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일상 2019. 8. 1. 09:43

  7월 25일에 옮긴 병원에서 세 번째 이식을 했다. 첫 번째는 배아를 2개 넣었고, 두 번째는 3개. 이번에는 정말 상태 좋은 배아 딱 한 개를 넣었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이식 후에 유난을 떨지 않았는데, 실패한 이유가 정성을 들이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이번에는 좀 유난을 떨었다. 이식하고 휴가를 3일 하고도 반차를 더 냈고 집에 있는 동안은 배에 담요도 두르고 되도록이면 무리도 안 하고 삼시 세 끼도 다 잘 챙겨 먹고.

  의사선생님께서 긍정적으로 말씀을 해주셔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어제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 들어 임신테스트기를 해봤더니 깨끗한 한 줄이다. 왜 이런 예감은 반전이 없을까.

  배아 이식하고 쉬는 동안 엄마가 시골에서 가져온 반찬을 준다고 집에 오셨는데 아빠까지 같이 오셔서 또 화를 엄청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 가셨다. 딸이 2월부터 임신한 번 해보겠다고 고생하는데 아빠는 다른 거 다 안 보이고 본인 감정만 중요하신가 보다. 아빠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빠가 그렇게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간 후부터 몸이 유난히 가벼워진 기분이라 아빠까지 원망스럽다. 어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오랜만에 가족 만나기 전에는 우울증 약을 평소 두배를 먹고 나간다는 트윗을 썼더라. 내 가족들도 나처럼 나를 만나는 걸 싫어하고 불편해했으면 좋겠다면서. 일생동안 가족만큼 힘을 주는 사람도 없고, 가족처럼 날 미치게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연을 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평생 함께 해야 하는 나의 친족들.

  아빠는 저번 배아 이식 때도 사위 앞에서 술주정을 해서 내가 남편한테 미안하다고 거의 빌다시피 하고, 이번에는 소리 고래고래 지르다 가시고. 엄마 딴에는 몸조리하는 중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오시는 거지만 운전을 못하는 엄마를 데려다주느라 옵션으로 항상 따라오는 아빠 때문에 몸조리는커녕 항상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 된다. 다음에는 시댁에는 말해도 우리 가족한테는 배아 이식 얘기 일절 안 할 생각이다. 요즘에는 차라리 좀 거리감이 있는 시댁이 훨씬 좋다.

  어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평생의 운은 아빠와 단절되게 살게 해 준 남편을 만나는 데 다 쓴 거 아닐까. 하는. 일기에도 여러 번 썼지만, 난 운이 좋아서 뭔가를 이룬 적은 거의 없고 남들만큼 노력해도 그만큼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 편인데, 내 인생에 정말 이렇게 기쁠까 싶었던 일이 남편이랑 결혼한 일이었다. 남편과 내가 고른 집 거실에서 멍하니 TV를 보다가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한동안은 너무 행복했다.

  남편을 사랑하다보니 남편을 닮은 애가 있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하는 생각에 나는 내심 아들을 낳고 싶었다. 딸은 안중에도 없었다. 배아 이식을 할 때마다 내 상상 속의 아이가 있었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공원에 가고, 그네도 밀어주고 남편이랑 아이한테 뽀뽀도 하고 그랬다. 계속 실패하면서도 내 상상 속 아이는 한 번도 사라진 법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 세 번이나 실패를 하고 보니 내가 항상 상상 속에서 키우고 있던 그 아이가 현실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 겁이 났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세 번째 아이와 작별을 하고 눈물을 펑펑 쏟고 누가 봐도 어제 울다 잔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사무실에 앉아 일기를 쓴다.

 


월미공원과 여러가지

일상 2016. 10. 10. 09:36

1. 평일에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면서, 운동을 전혀 하지 않다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진다. 환절기라 ​비염 때문에 점점 더 괴로워서 토요일에 내과에 가 약을 받아왔다.

요즘 친구 만나서 웃고 떠들 기분이 아니고 또 공교롭게도 주말마다 몸이 좋지 않아, 요근래 주말에는 거의 요양하며 집에 있는다.

