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봄봄봄 1편

일상 2017. 5. 1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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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콜드플레이 콘서트 끝나고 하남 사는 친구네 집에 갔었다. 원래는 그냥 집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9호선 줄이 계단까지 늘어져 있고, 늦게라도 9호선을 탄다 한들, 노량진에서 1호선 막차를 놓칠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옷이랑 세면도구를 챙겨오긴 했던 참이라, 잠실에서 하남까지 버스타고 갔다. 친구가 하남에서 잠실 가깝다고 하남도 살 만 하다고 했는데, 내 기준에서는 엄청 멀었다. 그리고 하남까지 가는 파란 버스 배차간격은 왜 그리 길든지. 우여곡절 끝에 버스에 탑승하여 여행하는 기분으로 바깥 풍경을 보는데 비싸다는 동네 지나갈 때는 과연 쾌적함이 느껴졌고, 서울 변두리 지날 때에는 여기가 서울이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후함이 느껴졌다. 버스타고 가며 오늘 콘서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할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네 집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친구의 고양이를 봤다. 친구가 자기네 고양이는 모르는 사람 오면 안보이는데 들어가서 나오지도 않는데, 나를 보고도 별로 경계를 안한다고 신기하다고 했다. 복실복실한 연회색 털에 동그란 눈을 가진 고양이가 먼 발치에서 '넌 뭐냐?' 라는 표정으로 내 행동을 빤히 쳐다보는데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면서 가까이는 오지 않았다. 내가 자려고 누워서 불을 끄니 그제서야 고양이는 내 머리 맡으로 와서 정수리 냄새를 킁킁 맡았다. 영광스럽게도.

  이번에 친구네 집에 가서 대기업의 위엄 같은 걸 느꼈다. 친구는 여전히 몸이 좀 아프긴 하지만, 첫 직장이자 현재 직장인 국내 굴지 대기업에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있다. 경력도 계속 쌓고 있고, 연봉도 계속 올랐겠지. 아무리 친구사이여도 연봉이 얼마냐 물어볼 순 없는거라, 친구의 월급이 얼마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날 친구네 집 가서 친구가 버는 돈이 어마어마함을 새삼 실감했다. 물론 내가 지금 하는 일보다 훨씬 힘드니 그 보상으로 많은 월급을 받겠지.

  친구는 대학졸업후  근 10년만에 하남시내에 대단지 아파트를 부모 도움없이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사고, 며칠 전에는 새 차까지 샀다. 친구가 너무 잘나서 대단하다는 생각 자주 하고 몸도 안좋은데 좋은 아파트에 살게 되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대체 30대 중반이 되도록 뭐한건가. 싶었다.

  다음날 하남에서 인천까지 지하철 타고 왔는데 배차간격이 똥이라, 3시간 넘게 걸렸다. 오는 길에 핸드폰을 두번이나 떨어뜨려서 산지 3개월도 안된 핸드폰이 순식간에 1년은 쓴 거마냥 후져졌다. 액정 안 깨진 건 다행이지만.

 

2. 친구네집 가서 한번도 느끼지 못한 박탈감 같은 걸 느낀 건 이유가 있다. 요즘 내 모든 역량을 절약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3월말에 목돈 쓸 일이 있어서, 3개월 할부로 목돈을 쓰고 (내 기준에서는 엄청난 목돈) 건강보험정산까지 하고나니, 정말 돈이 없어도 너무 없다.


2번 부터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짐. (회사에서 쓴건데, 바빠서 더 쓸 시간이 없는 관계로. )


결산 시즌

일상 2017. 3. 26. 22:42

재무제표

  아직도 악감정이 남아 있는 전 회사에서 3월은 최고로 일하기 힘든 시즌이었다. 왜냐면 12월말 결산 법인의 법인세 신고 마감이 3월 마지막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회사 특성 상 유형자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 많은 재고자산이 1년 내내 전혀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1년 내내 엉망으로 내보내고 들여오던 무수한 재고자산을 3월에는 어쩔 수 없이 정리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을 내가 싫어했던 최악 부장이 전권을 쥐고 책임졌다. 그 부장이 3월 내내 우리에게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히스테리와 짜증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하다.

  그 부장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하기도 한 게, 3월 내내 거의 철야로 일을 했다. 대체 그런 회사에 대한 무한 충성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마흔 넘은 나이에도 연장자에게 칭찬받고 인정 받기 위해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어쩌면 회사 생활에 가장 필요한 재능이 아닐까.

