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
국내도서
저자 : 안똔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 석영중역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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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운 여름에 이 소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가 이 소설의 주인공 '니콜라이' 처럼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볼 때, 눈부신 시절로 기억할 수 있는 때가 몇이나 될까? 나에겐 한순간도 없을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내 인생의 최고의 시절은 아직 안 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고 보니 내 인생 좋은 시절은 아직 안온 것이 아니라, 그냥 영원히 안 오는 것이고 내가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그 시절이 어쩌면 내 인생의 절정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설령 눈부신 시절이 있었다고 한들 늙고 병든 자기의 노년 시절을 마냥 즐겁고 흐믓하게 보낼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존경받는 의대 교수이자 고위급 3등 문관으로 살고 있는 '니콜라이'는 병이 들어 죽음을 앞둔 노인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아내 '바랴'도 아이스크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딸 '리자'도, 애정을 다해 친딸처럼 기른 친구의 딸인 '까쨔'도 모두 니콜라이가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모두 흉측하게 변했고, 예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니콜라이는 변해버린 그들이 어색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바로 자기 자신이 점점 흉하게 변해가는 것을 끊임없이 자책한다. 가족은 물론이고 맘씨 좋은 동료교수 '미하일 표도로비치'도 자기의 교수 자리를 물려받을 조수 '뾰뜨르 이그나찌예비치' 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일 뿐이고, 니콜라이에게 위로가 되긴 커녕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조차 괴로울 뿐이다. 

  남겨진 인생에 대한 남루함을 끊임없이 토로하는 이 소설은 가슴이 아리지만, 제목처럼 지루하지만은 않다. 체호프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을 읽다보면 주인공 니콜라이의 인생에 진심으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인생이란 나중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외롭고 비루하고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세상 누구에게도 엄청나게 큰 기쁨도 슬픔도 되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니콜라이 같은 사람도 그 누구라도 결국... 결국, 인생은 슬픈 것일까!!

  이런 생각에 '지루한 이야기'를  다 읽고나선 결국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대체로 식사 후 부터 한밤이 될 때까지 사이에 나의 신경성 흥분은 극에 달한다. 나는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는다. 이 시간이면 누군가 방에 들어올까봐 두렵고 갑자기 죽을까봐 두렵고 내 눈물이 부끄럽다. 전반적으로 내 영혼 속에 무언가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이 든다. 더이상 램프도 책들도 마룻바닥 위의 그림자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참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거칠게 아파트에서 끌어낸다.


-p.57


  "바람결에 저 멀리 어딘가 술집에서 손풍금 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담장을 따라 달려가는 뜨로이까 썰매의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도했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가슴뿐 아니라 심지어 위장과 다리와 팔까지 행복한 감정으로 가득 찼어.……손풍금 소리와 멀어져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상상 속에서 내가 의사가 되는 그림을 그려보았어. 그럴 때마다 매번 더 멋지게 그렸지. 그리고 자, 봐, 내 꿈은 실현되었어. 나는 내가 감히 꿈꾸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어. 30년 동안 나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고 탁월한 동료들을 알고 지냈고 찬란한 명성을 만끽했어. 나는 사랑에  빠졌고 열정적인 사랑 끝에 결혼했고 아이들을 가졌어 한마디로 말해서 뒤를 돌아보면 내 인생 전체가 재능있는 손끝에서 창조된 아름다운 예술품 처럼 느껴져. 이제 내가 할 일은 그저 피날레를 망치지 않는 일 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답게 죽어야만 하지. 만일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닥쳐온 위험이라면 나는 그것을 교사이자 학자이자 그리스도교 국가의 시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맞이해야 되겠지. 즉 용감하고 평화로운 영혼으로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지금 피날레를 망치고 있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너에게 손을 내밀며 도와달라고 애원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그냥 빠져 죽으라고, 그게 순리라고 말하고 있어."


-p.63-64



  그런데 이 소설, 내내 슬프기만 하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중간중간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게 되는 부분도 많다.