2. 점점 아빠와 외출을 꺼리게 된다. 아빠가 야외에서 사고 칠까봐 외출해서도 내내 눈치보고 노심초사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아빠와 내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걸 느끼며 안타까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엄마가 많이 아픈데도 전혀 변화 없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더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고 그렇다. 아빠와 최소한의 대화를 하고 최소한 짧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해답인 거 같다. 저번 상담해주시던 선생님 조언대로 아빠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엔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빠다. 하지만 그런 말을 아빠에게 하는 거 조차 힘겹고, 수고스러워 관두기로 했다. 아빠의 병은 일종의 발달 장애니까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바뀔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요즘 들어선 엄마가 아빠의 성격을 왜 평생 참고 사신 건지 원망스러운 기분도 든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도 그 나름의 고충과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엄마아빠가 서로 맞지 않는 걸 인정하고 헤어졌으면 요즘 이처럼 괴로운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다.  

3.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번 주 목요일에는 가족이 주는 행복과 불행 중 대체 뭐가 더 큰 걸까. 하는 생각에 유서라도 먼저 써놔야 되나 싶었다. 엄마가 또 아빠 때문에 또 힘든 일을 겪는다면 정말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4. 토요일에 아빠가 대전에 가셔서 모녀만 집에 남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월미공원에 갔다. 주말에 엄마 데리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아빠만 집에 혼자두기 뭐해서 못갔는데 토요일에는 기회가 좋았다.

바람이 너무 세서 약간 추웠지만,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때문에 엄마도 나도 기분전환 확실히 했다. 오랜만에 토끼들을 가까이서 봤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여워 걔네들 노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도 아빠랑 외출하는 것 보단 나랑 나가는 게 편하실 테니 시간 나면 함께 시간 보내드려야지.. 하고 다짐했다.

5. 여기 쓴대로만 보면 난 인생 포기한 것처럼 사는 것 같지만 의외로 회사 생활 착실히 잘 하고,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한테 우울한 모습도 안 보인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대 단점은 월급인데 이걸 무마할 정도로 큰 장점이 몇 개 있다. 몇 개를 나열하자면, 회식이 거의 없는 점, 야근 없는 점, 전화 응대 적은 점,직원들이 사생활 관련 질문 안 하는 점. 정도? 특히 마지막 장점이 너무 좋다. 전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나에게 했는가.. 정말 끔찍했다. 엄마가 치료 받으시는 동안은 군말없이 지금 회사에 몸 담으며 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엄마가 입원하실 때마다 눈치 안보고 휴가 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 중 하나이니.

6. 저번 주에 노트북이 완전히 고장나서 AS 센터에 보냈는데, 수리비가 14만원이 나왔다. 하드디스크가 완전히 못쓰게 됐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SSD로 교체했는데, 과연 얼마나 좋아졌을지. 돈을 들였으니 앞으로 한 10년은 더 쓰려고 한다.




간병

일상 2016. 8. 20. 23:45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파서 그런지, 내 몸의 변화에 무척 민감하다. 아프기 직전의 느낌도 알고, 열이 날 때도 내 체온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맞는다.

아픈 것이 너무나 싫기 때문에, 나는 몸이 아플 것 같으면 만사 제쳐두고 쉰다. 조금만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사무실에는 상비약이 언제나 완비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 잘 안다니던 사람은 필요이상으로 병에 민감한 나와는 달리 타이레놀 하나 먹는 것도 꺼리고, 병원도 웬만해선 잘 안가는 것 같다.

우리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아무리 병원에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아프면 약 먹으라고 해도 그렇게 완고하게 약을 드시지 않곤 했다.

재작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엄마는 올해 2월 쯤 돌보는 할머니 하나가 너무 증세가 심각하여, 그 할머니를 돌보고 집에오면 방광과 허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며 끙끙 앓았다. 나는 그렇게 아프면 일을 당장 그만두고, 가까운 기독병원 (우리동네에서 가장 예약이 쉬운 종합병원) 이라도 가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는 끝끝내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그리고 올해 초여름부터 무리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 집만 돌봐도 힘든데, 세 집을 돌아다니며, 어쩔 때는 밤 10시에도 부르면 일을 가시곤 했다.
엄마가 쉬엄쉬엄 일을 하나만 해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살 수 있는데, 내가 그렇게 그만하라고 말려도 엄마는 뭐라도 홀린듯 그렇게 돈을 벌려고 기를 쓰고 일을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가 갑자기 필요 이상으로 무리해서 일을 많이 한 건 다 동생의 전화 때문이었다. 6월달 어느 새벽에 성남에서 경찰이 전화를 했다. 난 통성명도 안하는 경찰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직도 그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경찰인지 아닌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여하튼 그 사람은 전화로 당신 아들이 지금 성남 길에서 누워서 자고 있으니 당장 와서 데려가라고 말했다.