  2016년은 1월부터 12월까지 온전히 나 혼자 일을 해서, 결산하는데 훨씬 덜 힘들었다. 회계법인 도움을 받긴 했지만, 꽤 힘든 일이어서 재무제표가 나오면 막 감격스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냥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다. 뭐 워낙 구멍가게 같이 작은 회사라 수월한 것도 있었지만, 난 결산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전 회사의 최악 부장같이 주변에 온갖 짜증 부리고 징징 거리진 않았으니 스스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음 주 중에는 완전히 마무리될 것 같다.


사랑의 정의

  내가 혐오하는 사람 중 한 부류가 모든 일을 쉽게 정의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뭔가에 대해 단정 짓는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를 애초에 접는다. 사랑에 실패해서 상심이 깊은 사람에게 '사랑은 타이밍이다.' 같은 말 하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모르겠다. 안그래도 가슴 찢어지고 끝없이 자학하고 있을 사람에게 왜 그딴 근거 없는 말을 지껄이는가. 본인이 뭐 얼마나 대단하길래 '사랑' 에 대해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는가.

  내가 너무 순진할 걸수도 있지만, 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타이밍이 아무리 안 좋아도,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끝내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타이밍'이 서로 안 맞아서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그 감정이 정말 사랑이었을까? 난 절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기로도 썼지만, 내가 '사랑'에 대하여 탐구한 각종 글과 영화, 음악 통틀어 이정도면 정말 사랑의 절대 정의 에 가깝다 생각했던 건 단 두 작품 뿐이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사랑에 대하여' 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안톤 체호프나, 키에슬로프스키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걸까? 하여튼 정말 싫다.


다이어트

  다이어트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요즘 평일 저녁에 계란과 채소, 과일만 먹고 있다. 요즘 퇴근 하고 와서 몸무게 재면 50키로다. 내 인생 최초로 50키로를 돌파했다. 앞자리가 바뀐 체중계의 몸무게를 처음 본 날 너무 슬퍼서 내 방에서 막 비명을 질렀다. 이건 별로 영광스럽지 못한 기록 갱신이다. 3월이 되면 뭐라도 하자. 는 결심의 '뭐' 중에 운동도 포함이었는데, 주말마다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고 겨울이 깊어지면서 체력이 고갈되어 심하게 몸이 늘어져서 운동도 못했다. 요즘 저녁 때 채소 먹는 것도 다이어트보단 유지가 목적이다. 내 몸무게 목표가 이렇게 소박해졌다. 이렇게 살찐 중년이 되어가나보다.


쭈꾸미

  내 성격과 체력 모두 사회생활의 걸림돌이지만, 입맛도 꽤 큰 걸림돌이다. 난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 신라면도 매워서 못먹을 정도니 이 정도면 '전혀' 못 먹는다는 표현이 어색치 않다. 대체적으로 한국인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또 먹고 싶어하는데, 난 매운 음식을 먹으러 가면 차라리 굶는 것을 택하다보니, 그런 자리 가면 괜히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이 든다.

  맨날 맛있는 거 타령하는 부장님 때문에 저번주 어느 날에는 마리오 아울렛을 30분이나 헤맸고 금요일에는 쭈꾸미 먹으러 꽤 멀리까지 갔다. 나는 혼자 먹겠다고 주장해봤지만, 어떻게 혼자 먹게 두냐면서 자꾸 같이 가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쭈꾸미 식당 가서 혼자 양푼에 김치찌개를 먹었다.

  저번 금요일에 사장도 없고 전무도 외근 가서 부장급 들이 아주 놀기로 작정을 하고 쭈꾸미 먹으면서 소주랑 맥주를 내리 마셨다. 그 광경을 보자니, 이 회사도 3년 넘으면 미련 갖지 말고 떠나는 게 내 미래를 위해 유리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 그 때 되면 나이가 꽤 있어서 어디 다른 회사 가지도 못할 가능성이 많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불판의 쭈꾸미를 물끄러미 보다가 술도 싫고, 아줌마 아저씨들이 IMF 이전에 얼마나 회사 일 하기 편했는지 그리워 하면서 말하는 거 듣기 싫단 생각을 하며 난 정말 체질적으로 단체 생활이 맞지 않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거기 앉아서 술 마시느니 일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어서, 난 그냥 중간에 와서 열심히 일을 했다. 오후 늦게 부장들이 들어왔는데 역겨운 술냄새 풀풀 풍겨서 그 냄새 참고 일하느라 힘들었다.


