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서울

단문 2013. 10. 25. 13:42

  대학을 졸업한 2007년 2월 부터 난 3년 넘게 서울에서 일했다.

  내가 일했던 충무로는 인쇄소만 많고 골목이 구불구불하고 서울인데도 아직도 카드 단말기 없는 식당이 즐비한 낡고 낡은 닳아빠질대로 닳아빠진 동네였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충무로 너무 후지다. 종로에서 일하고 싶다. 혹은 강남에서 일하고 싶다. 그런 불평을 매일같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충무로는 오래되서 골목이 많아서 길이 비좁아서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던 동네였다. 아주 가끔 정말 회사가 답답해 미치겠으면 옥상에 올라가고는 했는데, (옥상에는 담배피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웬만하면 피하는 장소였다) 정면에 보이는 남산타워랑 남산을 보고 있노라면,

  전라도 깡시골에서 나는 시골을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 하면서 넓은 세상을 꿈꾸었던 내가 26살에 서울 남산 보이는 건물에서 한달에 한번씩 월급도 받으면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정도면 나는 성공한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당시 엄청 불행했으니 성공한 건 아니었지만, 뭐 고등학생 때 어떻게든 서울로 진출하겠다고 한 건 이룬 셈이었지.

  첫 직장을 때려친 뒤로는 서울과 인연이 영 없어졌다. 주말에도 서울은 인천에서 너무 멀어서 나가기 싫고, 별로 갈 일이 별로 없는데, 요근래 광화문에 갈 일이 3번이나 생겨서 광화문 신문로 쪽을 혼자 거닐었다.

  그래 이게 서울이지 싶었다.

  충무로에서 회사 끝나고 종종 갔던 종로도 청계천도 명동도 조금 그리워지고,

  내가 충무로 회사 다닐때, 언젠간 종로 쪽으로 회사 옮겨서 점심시간에 테이크아웃 커피 들고 청계천을 걷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생각났다.

  서울 그립다... 서울이 그리운건지 어렸던 내가 그리운 건지 잘 모르겠지만.

  죽을 기를 쓰고 출근하고, 축쳐져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던 인천행 지하철도,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느끼던 일상이 지겹고 재미없는 직장인들끼리의 묘한 동질감도.


저번주에는 회사에서 늦은 환영회를 했다. 나와 함께 들어온 부장님의 환영회로 함께 합쳐서 하는 환영회였는데. 솔직히 난 환영회 같은 것 좀 안했으면 좋겠다. 잘부탁드립니다. 하고 고기 굽고 열심히 먹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굳이 일어나서 고개 숙여서 인사하는 바보 멍청이 같은 짓도 하기 싫고. (음식도 더럽게 맛없었다)

또 내 환영회라는데 2차를 안가기도 뭐해서 갔더니만, 사람들이 무슨 술을 물마시듯 마시고. 이미 그 동네에서 우리집 오는 막차가 끊긴 시각이라 인천 사는 사람이 술 다 마실 때 까지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예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 친구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제일 얼굴이 예쁜 친구로, 새침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엄청 웃겨서 나랑 친했는데. 가끔 짬이 나면 우리는 각자의 윗사람 (나는 내 위에 과장, 그 친구는 위에 원장, 그리고 공통적인 윗사람은 팀장 과 사장) 흉내를 내며 복도에서 낄낄댔다. 

사내 정치세력에 끼어들지 못하고 표류하던 나와는 달리 그런 상황에서도 영리하게 대처도 할 줄 알고,(직장 경력이 나보다 한 3년 많았으므로 당연히 그런게 가능했을지도)  내 실수로 조금은 멀어질 뻔 하긴 했지만, 여하튼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 환영회 2차 자리에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내가 이게 뭐하는 건가 싶고. 그 회사에서 일은 힘들었어도 가끔 친구 덕분에 기분 전환이 됐는데... 하는 생각에 회식자리에서 별안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예전 직장에서 그리운 건 그 친구랑 또 둘도 없는 직속 후배. 진짜로 그 이후로 후배도 안들어오고 내가 계약직으로  있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직속 후배가 되어버렸는데, 씩씩하게 아직도 그 직장을 잘 다니고 있다. 난 선배같지도 않은 선배였는데... 그래도 오븟하게 후배랑 커피 내려 마시고 퇴근 후에 가끔 밥 사주고 했던 게 좀 그립다. 혼자 서울 올라와 있느라 고생도 많았을텐데. 속깊은 후배도 좀 그립다.

충무로도 좀 그립다. 명동도 걸어갈 수 있고 금요일 밤에는 가끔 종로에서 차도 마시고, 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 것 같은 충무로도 좀 그립다. 나 다니던 회사에서 점심시간에는 커피빈, 스타벅스, 카페베네, 일리, 톰앤톰스 다 걸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 직장은 그 흔한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하나 없으니까. 점심시간에 가끔 가던 병원도 그립고 최고의 치과, 사랑니 잘뽑은 치과, 충무로 치과도 그립고, 거기서 상담해 주던 분도 좀 보고 싶다.

사용하던 오라클 ERP도 좀 그립다. 크크크크. 자료를 한번 입력하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지나친 시스템에 도스 화면같이 명령어 입력해야만 구동되는 불편한 ERP였지만, 그래도 안정감 하나는 최고였는데.

그룹웨어에 입력하던 휴가 신청서도 좀 그립고, 내 개인 이메일도 좀 그립고. 지금은 아웃룩으로 전직원이 내가 보낸 이메일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거 때문에 가끔 쓰는 영어 메일이 엄청 신경 쓰인다. 이미 메일을 보낸 후에 왜 문장에 this 를 두번씩이나 썼냐 이 바보 멍충아 하고 자책도 하게 되고 자꾸 남의 시선도 의식하게 되고. 으으. 그룹웨어라는 게 없으니까 모든 걸 다 종이로 처리해야 하는 것도 좀 번거롭고.

4호선 1호선도 좀 그립다. 죽어라고 아침 저녁으로 인천-서울 왔다갔다 하면서 돈벌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느꼈던 묘한 동질감도 좀 그립고, 용산에서 동인천까지 아예 푹 자고 집에 가까워졌을 때 느꼈던 안도감도 그립고. 가끔 같이 퇴근하던 부평살던 목소리 엄청 큰 후배도 좀 그립고.

무엇보다 25살 26살, 27살, 28살 이었던 젊었던 나도 좀 그립고. (젊었다고 뭐 특별히 한 것도 없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리니 막연한 희망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엄청 자주 하게 되는데, 전혀 소용 없는 걸 알면서도 이런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면 벌써 지금 이 생활이 지겨워졌기 때문이겠지.

월요일 아침부터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아 비 그쳐지면 추워질텐데. 지금 앉아있는 내 자리 완전 구석인 건 맘에 드는데 벌써 손시렵고 발시려운 게 심상치 않다. 다가오는 겨울을 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막상 엄청 추운 겨울이 되면 아무 생각이 안들 것 같아서 오히려 빨리 겨울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드는 깝깝한 월요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