  우리 집에서는 나와 아내와 딸 외에도 딸아이의 여자 친구 두세명, 그리고 리자의 숭배자이자 청혼자인 알렉산드르 아돌포비치 그네께르가 함께 식사한다. 그는 30세를 넘기지 않은 금발 청년으로 중키에 어깨는 떡 벌어지고 몸집은 상당히 투실투실한 편이다. 귀부터 나 있는 붉은 볼수염과 왁스 칠을 한 콧수염은 그의 우둥퉁하고 반질반질한 얼굴에 일종의 장난감 같은 인상을 더해준다. 그는 화려한 색상의 조끼에 짤막한 재킷, 허리께는 풍성하고 발목 쪽은 매우 좁은 커다란 체크무뉘 바지를 입고 노란색 단화를 신고 다닌다. 두 눈은 새우 눈깔처럼 볼록하고 넥타이는 새우 꼬리와 비슷해서 이 젊은 녀석의 존재 전체에서 새우 수프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p.49


: 새우 눈깔, 존재 전체에서 새우 수프 냄새ㅋㅋㅋㅋㅋㅋ (이 부분 읽고 한동안 이 닦다가도, 세수하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아내와 하인들은 "저분이 바로 그 약혼자이셔" 라며 의미심장하게 속삭거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를 보면 내 식탁에 줄루족이 앉아 있기라도 하듯 당혹스럽다. 마찬가지로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기만 하는 딸 애가 저 넥타이와 저 눈깔과 저 흐물거리는 뺨따귀를 사랑한다는 것이 사뭇 이상하기만 하다……


-p.51


: 흐물거리는 뺨따귀.......


  "아까 강의를 마치고 가는데 글쎄 층계에서 저 늙은 멍청이 NN을 만나지 않았겠어요. 그 양반 늘 그렇지만 그 말 주둥이 같은 턱을 쑥 내밀고 걸어가면서 두리번거리더라고요. 자기 편두통이랑 마누라랑 자기 강의 안 듣는 학생들 욕을 하고 싶어서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던 거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 양반이 저를 본거 같더라니까요. 이제 저는 망한거지요. 끝장이 난 거지요……"


-p.65


: 가끔 나도 회사에서 미하일 처럼 나는 망했지요. 끝장이 난 거지요 같은 기분 느낀다. 이 문장도 너무 웃겼다.


  내 현재 기분으로는 그와 딱 5분만 같이 있어도 영겁의 시간 동안 함께 있어온 것처럼 지긋지긋하다. 나는 그 비참한 인간이 싫다. 그의 조용하고 고른 음성과 책 읽는 듯한 말투는 나를 잠재우고 그의 이야기는 나를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든다. 그는 나에 대해 오로지 가장 훌륭한 감정만을 품고 있으며 오로지 나를 즐겁게 해주겠다는 일념에서 주절거리지만 나는 그 댓가로 마치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한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러나 그는 나의 정신적인 암시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머문다, 머문다, 머문다……


-p83


: 물러가라고 속으로 세번이나 생각했는데도 안 물러간다. 머문다 머문다 머문다 도 세 번씩이나 쓰신 체호프님.


 

또 한 군데 감탄한 부분이 있다. 동료 교수 미하일은 까쨔를 사랑하고 있는데 체호프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나는그의 눈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을 알아차렸다. 그가 까짜한테서 컵을 받아 들 때, 혹은 그녀의 말을 경청할 때, 혹은 무언가를 가지러 방을 나서는 그녀를 눈으로 뒤쫓을 때, 그의 시선에서 온순하면서 애원하는 듯한, 그리고 순수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p.62