불행한 여자들

  내 주변에는 50살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도 남편한테 맞고 사는 분도 있고, 선물 옵션으로 이미 2억 넘게 재산을 날렸는데 아직도 실시간으로 일이천만원씩 날리는 남편을 둔 분도 있다. 이 얘기를 다 이번 주말에 들었다. 대체 행복하게 사는 대한민국 중년 여성이 존재하긴 하는걸까. 교회 사람들도 친척들도 엄마 친구들도 죄다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와 친한 친구분 딸은 대학 기숙사 세탁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하고. 큰 엄마는 진지하게 황혼 이혼 고민 중이시고...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내가 시집가서 애기 낳고 남편이랑 살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딱해 죽겠댄다.


아기

  요즘 고양이 사진을 너무 많이 본다. 고양이만 키워도 고양이가 이뻐 죽겠다는데, 만약 내 자식을 키우면 고양이를 사랑하는 감정의 백배 천배는 내 애기가 예쁘고 사랑스럽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신혼일때 아빠가 가끔 숙직 때문에 집에 못 들어오셨는데, 엄마 혼자 자려면 그렇게 외롭고 무섭고 슬프셨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후 나랑 같이 자니깐 그렇게 든든하고 좋았댄다. 그래서 갓난 아이가 엄마를 지켜주지도 않는데 든든해? 하고 물었더니 그래도 아기가 옆에서 자고 있으면 전혀 외롭지 않다고, 근데 넌 아직도 아기를 못 낳아서 어떡하냐 면서 엄마는 또 슬픔에 빠지셨다. 이 얘기를 들은 후에는 나도 좀 슬펐다. 나는 동물은 키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기는 좋다. 가끔 아기들을 가까이서 보면 마음이 찡해진다.  아기 처럼 예쁜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주중에 회사에서 너무 바쁘다 보니, 주말에 아무것도 안하고 축 쳐져 있다가 일요일 밤에 우울함에 몸부림 치며 책 몇 장 읽다 잤다. 주말 내내 너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닌가.. 하고 죄책감이 들 때도 있지만, 제일 중한 건 건강이니까..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1. 사랑스러운 후배

  첫 회사 후배를 만났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애라 맛있는 걸 많이 사줘야지 했는데, 도리어 내가 얻어먹었다. 생일도 챙겨주지 못해서 내가 저녁을 꼭 사고 싶었는데.. 그 약속 때문에 오랜만에 명동에 갔다. 첫 회사의 추억이 어린 명동에 가면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좀 슬픈 기분 들기도 하고. 제대로 적응해서 죽으나 사나 그 회사에서 버텼으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이가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어도, 사회적 지위(?)는 오히려 지금보다 높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언젠가는 때려치고 말았을 첫 회사라 미련은 없다. 첫 회사에서 유일하게 얻은 건 이 후배 하나다. 후배 만나기로 한 명동 롯데 백화점 안에 들어갔다가 한창 길 잃고 헤맸다. 정말 갈 때마다 다신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 생각하게 되는 복잡한 곳이다. 갈 때마다 한번에 뭘 찾은 적이 없다. 

  내가 처음 직장생활 할 때는 명동 일대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어디서나 일본어가 들렸고, 일본인들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지금 명동은 모조리 중국인들 이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우리 동네에 배타고 내리는 중국인들과 다르게 명동 중국인들은 부유해보였다.

  자라 매장 가면 항상 건성으로 보고 뭘 사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후배와 자라에 들어가서는 원피스를 하나 샀다. 바느질 상태는 정말 한숨나는 수준이지만, 사이즈가 나한테 딱 맞고 디자인이 예뻤다. 가끔 가서 사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워낙 저렴해서 부담이 없기도 하니까.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서 사는 얘기도 듣고 내 이야기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너무 오랫동안 이런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2. 우편함

  퇴근 길에 우편함에 우편물이 그대로 있으면 '오늘도 엄마가 한 번도 바깥에 나오시질 않았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번 5차 항암 치료는 4차보다 더 수월하게 넘기셨다. 4차 항암 치료가 초등학교 4학년 같은 건지.. 저번 4차 항암 치료 끝내고는 너무 힘들어 하셨는데 오히려 5차를 쉽게 넘기셨다. 정말 다행이다.


3. 대전 결혼식

  원래 어제는 대전에 갔어야 했다. 유일한 초등학교 친구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돈만 보냈다. 그 친구는 8살 어린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한다. 연애한다는 말 들었을 때 행여나, 중간에 헤어지면 걔(남자)는 아직 팔팔한 나이 인데, 얘(내친구)는 어떡하나 싶었는데 결혼까지 해서 다행이란 생각 들었다. 8살 어린 남자는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궁금해서 가보고 싶긴 했지만, 안가길 잘한 것 같다. 갔다왔으면 병이 나서 앓아누웠을 것이다.


