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외근의 기억

단문 2016. 8. 29. 18:44

마법처럼 날씨가 쾌적해지기 전, 동국대로 외근갈 일이 생겼다.
아침에 바로 동국대로 가야했다.
충무로에서 3년을 근무했지만, 동국대는 충무로에서 가깝다는 것만 알았지 정확히 어디 있는건지 몰랐다. 갈 일도 전혀 없었고..
오랜만에 내 20대 추억이 서린 충무로역에 내려 스마트폰 지도를 켰는데, 아무리 봐도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뜨거워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날씨에 행인들에게 동국대 가는 길을 물었지만, 누구하나 속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난 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들 무리를 뒤따라 갔는데, 다행히 그 아이들은 동국대 학생들이 맞았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듯, 애타게 교내 카페를 찾았고 마침내 2500원짜리 찬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동국대는 내가 졸업한 학교와 다르게 경사가 참 많았다. 남산 중턱에 자리해서 그런지 공기도 좋고, 산책로도 있고, 건물도 귀엽고 예뻤다. 동국대를 4년 내내 다니면 매일 하는 등산 때문에 건강해질 것 같았다.
당시 엄마는 아직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셨었고 난 혼자 점심식사를 하며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드렸다.
엄마에게 오늘 진짜 더운데 길을 헤매서 힘들었다고 엄살을 좀 피웠다.
밥을 다 먹고 난 다시 오후 1시 뜨거운 태양을 느끼며 동국대역으로 향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외근의 처음부터 끝까지여정이 나중에도 종종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양산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프리젠테이션 내용을 받아 적으며, 동국대역에서 회사로 오는 전철을 타며 순간 순간 틈이 날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며, 기도했기 때문이다.


꿀맛같았던 연휴가 끝이 났다. 어찌나 슬픈지 모르겠다. 금요일에 눈을 떴는데 영락없이 토요일 같았다. 그래서 TV 에서 왜 영화가 좋다 안하지? 이러면서 불만스러웠는데 맙소사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에는 친한 친구와 종로에 가서 아이언맨을 봤다. 작년에 회사에서 나오는 복리후생비가 많이 남아서 롯데시네마 관람권을 왕창 사놨었다. 한 8장 샀는데 이제 겨우 2장 썼네. 

나는 작년에서야 배트맨 시리즈를 봤는데 영웅물에 큰 관심이 없기도 했고, 배트맨 시리즈 좋아하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신봉도 맘에 안들어서 일부러 안본 것도 있다. 그러다 배트맨시리즈를 보고 나는 왜 이시리즈가 이렇게 인기가 있나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재밌는 걸 왜 이제서야 봤을까 하고 아쉬울 정도로.  그래도 난 아직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너무 심각한 척 하는게 맘에 안들기도 한다. 인셉션도 보긴 봐야 하는데 기회가 안되네.

작년 어벤져스도 생각보다 재밌었는데 어벤져스에 나오는 사람들 나온 영화를 단 하나도 안보고 봤는데도 재밌었다. 웃기기도 했고. 이런거 보면 난 의외로 영웅물 체질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언맨3 역시 앞 시리즈 하나도 안보고 봤는데, 재밌었다. 유머도 꽤 내 스타일이고, 중년 남성의 순정에 대리 만족도 가능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아저씨는 완전 멋지다. 귀여운 매력이 있다. 조지 클루니에 이어 멋진 아저씨 목록에 추가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은 조지클루니 아저씨가 최고야. 왜냐면 아직 결혼을 안했으니까 크크크크크) 

아이언맨 시리즈도, 배트맨 시리즈도 다 재밌긴 했지만, 영화가 점점 2시간 짜리 미니시리즈가 되어 가는 건 좀 슬프다. 점점 원래 있던 스토리 가져다 쓰는 것도 좀 맘에 안들고 이러다가나는 마블 코믹스에서 나오는 모든 만화가 다 영화화 될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말하지만, 순전히 영화를 위해 쓰여진 시나리오에 딱 2시간이 안되는 시간 안에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안겨주는 영화가 좀 그립다. 빌리 엘리어트나 Ghost world, 500일의 써머 같이 말이다. 뜬금없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랑 Ghost world 인 것 같다.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나니까. Ghost world 의 스티브 부세미 아저씨는 극 중 도라버치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허리 디스크 있어서 복대 차고 다니고 2:8 가르마에 배까지 촌스러운 면바지를 입고 다니는 앞니 툭 튀어나온 그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너무 아름다운 남자와 여자가 한눈에 반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귀한 러브스토리. 

요즘 본 영화 중에서 제일 내 이상형에 근접한 사람은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 에서 휴그랜트의 캐릭터. 흐흐흐 그 영화 기대 없이 봤는데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러브 액추얼리에서 휴그랜트 보다 훨씬 귀엽다. 


