르바이트는 한번도 안해봤다. 그런데 뭐 오늘로 두번 했는데 나름 할만 하다. 일단 중학생이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음주에는 영어 과외도 해야 하는데 영어는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조금 고민이긴 하지만.

과외를 가는 동네는 우리집보다 더 인천의 끝이다. 바다가 보이는 진짜 인천이다.
월요일에 과외를 하러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진짜 인천 스러운 인천 남항을 봤다. 내가 과외가는 동네는 수산 시장이 있는 곳이라 아파트 앞에 바다 비릿내(기분 나쁘지 않은 비릿내) 가 진동을 하고, 그 아파트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그 어시장에 종사하는 분들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다 어시장 종사자로 보이는 차림을 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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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어린 중학생 여자애를 보니까 너무 너무 너무 귀여웠다. 난 혼자 친해지고 싶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걔네들이 날 너무 경계한다. 물론 엄마가 시켜서 하는 거고 놀고 싶은데 와서 문제 풀라고 시키는 내가 달갑지는 않겠지만, 난 이미 걔들이 귀여워 죽겠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과외 맡은 여자애 둘다 순진하고 착하다. 아직 중3이 안되서 그런걸까? (한명은 중1, 한명은 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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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집 베란다에서 바라본 인천항의 모습.(지난 겨울에 찍었다)




내 고향은 인천.

일상 2010. 4. 16. 18:22
내 동생은 나와는 달리 전라북도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했다. 그래도 지 고향으로 삼고 있는 건 정읍인데, 오랜만에 정읍에 갔더니, 아... 왔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고향의 느낌이 그런 것일까? 난 초중고를 다른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건 없는데 그래도 가장 오래 산 인천을 그냥 고향 삼기로 했다.
백수가 되서 친구 만나러 졸업했던 학교에 갔는데, 오랜만에 가는 버스타고 가는 길을 보니 아... 인천 참 후졌다. 하는 생각을 했다. 인천은 산도 없고, 봄이 되었는데도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르겠고, 불량한 애들도 많고, 시내버스 운전기사는 다들 사이버 포뮬라 저리가라의 난폭운전이지만, 그냥 오래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을 붙이려고 하니까 정이 붙었다.
우리 엄마는 인천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싫다고 틈만나면 떠날 준비하지만, 우리집이 나 초등학교 4학년때 인천을 떠났다가, 다시 중3때 인천으로 오고 고1때 인천 떠났다가 다시 인천으로 오고 서울 잠깐 살았다가 인천으로 오고 벌써 인천으로 이사들어온 적만 3번째 인거 보면 아무래도 인천을 떠나면 안되지 싶다.
백수된 첫날 월요일에 졸업했던 학교에 갔었다.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내가 다니던 대학교가 진짜로 남자가 많은 학교였다는 것과 그 남자 많은 와중에서도 남자 없이 그냥 졸업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젊고 이쁘고 잘생긴 애들 보니까 뭔가 눈이 호강스러웠다.
또 한가지, 내가 생각보다 예전 좋아했던 분을 못 잊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제길 학교 가는 곳마다 다 이거저거 다 생각이 나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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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민의 슬픔

일상 2010. 1. 6. 00:16
대한민국 교통이 이정도로 거지 같을 줄 몰랐다.
오늘 아침 대방역에서 서울방면 1호선이 안와서 다시 신길로 되돌아가선 5호선 6호선 4호선 타고 출근.
퇴근길에는 정말 전철이 안오고 설령 온다고 해도 절대 탈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만사천원 내는 공항 리무진 타고 공항에서 306번 타고 동인천에서 내려서 다시 시내버스 갈아타고 퇴근.

어영부영 거리는 거 다 합쳐서 출퇴근 왕복시간이 총 5시간이 걸렸다.
어제도 총 5시간 걸렸는데.

오늘은 버스 기다리다가 너무 피곤해서 울 뻔했다. 날씨가 춥기는 또 오지게 춥고.
2010년 벽두부터 눈부터 시작해서 춥고 재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빨리 자고 싶은데 이직 알아보느라고 잘 수가 없다.
오기가 생겨서 내일은 6시에 집에서 나가려고 한다.