4. 가을 월미공원

  어제 우리동네에 있는 주차장이 꽤 넓은 유니클로에 가서 세일하는 울트라 라이트 다운을 3개나 샀다. 두 개는 엄마 것, 한 개는 내 것. 나는 이미 두 개 가지고 있지만, 나는 겨울내내 울트라라이트다운을 거의 매일 같이 입기 때문에 한 개가 더 필요했다. 사고나니 너무 든든하고 기분 좋았다.

  차까지 끌고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서 엄마와 월미공원에 갔다. 언제나 주차장에 자리가 남아돌고 한가한 월미공원에서 단풍나무도 많이 보고 은행나무도 봤다.

  월미도 인근을 전 안상수 시장이 얼마나 많이 망쳐놨는지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희대의 뻘짓으로 월미은하레일 이라는 걸 설치해서 그 멋대가리 하나 없는 레일과 큰 기둥이 월미도 인근 풍경을 재앙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하게 망쳐 놓는다. 스산하고 모든 것이 낡은 예전 월미도가 너무 그립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에서 나오던 그 월미도)






5. 사무실 이전

  요즘 사무실 이전 때문에 회사에서 죽을 맛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라는 속담이 뭔지 몸소 체험 중이다. 참견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12월이면 안그래도 바쁜데, 대체 왜 이사날짜를 12월로 잡은 건지 모르겠다. 또 한창 추울 때 아닌가.

  그래도 LSM Effect 로 인해 심하게 스트레스 받고 있진 않다. LSM Effect 는 내가 지어낸 말인데, LSM 이 전회사에서 날 괴롭히던 부장의 이니셜이다. 푸하하하. 막 열이 받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가도, 그 여자와 함께 일하던 시절을 회상하면 웬만한 일에는 화도 안나고 순식간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앞으로 그 여자보다 힘든 직장 상사는 없을 거라 믿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 전체로 볼 땐 그 여자에게 당한 일들이 완전히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 여자로인해 직장 상사에 대한 내 기대 수준이 사정없이 낮아진 것은 고마운 일이다. 요즘에는 회사 사람들이 배푸는 정말 작은 배려에도 감사하게 된다. 그 여자와 비교하면 더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지금 회사에서 아무리 열이 받아도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6. 친구의 연애

  친구가 공들이는 남자가 생겼는데, 그 남자가 생긴 뒤로 나에게 보내는 카톡의 양이 10분의 1로 급감했다. 잘되가서 그러는 거겠지. 뭐 우리 나이에 더 중요한 건 우정보다는 사랑일테니 이해는 하지만, 못내 좀 서운하다. 친구에게는 괜히 질투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말은 못했지만, 저번에 카페가서 실제로 본 남자와 내 친구.. 비주얼 적으로는 너무 안 어울려서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응원한다. 걔가 이제까지 고생하면서 산 걸 아니까.


7. 친구의 고양이

  내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유방암으로 투병 중인 친구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이 사진을 올리려고 인스타그램도 시작했는데, 인스타그램으로 가끔 보는 친구의 고양이는 예쁘긴 진짜 예쁘다. 너무 예뻐서 살아있다는 생각이 안들 때도 있다. 고양이가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귀엽지만, 난 죽어도 못 키운다. 한 생물을 거둬야겠다 다짐하고 실제 행하는 사람들 보면 존경스럽다. 난 정말 용기가 안난다.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절대 아니고.


개와 고양이

일상 2016. 2. 4. 18:32

1. 개
얼마전에 신도림역에서 맹인 안내견을 봤다. 큰 골든 리트리버 였다. 그 개는 굉장히 의젓했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행하는 모습에서 숭고함 까지 느껴져 울컥했다.
애완견 과는 다르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눈에는 피곤함이 서려 슬퍼 보였다.
하루종일 그 슬픈 눈이 나를 쫒아다니는 느낌이었다.
맹인 안내견이나 수색견들은 개로서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을 받아서 다른 개들 보다 평균 수명도 짧다는 걸 어디서 봤다.
난 실내에서 개를 키우는 건 질색이고, 평소 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개는 때론 사람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하고 인류에 꼭 필요한 동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보고 하루종일 맹인 안내를 시키면 아마 반나절도 안돼 포기하고 말 것 이다.
한국에는 개와 관련된 욕이 많지만, 실제 개만도 못한 인간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2. 고양이
고양이 척추의 움직임은 언제나 유려하다.
고양이들은 움직일 때나 멈춰 있을 때나 그 몸이 만들어 내는 선이 참 아름답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 조차 미적으로 가장 알맞은 각도 만큼 움직이는 느낌이다.
우리집 앞 곡물상가 제일 첫번째 집에 살던 고양이를 거의 5년 넘게 봤는데, 털 색이 은색이고 얼굴도 어찌나 예쁜지 운 좋게 그 고양이를 길에서 만나면 기분이 좋았다.
한 2년 전에는 자기를 꼭 닮은 새끼 몇마리를 낳았는데, 주인이 다른 집에 다 줘버린건지 한 2주 뒤엔 새끼 고양이가 한마리도 남지 않았고 나까지 슬펐다.
그런데 몇 달동안 그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살면서 본 고양이 중 제일 예쁜 고양이였던 그 은색 고양이가 아무래도 죽은 모양이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고 이름도 모르는데 서운하다. 이제 영원히 못보게 되는거니, 우연히 만나 기분 좋을 일도 없겠지.


