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 E. M. 포스터 전집
국내도서
저자 : 에드워드 포스터(E. M. Forster) / 고정아역
출판 : 열린책들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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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독후감을 쓰는 게 영화 감상문을 쓰는 것 보다 백배는 어렵게 느껴진다. 영화야 배우나 음악 화면 색감 구도 이야기 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라 느낀 바에 대해 쓰기 쉬운데, 책은 그게 절대 아니니까. 그래서 이제까지 책을 읽어도 독후감 같은 거 안쓰고 그냥 읽고 끝났는데,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이 '재밌다.' '재미없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더라. 북한은 책이 부족해서 도서관에서도 독후감을 써서 내지 않으면 다음 책을 안 빌려준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그거 참 서로에게 좋은 방안인 거 같다. (진짠지 아닌지 확실치 않음.) 그런 의미에서 나도 미숙하게나마 독후감을 쓰기로 결심했다. 수준 낮은 독후감이라도.


  6월 우울증 위기 이후로 어린 시절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원초적 기쁨을 다시 되찾았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한동안은 책보다도 신문이나 잡지 혹은 비문학 책을 훨씬 많이 봤다. 그런데, E.M 포스터의 '모리스' 를 읽으며, '그래... 소설을 읽는 건 이런 느낌이었지.....' 싶었다. 내 마음을 녹여주는 그런 따뜻한 느낌 말이다. 일생에 걸쳐 나를 치유해줬던 문학을 너무 오랜기간 잊고 살았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뒤로 훨씬 건강한 정신으로 살고 있다. 가끔 6월 위기 같은 상태가 될 때도 있지만, 그때처럼 오래가진 않는다.


  나에게 문학의 기쁨을 상기시켜 준 작가 E.M 포스터 의 가장 유명한 소설 '전망 좋은 방'을 읽었다. 

  독후감 쓰면서 줄거리 쓸 필요 없는데 어쩌다보니 다 썼고 지우긴 아까워서 그냥 여기 남겨놓는다.



  나는 출퇴근길과 집에서 자못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속으로는 아이돌팬의 심정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조지가 너무 멋있어서 비명을 꺅꺅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폭풍의 언덕' 이 지나치게 우울한 사랑 이야기라, 좀 경쾌하고 귀여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망좋은 방' 은 이러한 목적에 완벽히 부합하는 책이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많이 하는 이야기 중 남자는 처음에 별로 호감이 안가도 만나다보면 좋아진다. 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호감이 없었던 남자가 만나면서 좋아진 경우가 없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할때마다 다른 여자들은 다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라고 말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항상 넌 노력도 안해보고 그런다고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을 열과 성을 다해 좋아하기로 마음을 먹는 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는 아무리 좋아도 내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 이런 거 안 믿는 낭만 없는 사람...) 그것도 어느 정도 나와 맞고, 끌리는 사람에게나 가능한거지, 같이 문자 몇 번 주고 받는 것 조차 괴로움의 연속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오히려 처음에는 싫었는데 계속 만나면 상대방이 좋아진다는 사람들이 더더욱 신기하다.


  어떻게든 세실과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애처로운 루시를 보며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아는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거깃다 앞뒤 꽉 막히고 루시의 앞날을 방해만 하는 샬럿 때문에 더 답답했다. 조지같이 인생의 빛과 소금되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로마로 떠나버리다니! 떠나는 밤에 조지가 문 앞에서 비를 철철맞고 있는데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루시를 보며 내 가슴 또한 찢어졌다. 이외에 조지와 루시가 피묻은 엽서를 강에 떠내려 보내는 다리 위 데이트 장면도 무척 다정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내내 좋았다. 유명한 키스 장면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다.


  루시와 조지의 사랑이 가장 큰 뼈대긴 하지만 루시가 피렌체에서 여행을 하며 영국에서 전혀 못 만나던 종류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간적으로 성숙해나가고,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 또한 '전망 좋은 방'의 큰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는 당시 남자 소설가가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이야기 치고는 굉장히 선진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E.M 포스터가 당시 미덕에 부합하지 않는 동성애자 였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도 열린 견해를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역시 소설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E.M 포스터는 좋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찾아서 보려고 한다. 이미 제비 꽃밭 키스신은 찾아서 봤지만, 영화 속 장면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예뻐서 보고 싶어졌다. 근데 의외로 영화에서는 세실이 꽤 멋있나보다. 감상한 사람 중 조지보다 세실이 낫다는 사람도 다수 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책만 봐선 절대 세실을 더 좋아할 수가 없는데. 하긴 책에서도 거만한 세실이 꼴보기 싫다가, 루시가 파혼 통보하니 군말없이 신사적으로 물러나서 좀 불쌍하긴 했다.