6시에 출근했는데도 지각하면 하는 수 없는거다.
전철이 130대가 고장났다고 하는데 내일도 5시간 출퇴근 할 생각하니까 토 나온다.

나 진짜 인천에서 취직하고 싶다. 인천 인천 인천.
서울 진짜 멀어!

허술한 모습.

일상 2008. 12. 8. 14:54

나와 인천이 인연을 맺은 역사는
초등학교 2학년 부터 4학년 1학기까지.(대전)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전북 정읍) 대학교 1학년에서 휴학한 1학기까지. (서울-고작두달) 복학하여 4학년 1학기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총 4번이다. 살아온 해로 따지면 꽤 되지만 쭉 산 것은 아니라.. 하지만 뭐 내 만 24년 동안 가장 오랜기간을 살아온 곳이기 때문에 애정을 갖기로 했다. 실제로도 애정이 생기기도 하고.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하겠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인천시 남구 관교동에 있는 관교초등학교 인데 22번 버스를 타면 항상 그 초등학교를 지나간다. 그럴 때 마다 좀 신기한 기분이 든다. 그 초등학교 앞에는 내가 매일 가던 관교문구 가 있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다. 관교문구 이외에는 다른 경쟁자가 없었는데 아직도 경쟁자 없이 건재하다. 초등학교 3학년 부터 엄마가 일을 시작하셔서 나는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는 어린이 였다. 그때 당시 관교초등학교는 바로 옆에 생긴 동아아파트 때문에 애들이 하도 전학을 많이 와서 학교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내가 전학갔을 때 받은 번호가 82번이니 말 다한거지. (한반에 80명이 넘었다. 세상에. 내가 2학년일 때 4학년인 언니 오빠들은 한 의자에 두명이 앉아서 수업받는단 소문까지 있었다)
학교 사정이 그렇다보니 난 오전반 오후반 을 번갈아가면서 학교에 다녔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이번주 오후반이다. 이번주 오전반이다 말 안해줘도 곧잘 잘 챙겨서 오후반 오전반을 잘 갔다. 하지만, 타고나길 건망증이 심해서 난 가정통신문에 사인 받아오라는 건 맨날 사인 실컷받고 집에다 놓고 오거나, 잠 들기 직전까지도 엄마아빠가 안 들어오셔서 어린 맘에 내가 아빠사인 흉내내서 해야지 하고 해갔다가 선생님한테 혼나기 일쑤였다. 숙제도 실컷 다 해놓고 공책을 놓고 오거나 준비물도 마찬가지. 난 엄마가 집에 있어도 엄마한테 전화해서 가져다 달라고 안했던 것 같다. 왜그랬지. 그냥 일하는 엄마가 힘들 것 같기도 했고,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게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제도 그 관교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면서 관교문구를 보니 어렸을 때 준비물 실컷 다 사놓고 바로 돈 꺼내느라고 바닥에 내려다놓고 그냥 그대로 학교 가던 내 자신이 생각나서 웃겼다. (저런 행동을 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이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손등에 검정색 유성 매직으로 찰흙,리코더, 실로폰, 이렇게 적어놓기도 하고 그랬지만 그래도 꼭 뭐 하나씩 잃어버리고 그랬다. 이건 중학교, 고등학교가서도 마찬가지였고. 실내화 잃어버리고 그러는건 다반사였고,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없는 살림에 졸라서 산 인형달린 실내화를 산지 일주일만에 잃어버려서 집에 안들어가고 놀이터에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어린마음에 엄마한테 너무 죄송했기 때문에... 흐흐. 지금 생각이지만, 진짜 처음으로 인천이랑 인연을 맺었을 때 우리집은 징그럽게 가난했다.