수요일에는 의정부에 외근을 다녀왔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운전 이제 웬만큼 잘하는 줄 안다. 그런데 전혀. 나는 아직도 회사-집 왔다갔다 하는 코스 이외에는 다른 코스 운전은 하고 싶지도 않고, 약 34km 정도 되는 그 출퇴근 코스도 내가 원래 가는 코스 이외에는 단 한번도 다른 코스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런데 차장님께서 수요일에 의정부를 갔다오라는 거다. 우리 회사랑 관련있는 협회의 경기 북부 지사가 의정부에 있어서였다. 나는 가라니깐 못간다 말도 못하고 갔다오겠다고는 했지만, 불안해서 결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 위성지도를 거의 외우다 시피 왕복코스를 1시간 동안 보고, 외근 전날 차 안에서 내비게이션으로 모의 주행까지 다 해본 다음에야 마음을 잡고 외근에 나설 수 있었다. 출근길에는 보통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리다 자유로 IC 에서 빠지는데 그 날은 자유로 IC를 그냥 지나야만 했다. 그렇게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나도 꽤나 쌩쌩 (보통 125km/h 정도로 달리고 있음. 그 이상은 우리집 차가 잘 안나간다. ㅜㅜ) 달린다고 달리는데 차들이 북으로 가면 갈수록 엄청나게 빨리 달렸다. 아스팔트 고속도로가 아닌 콘크리트 고속도로가 나오고 2km 가 넘는 터널도 나왔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본 것보다 차에서 내비게이션으로 모의 주행 해본 게 훨씬 운전에 도움이 많이 됐다. 

올때 갈때 양갈래 길이 있었는데, 의정부로 들어갈 때는 모의 주행에서 계속 우회전이고 갈래길이 나오면 무조건 우측으로 가야 하는 걸 알아서 무사히 갔다. 

의정부에서 서울로 갈 때는 올때랑은 반대로 계속 좌측으로만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진입하기 전에 의정부 시내에서 차선 잘못타서 고속도로 진입하는 송추 IC 빠지는 길로 못들어갈 뻔 했는데 맘씨 좋은 트럭 아저씨가 양보해줘서 무사히 진입하고 한바퀴 돌고 이러면서 고속도로 진입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X 자 교차로가 나오는 거다.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빠져야 하는데 내가 바로 그 교차로 직전 바로 앞에 올때까지 차선을 못바꿨었다. 나는 속으로 "망했다. 고속도로 잘못 진입하면 다시 빠져나가서 또 다시 의정부 시내 들어가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꺼를 타면 의정부 돌아서 상일동가는 길이 나오는데 젠장..". 이러면서 그 짧은 순간에 별 잡스런 생각을 다했는데 왼쪽으로 진입하는 차선만 2차선이었다. 오 주님. 그 뒤로는 또 신나게 달리다가 자유로 IC 로 못 빠질 뻔 하고 급히 막 차선 바꾸려다 식겁하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돌아왔다. 어찌나 긴장을 했든지 막 귀가 멍멍하고 내가 운전하는데도 멀미가 날 뻔했다. 

또 가라고 하면 가기 싫은데 이번에 다녀와서 왠지 이제 막 보낼 것 같다. 


협회에 가기 전에 전화로 엄청 불친절했던 여자가 제발 얼굴 엄청 못생기고 뚱뚱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는데. 웬걸. 얼굴이 예뻤다. 게다가 닐씬하기까지. 외근 다녀온 뒤로도 차장님이 계속 뭐 물어보라고 시켜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끊을때마다 그 여자에게 듣지도 못할 외마디 욕을 하고 있다. 별 것도 아닌데 꽤 스트레스다. 엄청 불친절한 사람한테 차장님이 물어보라는 거 1페이지 뽑아서 물어보는 거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나 의정부는 머리털나고 처음 가봤다. 내가 갔던 의정부역 주변이 신세계 백화점도 있고 의정부 안에서는 꽤 번화가 인 것 같았는데 한적해 보였다. 도심과 엄청 가까운데 부대 입구가 떡하니 크게 있는게 인상적이었고, 신세계 백화점이 인심 후하게 백화점 물건 하나도 안샀는데도 주차료 한푼 안받아서 좋았다. 운전자들도 내가 길 몰라서 엄청 얼쩡대고 느리게 가는데도 친절했다. (역시 인천이 삭막한 거였어...) 내가 지하로 진입해야 하는데 차선 잘못타서귀찮게 했더니 뒤에서 엄청 빵빵 댔던 아저씨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한 도시의 느낌. 그리고 왠지 쇠락한 느낌. 인천 부평의 스몰버젼 같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