Snow Patrol - Chasing Cars

음악 2014. 3. 23. 22:40

음악링크 : http://youtu.be/GemKqzILV4w 

 

  주말동안은 좀 속상한 일이 있었다. 나같이 소심하고 속좁은 인간은 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항상 충격을 받고 또 외면하려고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가 꽤 좋은 여자라고 믿기로 했다. (사실 그 수 밖에는 없다)

 

 

  오늘 부모님도 큰아빠 댁에 가시고, 나는 교회도 안가서 할 일이 없었다. 결국 책 하나를 들고 나의 영원한 안식처인 자유공원으로 향했는데 겨울이랑 비교도 안되게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도저히 걷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땅과 가까운 키의 작은 아이들도 자유공원 광장을 마구 뛰어 다녔다. 신나는 아이들을 보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의자에 앉아서 가져간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는데, 피츠제럴드는 미묘하게 내 취향이 아니다.  반절정도 남았던 그 소설을 오늘 끝까지 다 읽었는데. 역시나. 다만, 한 여자를 일생에 걸쳐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만큼 분명 많은 사람이 좋아할 요소를 갖춘 건 부정 못하겠다. 하지만, 문장에 묘사와 은유들이 남발되는 게 나와는 맞지 않았다. 뭐 그래도 개츠비는 말할것도 없이 정말 멋진 남자 주인공이다. 데이지는 천하의 썅년이고.

 

  책을 다 읽고 배고파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먹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오는데, 어렸을 때 봤던 고양이의 사체가 떠올랐다.

 

  우리 아빠가 실직했을 무렵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당연하게도 우리집은 엄청 가난했고, 내가 살던 아파트는 그 동네에서 제일 후진 5층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 단지의 모든 집은 다 10평대였다. 우리집은 13평 아무리 넓어봤자 17평. 아저씨한테 맞는 아줌마부터, 방화 사건까지 온갖 불량한 사건들이 벌어졌고 내가 놀았던 놀이터 옆의 공터에서는 종종 중학생 남자애들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패싸움을 하곤 했다. 꼬마들이 겁에 질려서 피흘리는 오빠들을 바라보고 있어도 어른 중 누구하나 말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생 때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로 존재감 없고 인기 없는, 생일 파티에도 많이 초대받지 못하는 조용한 꼬마였는데, 그래서 하교길에도 혼자 집에 오는 일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때도 넓은 길보단 좁은 골목으로 오는 걸 좋아했다. 어느날 항상 지나던 더럽고 좁은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그 골목에 고양이 사체가 보였다. 그런데 그 고양이 사체의 배는 누군가가 일부러 갈라놓았고, 뱃속에 있어야할 내장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골목에는 배가 갈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었을, 눈 뜬 고양이 가죽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나는 그 사체를 안보려고 노력하며, 뛰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소리한번 못지르고 빠르게 그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아마 그 고양이 사체를 본 뒤로 그 골목은 한번도 못 갔던 거 같다.

 

  이 고양이 사체를 본 사건은 내 입으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었다. 오늘 내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난 그때  무서웠고, 정말 외롭고 하루종일 심심한 꼬마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니가 있기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10살 때도 지금도 난 그냥 외로운 다 큰 32살 짜리 철부지 꼬마일 뿐이었다.  

 

  라디오에서는 Snow Patrol 의 곡이 흐르고 나는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사람 한명 없는 국제여객터미널 문 앞을 걸으며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한낱 직장인 나부랭이로 살면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면서 또 하지 않아도 될 쓸데 없는 생각들만 오지게 하는 나를 보며 이런 생각도 했다.

 

  사람들은 백번 보는 것 보다 한번 경험하는 것이 낫다고들 한다. 그런데 정말 죽어라 생각만 하는 게 한번 경험의 0.001%의 가치도 없는 하찮은 것일까. 나의 이런 망상과 기억과 쓰잘데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유가 다 나중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조금 슬플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난 할 줄 아는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