뭐 또 우울하게 가난했던 시절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며칠 전에 내가 했던 웃긴 행동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

난 핸드폰이 전리품이나 다름이 없는데 왜냐하면 하루에 오는 문자는 광고문자 포함하여 3통 이내이고 전화가 오는 경우는 일주일에 3통이내, 내가 전화를 핸드폰으로  거는 일은 2주일에 3번 이내 이다. 대신 핸드폰으로 야구 시즌에는 야구도 보고 인터넷도 하고 그런다. 야구시즌이 끝나니 딱히 위성 DMB 가 필요가 없어져서 그걸 해지해야겠다고 홈페이지가서 TU 해지를 잘 했다. 그리고 나서 한 3일 4일 지났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내 핸드폰에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근데 이상하게 네이트에 접속이 안되는거다.
한 이틀 그러길래 114에 전화를 했다. 네이트 접속 안된다고.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고객님은 핸드폰을 일시정지 하셨는데요."
난 TU 해지 뿐 아니라 핸드폰 자체를 일시정지를 한 채로 약 일주일간을 지냈던거다. 뭐 원래대로 많은 사람이 연락을 하진 않았겠지만 좀 웃겼다. 흐흐흐.

또 대학 때는 여름방학동안 토익 공부를 좀 하고 8월달 토익을 봐야지. 하고 그 날 아침에 학교에 갔다. 내 성이 곽이기 때문에 난 항상 자리배치표 보면 윗부분쯤을 보면 되었는데, 그날따라 내 이름이 없는거다. 그래서 시험본부로 갔다. 접수했는데 이름이 없다고 하니까 내 이름으로 접수된 사항이 없다고 하는거다. 그래서 아니 그럴리가 없다고 저는 습관처럼 접수해놓는다고. 그렇게 따져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터덜터덜 집으로 왔는데이럴수가!!! 진짜로 내가 8월 토익을 접수를 안했더라. 크크크. 그게 졸업 앞둔 여름방학에 생긴일 이라서 어찌나 황당하든지. 뭐 신분증 안가져가서 시험도 못보고 온 건 옵션으로 한 두번 되고 한번은 우리집이랑 가까운 시험장이라 다시 집에가서 가져왔었지. 흑.

어제 밤에는 너무 우울하여 친한 고등학교 친구랑 전화를 하다가 잤는데, 술 마시고 요즘 알고 지내던 남성에게 분명히 전화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난댄다. 그 남자도 연락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중이라고 했는데 나는 혹시 실수한 거 없냐고 그냥 니가 물어보라고 했는데 친구는 내 충고를 거부했다.

아침에 비가 왔는데 주말동안 추웠던 날씨가 완전히 풀렸다. 후. 오늘은 제일 싫은 월요일. 직장인들에게 평화를.


결국에는 친구한테 메모리카드를 통째로 받은 탓에 이번 큐슈 여행은 꽤나 풍요로운 사진들을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하하. - 근데 나 이번에도 스크롤의 압박은 심할 듯 함.

난 휴가를 8월 12일 부터 냈다. 여행 다녀와서 이틀 쉬는 게 더 좋았겠지만 친구가 12일은 도저히 안된다고 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근데 이게 나았다. 여행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라 12일 하루동안 어디어디 갈지도 정하고, 짐도 챙기고.
아침 8시 비행기라 빨리 자려고 했는데 여행 준비 때문에 그렇질 못했다. 여행 때문인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흥분하거나 그런것도 아닌데 난 뜬 눈으로 새벽 2시까지 버티다가 잠이 잠깐 들었는데 새벽에 무지막지한 천둥소리 때문에 다시 깼다. 난 태어나서 그렇게 큰 천둥소리는 처음이었다. 우리집 바로 앞에서 천둥이 친건지 거짓말 안하고 우리집 베란다 창문이 흔들리고 바닥에 까지 진동이 오는데 말 그대로 자연의 힘이었다. 아아 무력한 인간이여~~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나는 3시간 자고 공항으로 출발.
아빠가 공항까지 태워다 주셨는데 출발하는 날 비가 정말 많이 왔다. 비가 많이 와도 비행기가 못뜨는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가보다. 생각해보니 안개 때문에 결항되었단 얘기는 들었어도 비때문에 결항되었단 얘기는 못 들었으니까..
최고 성수기에 여행을 예약하여 그런지 최고 싼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결국 면세점 쇼핑은 이번에도 많이 못했다. 지금 큐슈 여행 찾아보니 내가 갔을 때 보다 가격이 한 15만원 가량 저렴하구나.아 제길.
난 면세점은 24시간 풀가동인 줄 알았는데 이날 보니 그건 아니었다. 7시부터 문을 여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행 때 들고 다닐 뒤로 매는 가방을 하나 구입했는데 시중보다 많이 저렴하게 싸서 기분이 좋아졌다. (크흑 남들은 여행가면 면세점서 쇼핑 많이 하던데 난 오사카 여행때도 이번에도 딸랑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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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 다 먹을만하니 내릴 때가 되어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한시간 십분정도 소요) 후쿠오카공항은 국내 터미널과 국제 터미널이 나누어져 있는데 국제 터미널은 매우 한산했고, 무료셔틀버스 타고 국내 터미널 가니 복작복작했다. 우리가 갔던 시기가 딱 일본에서도 오봉휴가 시즌이고, 큐슈가 일본사람들이 많이 놀러 오는 곳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저번 오사카 때와는 달리 한국여행객보다 일본 가족단위 여행객이 더 많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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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임에도 내리는 순간 공기가 다르다고 느꼈다. (사실은 그냥 다른 나라 왔다는 거 실감하고 싶어서 공기가 다르다고 나혼자 세뇌시킴) 첫번째로 느꼈던 건 "우와! 날씨 엄청 좋다! 가시거리 거의 200km!!!!" 이거였고. 그 다음은 "아이고 뜨거워" 이거였다. 습도도 높고 무엇보다 그냥 뜨거웠다. 근데 비오는 거 보다가 쨍하고 맑은 거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휴가시작! 이 생각 때문에 더 즐겁기도했고.

