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위로 2016. 1. 11. 22:24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배우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찰리 채플린의 전기 영화인 "채플린"에서는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런던으로 돌아온 채플린이 무명시절 같이 공연하며 전국을 떠돌던 첫사랑 배우를 수소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전 이미 죽었고, 이 소식을 들은 채플린은 기차에 주저앉아 슬프게 운다.

내 기억에는 채플린과 그 배우 사이에 특별한 상호작용이 있지 않았다. (오래전 본 영화라 틀릴 가능성도 높음)
채플린은 채플린이 있든 없든 가슴을 거리낌없이 내놓고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화장하며 무대에 나갈 준비를 하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무명 코메디언 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채플린은 그녀를 찾아서 뭘 해주고 싶었을까?
거창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잘살고 있는 걸 보고 싶었을 것 이다.

오늘 퇴근길에도 난 2호선에서 물에 젖은 걸레 마냥 축 늘어져 졸다가 환승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신도림역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다 오르지도 않았는데 볼에 한기가 느껴졌고, 급행을 기다리면서 추위를 참을 수 없어 모자를 뒤집어 쓰고 운동화 앞코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있을 때 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채플린 처럼 관찰자 뿐 이었고, 혼자만 그를 좋아했던 나를 그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차라리 기억을 안해줬으면 좋겠다. 기억을 한다면 아마도 다 내가 지워버렸으면 하는 기억들 뿐일테니.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난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와 그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어떤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난 아직도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좋아했던 것들을 볼 때 마다 못내 울고 싶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조금 나아질 것 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채플린의 기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뭘해야 이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늘밤 나는 또 세상에서 제일 찌질한 사람이 되었다.



지난 화요일에는 회사에서 아주 중대한 나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을 해결하려고 사장님과 면담하고 부장님과도 고민을 했지만, 아무래도 달라질 건 없는 것 같다.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 마다 왜 난 왜이렇게 운이 더럽게 없는가. 하는 생각과 아무래도 이 팔자가 내 인생의 전부인가 보다하는 생각, 이직하면 장 땡이다 라는 생각 등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을 압도할만큼 큰 감정은 바로 수치심이다. 남들은 다들 잘 이겨내는 일에 왜 난 이렇게 괴로워하는가. 난 왜이렇게 약해 빠졌나. 난 왜 충분히 좋은 직장에 가지 못했나.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에 목요일에는 버스정류장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 수치심을 없앨 수만 있다면 뭐라도하고 싶었다.

다행히 이제까지 직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상기하며 이보다 더 심한 일들도 견뎌내고 지나갔다고 억지로라도 이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세뇌하며 정신 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속상하다.

힘든 마음에 좋아하는 소설인 로알드 달의 카티나 를 다시 읽었다. 카티나가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언제나 그렇다. 카티나를 읽고 울지 않을 도리는 없다.

금요일에는 투병 중 인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저녁을 같이 먹었다. 친구도 나에게 아이섀도를 줬는데 색이 마음에 쏙 든다. 내가 선물 받을 입장이 아닌데, 너무 속없이 넙죽 받았나 싶다.

토요일에는 전 직장에서 제일 친했던 대리님의 결혼식에 갔다. 신랑신부 모두 행복해 보여서 흐믓하고 부러웠다. 싱글벙글한 신랑신부와 곱게 차려 입은 친척들까지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가끔 어떤 결혼식은 엄청 우울한 분위기 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결혼식 때문에 전 회사 사람들을 사장님 포함하여 잔뜩 만났다. 다들 나보고 얼굴이 훨씬 좋아졌다고 했다. 그런가…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 뭐 그래도 다행이다. 날 욕보인 그 회사에 약한 모습 보인 건 아니니까.

오늘은 회사에서 실수 연발 이었고 말도 막 헛나왔다. 난 평소 실수 많이 안하는데 한번 하면 큰 실수인 경향이 있다. 다음부터 검토를 잘하는 것 밖에 별다른 수가 없지만, 오늘 또 나에게 실망했다. 역시 사람은 교만하면 망한다.