엄마는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평생 술을 전혀 드시지 않는 분이었다고 한다. 엄마도 거의 술을 안드시고, 평생 취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엄마는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아빠가 가끔 친구들과 술을 드시면 크게 화를 내시곤 했는데, 제일 아끼는 아들이 그렇게 증오하고 혐오해 마지 않는 술을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길에서 자고 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그날 밤 엄마는 밤새 속상해 하셨다.

사건 다음날 동생과 엄마가 전화를 하는 중에 엄마가 동생에게 왜 그랬냐 물어보니, 동생이 '요즘들어 내가 결혼하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동생이 결혼하기 힘들겠다고 한 건, 작년에 동생이 엄청 좋아해서 3개월 만에 얘랑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던 여자에게 차인 상처가 아직까지도 너무 크고, 걔만한 여자를 평생 못찾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다는 말이었을텐데, 언제나 돈에 열등감을 가진 엄마는 그걸 또 당신이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을 하셨던 거다.

엄마는 동생이 돈이 너무 없어서 결혼 못할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결혼할 때 동생에게 돈 천만원이라도 주려고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했다고 수술 다음 다음날 고백하셨다.

난소암 진단을 받기 한달 전부터 엄마는 열이 며칠동안 계속 나는데도 새벽6시 반부터 밤8시까지 미친듯이 일을 하셨다. 내가 화를 내며 그만하라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들에게 천만원을 주겠단 엄마의 강한 의지를 꺽은 이는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었다.

10년 넘게 계속 다녔던 내과의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침대에 누워보라고 하신 뒤 배를 눌러보고 증세를 보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증세는 간단한 병이 아닌 것 같다고, 당장 인하대병원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외래 예약까지 해주셨다. 엄마는 거기서도 크게 아픈거 아닌데, 꼭 대학병원까지 가야하냐고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내과 선생님이 당장 가셔야 한다고 소견서까지 써주셨다.

그렇게 인하대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 끝에 결국 난소암 진단을 받았고, 대수술 후 이제 항암 1차를 마쳤다. 

20대에 6개월 넘게 엄마 병간호를 했던 경험이 있는 나랑 가장 친한 친구는, 환자 외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아프면 안되는게 병간호의 첫째 조건이라고 이 말 명심하고 안아프게 체력 관리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요즘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아빠와 내가 같이 하고 있지만, 집안일에 요령이 없는 우리 둘은 뭘 하나 해도 엄마처럼 빠르고 옳게 되질 않는다.

제일 힘든 건 삼시세끼를 준비하는 거다. 자취할 때도 미역국 한번 안 끓였던 내가 반찬이나 국을 하며 출퇴근까지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요리책을 세권이나 샀는데, 책에 있는 간단한 재료도 결국엔 마트를 한 번은 가야하고, 마트에서 장보는 걸 싫어하던 내가 간신히 장을 보고 집으로 오면 벌써 어질어질 하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재료도 다듬어야 하고, 요리 한번 하면 설거지는 또 산더미처럼 나온다.

엄마는 이 모든 일을 이제까지 애 키우면서 일하면서 다 혼자 하셨다는건데, 엄마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맞벌이하는 여자들에게 무한한 경외감을 느낀다.

결국 익숙치 않은 생활에 나도 힘이 들었는지, 이번주 내내 미열이 났다. 체온이 참 신기하다. 1도만 높아도 사소한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참 힘이 든다. 열이 나는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는 집안일을 하려니 힘들었다. 엄마 외 아무도 아프면 안되는 게 간병의 첫번짼데, 벌써 첫번째부터 나는 글러 먹은 것이다. 이제서야 내 약한 체력이 후회스럽고, 운동 좀 해놓을걸..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엄마는 항암을 몇 차까지 할 지, 의사도 장담을 못하겠는 모양이다. 다만 3차 마다 검사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하셨는데, 제발 빠른 시일 내 차도가 있어서 길게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이 고되도 엄마를 보면서 내가 힘든 건 엄마의 100분의 1도 안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엄마 수술 부위에 붙어 있던 습식 드레싱을 제거했다. 거의 30cm 에 걸쳐 있는 무자비한 봉합 자국을 보고나니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아주 잠깐 아빠를 원망했다. 아빠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나도 엄마에게 잘해드린 거 하나 없다. 엄마에게 일 그만하라고 화 내기 전에 차라리 그냥 내가 모은 돈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할걸.. 하는 후회가 든다. 어쩌면 내 탓이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 다 쓸 데 없다.