간사이 공항에서 오사카로 진입할 때는 꽤 시간이 오래걸리고 지하철값도 비쌌는데 후쿠오카 공항에서 후쿠오카 하카타역까지는 아주 가깝고, 가격도 250엔으로 매우 저렴해서 좋았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데 초등학교 야구부 애들이 모여 있는 걸 봤다. 귀여웠는데 아쉽게도 사진은 못 찍었다.

하카타역에 도착하여 우리는 JR 북큐슈 레일패스를 받았다. 이건 650엔정도 하는 JR 패스인데, 오사카와는 달리 JR로 지역과 지역을 이동해야 하는 여행자에게 아주 강추하는 패스다. 보통 산큐패스 아니면 JR 패스 둘 중 하나를 사라고 하는데 작년 까지만 해도 큐슈 전체를 3박 4일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패스가 우리나라돈으로 약 15만원 정도 했댄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3박4일 정도면 대부분이 북쪽 규슈만 여행하기 때문에 그닥 필요는 없다.(후쿠오카에서 저기 남쪽 미야자키 가는 데만 철도로 5시간 정도)  그런데 고맙게도 올해부터 북쪽 큐슈만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북큐슈레일패스가 생겼다. 우린 새로 생긴 북큐슈 레일패스 이걸 모르고 처음에 15만원 너무 비싸다고 산큐패스 구입할 뻔!!  산큐패스는 시외버스를 무제한 탈 수 있는 패스인데, 우리가 머물렀던 텐진역에 버스센터가 있어서 산큐패스를 샀다면 기차타러 하카타역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은 조금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가끔가다 차멀미를 심하게 하고 처음 타본 JR 은 승차감도 우왕 굳! 이고 북큐슈 레일패스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여권보여주고 패스를 교환 받는데 친구가 일본어로 이런저런 얘기를 잘 해서 별 어려움 없이 패스를 발급 받았다. 그런데 우리 옆에 있는 창구 언니(여자에게 있어 만인의 호칭 언니!!-여자들은 알겠지만 가게에서는 나보다 나이 적어도 언니라고 부르는 경우도 허다함) 는 한국어를 무지 잘하는 언니라 그쪽에는 한국 여행객이 바글바글 했다.
도착하니 10시 정도 되었는데 유후인노모리 라는 이쁜 열차를 타겠다고 오후 2시 30분쯤 떠나는 열차 지정석을 예매 했다. 하지만 이건 지금 생각해도 아주 탁월치 못한 선택이었다. 괜히 시간낭비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여행 사진도 많은 데 결국엔 인천공항에서 하카타역가서 레일패스 받은 데 까지 마무리 짓고 나중에 또 쓰겠다. ; 사실 저번 주 일요일부터 이 포스팅 붙들고 발전을 못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