P.S 쓰다보니 너무 많이 내용을 발췌했는데, 창비에서 뭐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 정말 이 소설 특이한 소설이었다. 나를 이렇게 웃겨놓고 막판에는 그렇게 눈물을 쏙 빼놓다니. 체호프를 사랑할 수 밖에.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국내도서
저자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 이항재역
출판 : 에디터(editor) 20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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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졸업을 앞두었음에도 정규직 취업에 실패한 나는 2007년 2월 1일부터 어느 은행 소속의 연구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아직 비정규직법이 발의 되기 전이라 연구소 내에는 많은 계약직들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는 연구소의 계약직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약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관계가 비좁았던 난 누군가에게 조언 한마디 듣지 못하고 갑자기 사무직 근로자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몰라서 저지른 황당한 일도 꽤 많았던 거 같다. 그 사람들은 날 보면서 아마 '역시 쟤는 여기 있는 우리들보다 질이 떨어지는구나..'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안했는데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연구소의 사람들은 듣기만 하고 실제 접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그 곳의 사람들은 다들 악의 없고 친절하긴 했지만 매일 느끼는 그들과 나 사이의 어마어마한 괴리 때문에 난 별안간 슬퍼지기도 했고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향했다. 

  내 업무는 높으신 연구소 분들이 하지 않는 일이었다. 감히 그 분들 손에 더러운 토너가 묻으면 안되니 토너도 갈아주고, 수고롭게 무거운 다과와 음료수를 직접 구매할 수 없으니 지하 매점가서 다과랑 음료수도 사놓고, 우편물도 분류하고, 도서관에 책 반납하고 뭐 그런 일들 말이다. (당시 경험 때문에 난 지금도 복사기, 프린터의 웬만한 고장은 혼자 뚝딱 고치는 편이다.) 난 초등학교 5학년 짜리도 아무 문제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별 불만도 없었다. 말했다시피 자존감이 워낙 바닥을 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지금 하는 일이 나한테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집단에 좀 오래 있다보면 그 곳에 속한 사람들을 분류하게 되고 나름대로 각 집단의 사람들을 정의하며 심지어 가치판단까지 하게 되는 법이다. 나쁜 버릇이지만,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리 된다. 몇 개월 정도 지나니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했고,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책상 위에는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피규어가 주르륵 세워져 있었고, 그 사람이 제출하는 직원 복지비로 청구할 도서 구입비 영수증은 대부분 일본 현지에서 산 만화책의 영수증 이었다. 그 직원은 남한테 자기 일을 시키는 법이 없었는데, 워낙 책임감이 투철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남에게 쉽게 부탁을 못하여 결국 자기 혼자 모든 일을 하고 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어떤 종이와 칼을 들고 내 책상에 왔다. 그는 엄청 망설이며 이 프린트물은 자기가 쓴 보고서 설명회 초대권인데 자기는 아무리 해도 똑바로 못 자르겠다며 시간나면 잘 좀 잘라달라고 했다. 종이와 칼을 든 그의 손을 보니 너무 크고 손가락이 둔해보여 예리한 칼질을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시위대를 뚫고 퀵서비스 기사가 건내주는 서류를 들고 오라는 심부름도 아무 문제 없이 수행하던 내가 그 정도 칼질을 못할 리가 없었다. 받자마자 다 해서 가져다주니 그 사람은 너무 황송해 하며 고마워했다. 썩 잘 잘리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이렇게 똑바로 칼질을 할 수 있느냐며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고 나의 칼질 실력에 대해 거듭 칭찬했다.

  그렇게 안면을 튼 뒤로 그 사람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는 그 사람은 다른 연구소 직원들과는 달리 인천 어딘가에서 장사하는 부모님을 두었다는 것과 (그 연구소 근무하는 사람들 아버지는 대학 총장이거나, 국회의원, 어떤 회사 사장이거나, 뭐 기타 등등 이었음) 두번째는 서울대 모과를 수석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지속하지 않고 그 사람 기준으로는 매우 누추한 그 곳에 취업을 한 괴짜라는 것 이었다.

  별 거 아닌 일에 심하게 고마움을 표하고, 내 나름대로 별로라 판단한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그 사람이 계약직 근로자들을 회집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워낙 돈 잘 버는 사람들이고 연구소에 예산이 넘쳐나서 그런 식으로 비싼 밥을 얻어먹는 일은 흔했다. 그런데 그 회식은 다른 때와 달리 마음이 참 편안했다. 내 글쓰기 실력으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연구소의 다른 사람들에게 느꼈던 우리를 향한 은근한 무시 같은 게 없었달까. 기회다 싶어 회집에서 궁금한 걸 물었다.