  이 소설 맨 앞장에 'H.O.M 에게 이 소설을 바칩니다.' 라고 적혀 있는데, 이 H.O.M  은 바로 소설 '모리스'에서 클라이브의 모델이었던 휴 메러디스 다. '전망좋은 방' 출간 년도를 보니 이미 휴 메러디스가 결혼한 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 메러디스에게 이 소설을 바치다니.. 순정파 E.M 포스터 같으니라고.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이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p.102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진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도 근본적으로 똑같은 종류의 짐승입니다. 여자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내 속에도 깊게 흐르죠. 그건 여자와 남자가 함께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p.241




입맛이 없어서 혼자 출판사 건물 1층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 를 읽었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서점에서 서서 다 읽고 정말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읽으니 소설의 문장이 전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다.
흐르려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바닐라라떼를 마시는 중이다. 청승맞게.
정말... 이렇게 짧고 이렇게 아름다운 소설이 존재한다니.


소설 행인 속 형수

위로 2016. 1. 2. 00:09

머리가 나빠서 책을 한번만 읽어서는 명확하게 기억을 못한다. 인상 깊은 몇몇 구절만 드문드문 기억날 뿐.

나츠메 소세키의 행인 은 엄청 좋아하는 책이지만,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난 형의 부인, 그러니까 소설 속 화자의 형수가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
특히 형수와 와카야마로 가는 기차 안에서의 대화와 분위기 묘사가 생생하다.
전에 이 책을 읽고 쓴 포스팅에도 썼지만,
주인공인 형은 등장하지도 않는 그 장면에서는 형수의 성격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음에도 독자는 형수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그토록 그 장면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너무 대단해서 경외감마저 드는 소설들은 품위없이 직접적으로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잘된 예술작품은 표현의 차원이 다르다.

소설이든 영화든 우리가 전혀 듣도보도 못한 인물과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다. 어떻게 표현하고 서술하느냐가 그 작품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이다.

오늘 본 시카리오의 촬영이라든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같은 작품들은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작이 되는 것이고, 이런 작품과 다르게 자극적이고 직접적이면 범작이 되고.

다커서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읽을 때 마다 목이 매도록 슬픈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 - 행인

위로 2010. 10. 2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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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行人)

나쓰메 소세키

문학과 지성사


나는 . 애초에 이 세상이라는 건 기쁜 일보다 슬픈일이 훨씬 더 많고 신발을 신고 바깥에 나가면 즐거운 일 보다는 괴로운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근거도 책임도 없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강요하는 문구나 사람 사상 등을 마주대하면 "실망하면 책임질거냐" 고 따지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 반사회적 인물로 불만투성이로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은 행복한 일은 극히 적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많으니까.  
이런 나에게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출근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즐거운 하루가 될 거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얼마나 괴로울까? 내 괴로움을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죽어라 위로를 해줘봤자 그 사람은 더 외로워질 뿐이다.  
예전 회사를 출근 하면서 출근길에 홧김에 자살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갔던 때가 있었다. 단지 회사 자체가 괴로운 것을 떠나서 이렇게 매일 매일 아둥바둥 살면서 일시적인 즐거움으로 난 괜찮다고 자위하는 삶을 평생 살다가 늙어 죽는다고 생각을 하니 너무 우울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런 내가 행인의 "형" 을 보면서 연민이 드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물론 형이 고민하는 문제는 내가 고민하는 "먹고 사는 문제" 보다 훨씬 고차원 적이고 심각한 문제였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이걸 아껴 읽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한페이지 한페이지 줄어드는 것이 아쉬웠다.
뒷면에 옮긴이 해설 을 보면 '인간존재에 깃든 에고이즘' 이라고 적혀 있는데 사실 저건 뭘 말하는 지 잘 모르겠고, 난 소설 행인을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내 수준 답게  간단히 말하고 싶다.