1. 석회화건염
토요일에 직전회사에서 친했던 대리님이랑 송도에서 맛있는 걸 먹기로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에 왼쪽 손목이 참을 수 없이 아픈거다. 너무 아파서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눈물이 핑 돌았다. 약속을 취소하고 급히 송도의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니 의사가 심드렁하게 석회화건염이라고 했다. (정말 별 이상한 병도 다 있지. 왜 관절에 석회가 생기는 건지.)
이틀동안 극심한 통증때문에 지옥을 경험하고, 월요일 아침에 정식 진찰시간보다 빨리 대학병원에가서 진료를 기다렸지만, 손목전문의가 없다고 1년차 어린 의사는 나에게 그 어떤 처치도 해주지 않았다. 뭔 놈의 병원이 의사 출근날을 가려 환자를 받나 싶었다. 결국 화요일에 다시 가서 특진으로 5만원 넘게 돈을 지불한 뒤 진료를 받았고 왼팔에 반깁스를 했다.
사실 토요일에 비하면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고 깁스 안해도 될 것 같은데 엄마는 이틀이나 휴가 냈으니 아픈 척 해야한다면서 그냥 깁스를 하고 출근하라고 하셨다. 올해 두번째 깁스다.
하는 수 없이 깁스를 하고 오늘 하루종일 독수리타법으로 키보드를 치며 일했다.

2. 왼손과 오른손
4일간 왼손을 못쓰면서 느낀 건 오른손잡이인 나의 오른손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왼손 못써도 밥도 먹고 샤워도 할 수 있고 글씨도 쓸 수 있다.
하지만 왼손을 못쓰니 내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묶을 수가 없고, 화장실에서 한 손으로 바지를 올리고 내려야 했다.
저번에 어깨뼈가 세조각나서 재활하던 언니가 아직도 머리 혼자 못 묶는다며 한탄했는데,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머리를 묶는게 보통 복잡한 행위가 아니다. 한손으로 절대 못 묶는다.

3. 전쟁드라마
휴가기간동안 손목이 아파서 신경질적이 되고, 바깥에 나갈 수 없으니 집에서 티비보다 책보다만 했다. 그러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Band of brothers 를 봤다. (거금 9천원을 결제했다)
철저하게 승자 관점에서 서술된 드라마였다. 드라마 내내 독일군의 입장은 거의 나오지 않고, 미군들은 그 치열한 전투를 겪었음에도 정신적으로 거의 아무 이상도 없다. 대부분 화에 전투신이 나오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끝이 없겠지만, 엄청 재밌긴 하다. 또 보고 싶을 정도. 올레티비의 시리즈는 부상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해줘서 좋았다.

나는 생긴 것과 전혀 어울리지않게 전쟁 영화를 좋아했는데 한동안 시들하다가 워호스 본 뒤로 전쟁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에 다시 불이 붙었다.
요즘 읽는 책도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이다. 화기와 비행기, 전차의 나라별 모델에 대한 설명이 너무 많아서 막 재밌진 않지만 꽤 읽을만 하다.
The pacific 이 Band of brothers 의 후속이라는데 선뜻 볼 용기가 안난다.
Thin red line 이라는 태평양전쟁을 다룬 영화를 어렸을 때 봤는데, 정말 충격이 컸다.
한국인과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군이 나오니 유럽전선을 다룬 여타 영화에 비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잘은 몰라도 홀로코스트를 제외하면 전투 중 잔인하고 끔찍했던 건 태평양전선이 유럽전선보다 더했음 더했지 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든 전쟁이 악마적인 건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의 모든 걸 혐오하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걔네들한텐 정이 안간다. 오키나와와 우리나라에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보고 들을 때 마다 치가 떨린다.

4. 송년회식 장소
회사에서 송년회 때문에 죽을 맛이다. 내가 예약을 맡았는데 어딜 정해도 100% 만족은 없을테니 제발 그냥 내가 정하는대로 따라와줬으면 좋겠다. 장소 때문에 거의 3주째 갈팡질팡 중 이다.

5. 볼 영화들
007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새 영화 두개다 보고싶다. 마션은 결국 티비로 보게 될 것 같다. 여담이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돌아가시면 슬퍼서 울 것 같다. 그의 모든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내가 본 모든 그의 영화는 모두 지극히도 영화적 이었다. 존경한다. 또 워호스 얘기를 하게 되지만 그 누가 말의 시각으로 유치하지 않게 전쟁 영화를 그렇게 감동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싶다.


고모의 답장

단문 2015. 10. 30. 19:13

고모는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셨다. 공부를 잘했지만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고, 전국을 돌며 밤무대에서 피아노를 치다 돈 한푼없이 독일에 가셨다고 한다. 평일에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는 독일 부자집 청소를 해주며 돈을 벌었고, 마침내 늦긴 했지만 결혼을 하여 베를린에 정착하셨다.

고모가 내 인생을 얕잡아 보지 말라고 답장을 주셨다.
바보같이 메일을 보다 울었다. 그렇다. 특별할 거 없고 재미도 없는 내 인생을 이제까지 나는 계속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지 말아야겠다. 내가 날 얕잡아보는 데 누가 날 인정해주겠으며 어떤 좋은 일이 나에게 찾아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