  "서울대 모과 수석 졸업하셨으면 더 공부해서 교수하거나 재경부나 한국은행도 갈 수 있지 않아요? 왜 여기에 취업하셨어요?"

  "저는 놀고 먹으려고 여기 취업했습니다. 여기 사람들 다 편히 일해요. 한국은행가면 야근하고, 재경부 가면 일 빡세고 공부는 더 하기 싫고, 그래서 전 여기서 놀고 먹으면서 편히 살 거예요."

  연구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국가에 굉장히 중대한 일이며 또 자기네들만이 그런 우아한 일을 할 자격이 있는 듯 행동하고 말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창구 '애들'이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곤 대출 서류에 도장 찍는 것 밖에 없다며 비웃었다. 그런데 연구소에서 가장 잘난 사람일 수도 있는 사람이 대놓고 연구소 사람들 편히 놀고 먹는다고 하니 어쩐지 통쾌했다. 

  그 해 7월말 난 정규직에 취업했고, 당연하게도 연구소의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다. 10년 전 연구소 월급 통장으로 만들었던 은행 통장은 현재 엄마 보험금을 관리하는 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며칠 전 보험금으로 가입했던 예금의 만기가 다가와 오랜만에 은행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사이트 게시판에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클릭해서 확인해보니 어떤 보고서였고, 보고서에 적힌 이메일 아이디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름인 것을 보아 틀림없이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 쓴 보고서가 맞았다. 이 발견 때문에 그다지 즐겁지 못했던 10년 전을 회상했고, 읽은 지 좀 오래된 체호프의 '바다에서' 라는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오히려 가장 고귀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젊은 선원은


  사람은 대개 추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선원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추악하고, 심지어 가장 추잡한 짐승보다도 더 추악해진다. 짐승은 본능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인생을 잘 모르는 내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원들에겐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미워하고 욕할 이유가 많은 것 같다. 언제고 돛대에서 떨어져 파도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 있고, 물속에 빠지거나 거꾸로 떨어질 때만 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뭐가 필요하겠는가?

- p. 9~10


  라고 말하며 나를 포함한 동료 선원들이 짐승에 가까운 추악한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배의 선원들은 승객 중 고매해 보이던 영국인 신부나 점잖던 신혼부부의 남편에 비하면 순수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인공인 나는 다른 선원 한명과 함께 신혼부부가 있는 선실을 훔쳐보다 그들의 어떤 행동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엿보기 위해 뚫어놓은 선실 벽의 구멍에서 황급히 눈을 떼버리고 만다. 옆에 있던 선원은 넌 이런 걸 보기엔 너무 어리다며 주인공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간다.


  10년 전 연구소의 그 사람을 보며 느낀 것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그는 본인은 지금 놀고 먹고 있으며 나 뿐 아니고 다른 사람도 다 여기서 놀고 먹는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사람은 보고서를 제일 많이 쓰고 웬만한 일은 혼자서 다 하는 연구소에서 제일 '안'놀고 먹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이트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발견한 뒤 반가운 마음에 10년 전에 연구소에서 잡일을 하던 저에게 친절 배풀어 주신 것 지금이라도 감사드린다고 메일을 보냈다.

  예상했던대로 그 사람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역시 예상대로 너무 친절했다.


폐기물

일상 2017. 4. 9. 22:44

  인정하기는 싫지만, 요즘의 나는 산업 폐기물 같다. 내가 오물까지는 아니어도, 폐기물에는 꽤 가깝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요즘에는 인간관계도 거의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 않지만,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면 폐기물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요즘 나는 정말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의무감에 일요일 오후에는 산책을 나간다.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엄청나게 슬퍼지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때문에 꽃이 피어도 예전처럼 예쁘지가 않다. 슬픈일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지고 있다.