불행에 이유를 찾다보면, 언제나 불행이 확대 재생산 되는 법이니, 엄마가 왜 몹쓸 병에 걸렸는지는 앞으로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다시 느끼는 게 돈으로 해결 가능한 건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부질 없는 그 돈 때문에 엄마가 평생 마음을 졸였다니... 정말 가슴 아프다.

P.S 사실 상 엄마를 살린 건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이다. 엄마가 바깥 활동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면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다. 정말 고마운 분.


말못할 사정

일상 2015. 4. 27. 00:16

누구나 말못할 사정 하나씩은 간직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이런 사정은 불행과 관련된 경우가 많고, 또 서로 자세히 말 안하기 때문에 내 불행의 크기가 남들에 비해 큰 편인지 작은 편인지도 알 수 없다. 설령 내 불행의 크기가 남들에 비해 형편없이 작다고 해도 전혀 위로가 되지도 않고.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한 건 이따금씩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과 같은 우울함의 원인을 내가 알아낸다면 아주 조금은 이 우울함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을 한다. 가족끼리는 무슨 말과 행동을 해도 용서가 된다. 아니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닌 지도 모른다. 어쨌든 죽을 때 까지 봐야하고 연인이나 친구처럼 영원히 안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니까, 덮어두고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면서 살고 있는 부부 혹은 부모 자식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그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무수한 밤을 가족 때문에 울다 잤는지 모르겠다. 내가 심리학을 배우면서 깨달은 바는 가족으로부터 어렸을 때 부터 받은 상처는 극복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결국 어른이 되어 겪는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은 그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나는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죽을 때 까지 극복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 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화목한 가정에서 구김없이 자란 척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연기를 하면서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당연해 지는 게 어른이 되는 걸 수도 있고.

아직도 기대가 큰 내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도 나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데, 누군가에게 구원을 원하고 언제나 이번에도 틀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운이 좋아 누군가가 나에게 큰 사랑을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난 아마도 더 큰 사랑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아무런 기대도 없다면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 기대를 한다는 건 내가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아직은 갖고 있다는 것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다면 어쩌면 한 방에 이 모든 걸 극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결혼을 하긴 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초조해지기도 한다. 그 정도로 큰 일이라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 싶은 거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은 애초에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격이 안되는 거 아닐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도 든다. 불가능한 걸 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나도 내 자식을 울면서 잠드는 아이로 키우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정말 싫다. 이런 생각.


이기적인 기억

단문 2014. 11. 12. 17:11

  어제밤에는 비까지 오는데, 우울한 다툼이 있었다. 

  사람은 나쁜 것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나에게 불리했던 것, 내가 못받은것, 내가 상처 받았던 것, 내가 손해봤던 것 등등. 그래서 명성은 악명을 못 이기는 지도 모르겠다. 

  나쁜 건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건 가족끼리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때로는 아무 문제 없는 척 타인을 기만해야 하는지 ..이 생각하면 가끔 한숨이 나온다. 

  물론 가족이 없는 것 만큼 슬픈 건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가족이 내 모든 걸 다 희생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하는 그 무엇인걸까. 난 잘 모르겠다. 모르겠어... 

  가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군분투 하며 고통 받고 있는지. 과연 가족이 주는 기쁨이 고통보다 클 것인지. 

  나는 가족 은혜도 모르는 못된 여자라 이딴 생각을 업무 시간 중 적고 있는 것인지.


가족의 의무

일상 2014. 11. 8. 23:51

  나는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 날 키워주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생 전체를 볼 때 나도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첫 직장을 그만 뒀을 때, 결국 내가 이 치열한 사회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낙오되었구나 하는 패배의식 때문에 몇 년을 심적으로 방황했다. 난 아마도 오만방자했나보다. 난 언제나 상위권은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당시는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더럽게 능력없던 선배는 내가 관둔 첫직장보다 몇 배는 더 큰 직장에 이직했는데 난 그 회사를 관두고 5개월을 놀았다. 그 악마같은 선배 소식을 건내 들었을땐 정말 분노에 치를 떨었는데... 아마 그 때 그나마 남아있던 내 안의 승부욕이 신기루처럼 저멀리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이 어려웠을 시절,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 엄마 얼굴 한번 못보는는 날이 계속된 적이 있다. 이맘 때 쯤이었던 거 같다. 낙엽이 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했던.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체 혼자 가방을 챙겨 학교에 가고 집에 오면 남동생이랑 놀아주고 그랬다. 아마 엄마는 내가 깊이 잠든 때 들어와서 새벽같이 나가고 그러셨나보다. 아직도 왜 그랬는지 잘은 모르지만...