 

  저번주 부터는 프로야구가 개막해서 TV 를 틀어도 좀 덜 심심하고, 다음주에는 콜드플레이 콘서트에 혼자 간다. 우리집에서 너무나 먼 송파까지 가야하고, 콘서트 시작 시간이 너무 늦어서 끝나고 돌아올 일이 걱정이었는데, 그냥 속편히 송파에서 가까운 하남 친구네 집에서 하루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근데 일요일에 하남에서 대중교통으로 어떻게 집으로 와야할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든지 해야할 것 같은데, 동서울터미널에 버스가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집은 인천터미널에서도 한 40분 걸린다. 이런 젠장. 결국 전철이 답인가. 근데 송파에서 인천까지 전철로는 도저히 못올 것 같다. 뭐 아무렴, 어떻게든 와지겠지. 그래봤자 수도권.

 

  저번주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는 내 우울의 원인이 모두 애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친구는 애인이 생겨서 행복한 모양이다. 안그러면 나에게 모든 원인이 '애인' 이라고 말하진 못했겠지. 그 친구 가끔 너무 돈을 밝히고, 돈 없는 남자는 사람 취급을 안해서 거리감 느꼈는데 정말로 돈 많은 애인을 사귀니 오히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멸시' 같은게 좀 덜해지고 마음이 좀 여유로워졌다.  

  근데 난 사람의 근본은 변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속이 썩은 내가 남자 하나로 언제나 즐거운 내가 될 수 있을까? 글쎄. 뭐 이건 애인 생길 일 없으니 별로 고민할 일은 아닌가. 훗.

 

  엄마가 건강해지신 거 같긴 한 게, 늙은 주제에 너 좋다는 남자 싫다고 하지 말고, 좋다고 하면 무조건 감사히 마음 받아야 한다는 강요와 구박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생까지 합세해서 듣고 있다보면 나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죽을 죄를 진 기분이다. 나는 폐기물인데 소각되거나 처리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게 안되고 있으니 부모님 답답한 마음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가족들이 보기에도 내가 이런데, 제 3자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한심할지.

 

  일기에서 너무 징징대는 거 스스로 읽는게 괴롭긴 하지만, 난 요즘 지인 혹은 가족에게는 즐겁게 사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엄청 노력하고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하니... 그리 큰 문제는 안되겠지. 하며 이 일기의 우울함을 변호하고 싶다.

 

  요즘 Ben folds 의 So there 앨범을 누워서 멍하니 듣는 일이 많은데, 참 위로가 많이 된다. 그리고 우연히 듣게 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도 좋다. 모차르트 음악은 Major(장조)여도 어딘지 모르게 병적이고 슬픈 느낌이 든다. 놀랍게도 터키행진곡 이라 불리는 피아노 소나타 no.11 도 Major. 모차르트의 곡은 언뜻 들으면 산뜻한 곡들 마저도 일말의 정신병적 나른함이 있다. 

 

  난 정말로 음악과 문학의 힘으로 간신히 살고 있다. 저번주에는 좋아하는 체호프 님의 '마녀'를 읽다고 혼자 킥킥대며 잠들었다. 그리고 한 3일동안 아래 문장이 생각나서 즐거웠다.

 

 

  사벨리는 주인공 여자의 못생긴 교회지기 남편인데, 눈보라 치는 어느 날 밤 길을 잃은 잘생긴 금발 우편배달부가 집에 불쑥 찾아온다. 교회지기의 부인은 넋을 잃고 잠든 미남 우편배달부를 쳐다보는데, 그를 보다못한 '사벨리'는 우편배달부의 얼굴을 천으로 가려버린다. 그 뒤에 나오는 부분이 저 부분.

  우울한 와중에도 어찌나 웃기든지. 회사에서도 '칠면조' 같은 두 다리. 이 부분이 생각나서 혼자 킥킥댔다.

 

  나의 문학적 저변이 더 넓어지지 않고 있어서 좀 걱정이다. '체호프' 책만 너무 반복해서 읽고 있다. 체호프 외 다른 작가의 책을 읽으려고 해도 재미가 없다.

 

  요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저도 세상에 온 이유가 있고, 쓸모가 있겠지요. 하고 자꾸 묻고 있다. 대체 뭘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 폐기물이 되라고 이 세상에 보내신 건 아닐 것 같은데. 이런 생각 하는 게 사실은 부모님께 하나님께 참 죄스러운 일이다. 자기 전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 같다.



  금요일 밤인데 침대에서 혼자 책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혼자 피식 웃었다. 귀엽다. 정말.... 즉사했다니.


요즘 셜록홈즈 시리즈만 읽다가 오랜만에 체호프의 단편 소설을 읽었다.
마녀 라는 소설인데, 체호프는 19세기 러시아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아름다운 남자에게 매혹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이유를 참 간단명료하게 써내는구나. 싶었다.
또다른 단편 "사랑에 대하여" 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같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는 유부녀지만 참 가련해보이고 그런다…
보수적인 시대였을텐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멋져. 역시.


읽기의 즐거움

단문 2014. 6. 27. 23:28

  스무살 이후로 책을 현저하게 적게 읽으면서 그 이후로 읽은 소설에 큰 감명을 받지 못하였다. 물론 몇 개의 책을 좋아하고 다시 읽기도 하였지만, 어렸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 며칠간의 시달림 같은 건 정말 다섯손가락에 꼽을 만큼도 안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읽은 딱 3장짜리 소설 안톤 체호프의 "바다에서" 라는 소설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기뻤다. 아 32살이어도, 이렇게 소설에 감명 받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가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선원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었고, 고결해 보이던 목사는 천하의 더러운 놈이었다. 본인이 추악하다고 인정하는 인간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순수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은 지 한달 넘은 거 같은데, 아직도 자기 전에 소설 속 좋아하는 문장을 읽고 다시 감명받고 그러고 있다.

  정말 좋은 소설이다. 3장 밖에 안되는 게 놀라울 따름. 단 3장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위대하신 나의 체호프님.


http://youtu.be/jJp3kVelU3c

 

  요즘 듣는 두 곡은 무척 분위기가 다르다. 어느 날 퇴근길, 언제나 처럼 울적한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운전하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마음에 쏙 드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내가 모르는 노래였다.

  난 선곡표를 검색한 뒤에야 이 곡이 Phoenix 라는 밴드의 If I ever feel better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밴드의 다른 곡도 좋은 게 있나 앨범을 검색해서 들어봤는데, 애석하게도 이 곡 말고는 좋은 곡이 없었다.

  이 밴드 프랑스 밴드라서 그런건지, 영어로 노래하는데도 이상하게 프랑스어 같은 분위기가 난다. 

  다른 곡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 곡 만큼은 요즘 푹 빠져 있다. 2014년 1월의 가장 큰 쾌거는 이 곡을 알게 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때문에 난 이 곡을 안 뒤로는 하루에 2번 이상 듣고 있다. 산책할때 운전할 때 책 읽을 때 아무때나.

 

  항상 일요일마다 억지로라도 산책을 나가려는 이유는 우울해서다. 그냥 일요일은 요일의 성격 상 우울할 수 밖에 없다. 일요일이 토요일이 되지 않는 이상 아마 죽기 전까지 일요일은 우울할 것 같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설 연휴도 끝나고 2월은 우리 회사에서 제일 바쁜 달 중 하나니까, 각오도 크게 해야 하고 해서 오늘도 5시 30분이 넘어서야 산책에 나섰다.

  아주 미세하지만, 조금씩 해가 길어지는 게 느껴진다. 해가 길어짐을 체감할 때마다 항상 기분이 좋았는데 이상하게 2014년 들어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봄이 오더라도, 또 그렇게 몇개월 나이만 들겠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이건 만 30년동안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IPTV 를 단 이후로 주말마다 영화를 2편 정도는 보는 것 같다. 친구를 만나고 들어와도 밤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일요일 낮에도 또 보면서, 정말 정말 좋은 영화도 많이 봤다. 좋은 영화는 내 기억 속에 남기고 싶어서 감상문도 쓰고 싶고 그런데, 시간을 못냈다.