  하루는 학교에서 알림장에 아빠 싸인을 받아오라고 했는데, 엄마는 커녕 아빠는 못본 지 오래인데 이걸 어떡하나. 나는 진심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그 싸인란에 내가 싸인을 해서 갔다. 당연히 선생님은 아셨고, 니가 했냐고 물어봤지만, 난 그냥 아무 대답도 안했다.

  이런 사소하지만 아직도 생생한 슬픈 사건이 있는 나는 그래도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까지는 엄마가 집에 계셨기 때문에 내동생보다는 덜 우울하다. 내동생의 경우는 초등학교 입학식 조차 부모님 두분 다 일하느라 못가셨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와 동생은 모두 부모님께 감정표현에 서툰 편인데,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부모님께서 일하시느라 고군분투 하는 동안, 우리도 고군분투했다. 우리 둘은 어려운 와중에도 나쁜 길로 안 빠지고 꽤 잘 자란 편이다. 물론 이 모든게 아주 어렸을 적 우리 부모님이 사랑을 쏟아줬기 때문일거다.

  직장을 가진 뒤에도 부모님께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려고 많이 애썼다. 내 월급 대비해서는 절대 적게 드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차라리 엄마 아빠께 돈을 드려야 하는 건 마음이 편하단 생각이 든다.  

  가끔씩 부모님께서 내심 살가운 말과 행동을 요구하실 땐 정말 힘이 든다. 가족끼리 문제 하나 없는 집이 있겠냐만... 만약 내가 결혼을 하여 아기를 낳으면 가끔 내 자식도 나와 같은 문제를 겪을까봐 겁이 난다. 내가 배운적이 없는 건 내 자식에게도 못 가르치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렵다. 세상에서 정말 최고 어려운 것 같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겠지.


서글픈 느낌.

일상 2010. 9. 11. 08:09

내가 웬만한 일에는 눈을 꿈쩍도 안하게 된 사실을 느꼈을 때 나는 조금 서글프다. 오늘 생긴일 만해도 그렇다. 고등학생의 나 같으면 아마 눈물도 엄청 많이 쏟고 밤새 울어서 눈이 퉁퉁 불어선 애들이 내 얼굴을 보고 도저히 무슨일 있었냐고 말을 못 걸정도의 몰골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올랑 말랑 하다가 결국 울지 않았고, 태연히 kbs 1에서 하는 브라질 이라는 다큐도 시청하고, kia 타이거즈가 8회말에 실책을 연발하며 무너지는 경기도 끝까지 시청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주는 상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받는 상처보다 치명적인 거 같다. 난 그래서 친한 친구들이나 엄마나 동생한테 조심하려고 하지만 이게 디게 웃긴게 오히려 남한테는 조심하는데 가족한테는 심한 말을 하고 더 못된 행동을 하고 짜증을 내고 그런다.
오늘도 엄마아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뼈져리게 했다. 가끔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했다가도, 내가 어렸을 때 부터 자라면서 느껴왔던 지금의 감정들을 다시 되돌아보면 두려워 지고 그래서 회피하게 되고 그렇다. 아직 모성애 같은 건 모르지만, 나와 비슷하게 생긴 애가 또 똑같이 상처 받으면서 자라는 걸 옆에서 보다보면 난 아마 엄청 죄책감을 느낄 거다. 이런 걸 보면 난 지독한 비관론자임에 틀림이 없다.
누구나 가족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다가도 정말 밉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그냥 어디로 멀리 떠나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런 건데 어렸을 때의 나는 어떻게 보면 어떤 가정에서나 당연하게 나타나는 일에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일상생활에 타격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게 참 답답했고 불만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크고 나니까 울지도 않고, 아마 내일 회사가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종일 삽질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
좋은걸까? 이런건?
점점 더 인생이 우울해지고 나는 더욱더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민했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엊그제 안과 의사가 내 눈을 다 꼬매버리겠다고 말하는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그게 개꿈이었던 거 같다. 완전 공포스러워서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시체처럼 잠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