 

  요즘 듣는 두번째 곡은 다소 난감한 뮤직비디오의 Begging you 다.

 

http://youtu.be/S1Ke19kxGp8

 

  내가 요즘 관심 있어하는 영국 작가가 좋아하는 밴드라고 해서 Stone roses 의 곡을 찾아 들었는데, 다른 유명한 곡들 보다 이상하게 난 이 곡이 마음에 쏙 들었다. 몇 년도에 발표된 곡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발표 됐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적인 곡인 것 같다. 반복되는 멜로디도 무척 중독되고.

  저번주에 토요일 학원가는 길에 용산행 급행 전철 안 에서 완전히 잠이 들어서, 종점까지 쿨쿨자다 어떤 아저씨가 흔들어 깨워주셔서 간신히 일어났다. 이 곡은 이런 상황일 때 좋다. 졸리고 몽롱할 때 잠 깰때. 그래서 이건 토요일 아침에 주로 듣고 있다. 시청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면서.  

 

  30살이 넘고 보니, 20대의 내가 왜 그렇게 시간을 보냈는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런데 현재에 그 이유를 대입해보면 또 나는 잘 모르겠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정말 사람에게는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는 것 같다.

 

  하긴 사실 이건 핑계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노력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거 아닐까. 알면서도 역시 노력하고 싶지 않으니, 다시 언제나 제자리거든.

 

  또 쓰지만, 지금 내 심정을 표현하자면 체호프의 소설 속 문장을 인용 할 수 밖에 없겠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으로 괴로워했으며, 이렇게 빠르고 재미없게 흘러가는 내 삶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나는 항상 이렇게 무거워진 내 마음을 가슴속에서 뜯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 다락이 있는 집 중에서.


  밑에 주류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에 대한 독설을 퍼부었지만, 사실 내가 진짜 쓰고 싶었던 건 비주류 강박에 대한 이야기다.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나서 본인이 대한민국의 중산층이며 내가 정상이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밥맛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재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결론은 그냥 다 싫다는 건가. 흐흐.

  '다락이 있는 집'에 있는 구절을 배껴 적느라 그 책을 내 노트북 옆에 갖다 놓았는데, 매번 읽던 구절 말고 그 앞을 다시 읽고 있다. 다시 읽어도 정말 주옥같은 소설이다.

  가령 이런 구절 말이다.

 

보통 나는 테라스 아래층에 앉아 있곤 했다. 당시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으로 괴로워 했으며, 이렇게 빠르고 재미없게 흘러가는 내 삶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나는 항상 이렇게 무거워진 내 마음을 가슴속에서 뜯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된다. 소설가가 다른 게 아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정확히 표현해주는 사람이라는 걸 어디선가 봤는데, 난 소설가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안톤 체호프 처럼 표현하질 못하겠다. 하지만 체호프 같이 훌륭한 사람이 대신 표현을 해주고 그걸 또 읽을 수 있으니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이 소설을 보면 미슈시의 언니 리다가 나온다. 리다는 부족할 것 없는 러시아의 꽤 높은 직의 공무원으로 일했던 아버지를 둔 훌륭한 가문의 딸로 나온다. 하지만 리다는 항상 민중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민중의 현실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회운동을 한다. 극 중 화자는 정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며 예술을 사랑하며, 단지 리다의 동생 미슈시를 사랑할 뿐인데, 리다는 그런 극중 소설의 화자를 경멸한다. 그래서 항상 리다와 주인공은 논쟁을 하게 된다.

 

" 전 예전에 그런 얘기들을 들으 적이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만 당신께 말씀드리죠. 그건, 우리가 이렇게 손놓고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옳아요. 지식인의 가장 고결하고 성스러운 과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이쓴 만큼 봉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물론 당신 마음엔 안들겠지만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들 순 없잖아요? "

 

  위 대사는 주인공과 리다가 논쟁하는 중에 리다가 한 말인데, 저 말로 리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저걸 보면서 트위터에서 한국의 정치와 미래에 대해 자신들이 꽤나 선각자가 되는 양, 자기들이 주장하는 게 진리이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투로 본인이 꽤나 배운 지식인 인 거 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본인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말이다. 또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주는 척 하는데, 그러면서 또 나이 든 사람들의 의견은 얼마나 무시하고 자신들의 젊음을 또 얼마나 과시를 하는지. 정말 대책이 없는 부류들이다. 

 

  아마 오래전 러시아에도 저런 부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난하게 살며 단지 돈 벌기 위해서 단시간내 무지하게 많은 글을 썼던 (하지만 천재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후의 명작들을 써낸) 체호프 가 느꼈던 감정이 어땠는지 이 소설을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이런 비주류 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소수의 편을 열혈적으로 지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외에 뭔가 자신의 삶은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어떻게 보면 비주류가 되려고 무지하게 노력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고,  또 자신은 참으로 개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남들과 잘 섞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인양 은연 중에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도 항상 경계를 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취향이 좀 특이하고 뭔가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할 권리는 없다. 또 자신이 좀 배웠다고 해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거다. 다수의 의견에 따르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무시할 권리도 없는 거다.

 

  철딱서니 없이 주변에 민폐 끼치면서 난 내 꿈을 이루겠다 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 못한 게 아니라는 거다. 꿈을 포기하는데는 그만한 용기가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하다. 못나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평범히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끈금없지만 프란츠 카프카도 당시에는 그냥 평범한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하는 직장인이었지만, 지금은 위대한 소설가 아닌가? 평범히 살고 있는 사람들도 비범할 수 있는 거다. 단지 모를 뿐이지.

 

  결론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길을 충실히 걷고 있다는 것 하나로  남을 무시해도 재수 없고, 자신이 꽤나 비범하다는 착각으로 개성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하나로 남을 무시해도 재수 없다는 거다.

 

  난 그냥 그렇다.

  "내 삶이 특별했으면 좋겠다, 뭔가 재밌는 일이 계속 계속 벌어졌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우와~ 했으면 좋겠다." 이런 욕심도 없다.

  또 "요즘 어린 것들 쯧쯧쯧", 혹은 "정신 못차렸다, 예의 범절이 없다, 개념이 없다." 는 둥 이런 재수 없는 꼰대같은 말을 하는 나이든 사람이 되는 것도 싫다.

 

   생각해보면 난 취향은 비주류 쪽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또 비주류 안에서의 주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비주류 들이 모여 있는 중에서도 큰 주류가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 오타쿠는 사회에서 비주류지만, 오타쿠 내에서도 주류가 있는거다. 예를 들면 건담 오타쿠, 에반게리온 오타쿠는 그들 내에서는 엄청난 주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난 에반게리온 때문에 쫄딱 망한 에스카플로네를 좋아했었지 크크킄)

   또 난 락을 무지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비주류라고 볼 수 있는데, 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는 또또 그 사람들 나름대로 룰 같은 걸 만든단 말이다. 예를 들면, 락은 현장에서 스탠딩으로 방방 뛰면서 소리지르면서 봐야한다. 고 하는 거 말이다. 왜 그렇게들 말하고 주장해야 되냐는 말이다. 공연 가서 제대로 못 놀면 바보. 이런거 말이다. 대체 왜 그래야 되냐는 거다.

  난 아무리 엠프에서 큰 소리가 나도 이성이 잃어지지 않고 방방뛰면 땀나고 힘들다. 근데 또 그렇게 비주류인 사람들 조차 나같은 사람은 촌스럽다고 제대로 못 논다고 무시를 하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다.

 

  술도 안마셨는데 이런 고등학생이 쓸 법한 일기를 쓰는 이유는...이게 다 "다락이 있는 집"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만 29년 동안, 평범과 특별함 주류와 비주류 사이를 오가면서 그냥 그렇게  꽤 재밌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개소리나 지껄이는 일기 쓰면서 말이다. 휴.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냉소적이라는 건가.

  보통 이런 일기는 나중에 읽어보면 엄청 쪽팔리고 쥐구멍 있으면 숨고 싶은 기분이 드는 법인데, 다신 읽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