가장 빨리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겼던 부분은 역시 형수와 책 주인공인 '나' 가 와카야마에 하룻밤 머무르는 장면이었다. (긴장감도 긴장감이고, 그 하룻밤의 형수님과 나의 대화를 보면 형수님의 성격과 분위기 등이 눈에 보일 듯 그려지기 때문에) 쓸쓸한 보조개를 가지고 있는 형수도 형의 딸도 동생도 부모도 모두 형의 구원이 되어주 질 못하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제대로 서술해주지 않은 결혼 전날 형 앞에서 울던 하녀 '오사다' 는 형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위에까지는 10/22에 쓴거고 지금부터는 11/3 에 쓴 내용임-

밑에 책에서 발췌한 부분을 적고나서  다시 덧붙이지면, 난 형도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여자라 그런가 더 인상깊고 애정이 갔던 인물은 형수님 이었다. (밑에 책에서 발췌한 부분도 형수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 친구와 어제 네이트 쪽지로 이야기 하다가 생긴 의문인데 이 책의 주인공인 '동생' 이 형수에 대해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동경? 존경? 연민? 분명 애정 쪽은 아닌데 말이다.
책의 주제는 맨 마지막 페이지 370쪽에 나온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나마 이 형에게 다행스럽고 위안이 되는 점은 자신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친구가 딱 한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일 거다.  믿을 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가끔 친구나 아직은 없는 애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아마 이 소설 쪽 '동생' 처럼 생각기가 쉽겠지. (어떻게 끝맺을 해야할 지 모르겠음;)

P. 156
  방 안은 촛불로 인해 소용돌이 치듯 동요했다. 나도 형수도 눈살을 찌푸리고 타오르는 불꽃 끝을 응시했다. 그리고 불안한 쓸쓸함이라 형용될 법한 심정을 맛 보았다.
  조금 있다가 우리는 누웠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나는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다소 잠잠하던 폭풍우가 이때는 밤이 깊어짐에 따라 거세지는지, 새까만 하늘이 새까만 대로 활동하며 한 순간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무서운 하늘에서 검은 전광이 맞부딪쳐 서로 검은 바늘 비슷한 걸 쉴 새 없이 내보내어, 이 어둠을 굉장한 소리로 유지하는 거라 상상하며 또한 이 상상 앞에 위축되었다.

P.159
  나는 이때 비로소 여자에 대해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형수는 어디를, 어떻게 떼밀어도 밀려나지 않는 여자였다.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아가면 마치 포렴처럼 흐물흐물했다. 하는 수 없이 이쪽이 물러나면 돌연 엉뚱한 곳에서 강한 힘을 보였다. 그 힘 가운데는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무서운 것도 있었다. 또는 이 정도라면 상대해줄 수 있으니 한번 시도해볼까 하다가 미처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도 있었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그녀로부터 농락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농락당하는 기분이 내겐 불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P.162~P.163
  나는 형수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다시 그녀의 사람 됨됨이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평소에 형수의 성격을 어느 정도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막상 정식으로 그녀의 입을 통해 진심을 듣게 되고 보니 도무지 깊은 미로에 빠진 듯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모든 여자는 남자가 관찰하려 들면 누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수 같은 모습으로 귀착되는 게 아닐까? 경험이 부족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또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다른 여자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형수만의 특징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쨌든 형수의 정체는 전혀 알지 못한 채, 하늘은 파랗게 개고 말았다. 나는 김빠진 맥주같은 심정으로,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줄곧 바라보았다.

P.176
  나는 어둠 속을 달리는 기차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래도 내 밑에 있는 형수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유쾌했다. 동시에 불쾌했다. 어쩐지 부드러운 구렁이에게 온몸이 휘감기는 느낌이었다.
  형은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마치 몸이 누워 있다기보다 참으로 정신이 누워 있는 듯 여겨졌다. 그리고 이 누워 있는 정신을, 예의 흐물흐물한 구렁이가 비스듬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친친 휘감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내 상상으로 그 구렁이는 때로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했다. 그리고 느슨히 휘감았다 옥죄었다 했다. 형의 안색은 구렁이의 열기가 변할 때 마다, 또는 휘감기는 힘이 변할 때마다 달라졌다.

P.244
  밖은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댔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가루처럼 보잘것없는 힘을 모아 이 바람을 버티며 반짝였다. 나는 쓸쓸한 가슴 위에 양손을 얹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이불 속으로 곧장 파고 들었다.

P.260
  긴 듯하나 짧은 겨울은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하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내 앞에 찬비, 녹아드는 서릿발, 강바람....... 등의 짜여진 일정을 평범하게 반복하며 이렇게 지나갔다.

P.272
  그리고 나서 사나흘 동안 내 머리는 끊임없이 형수의 유령에 쫓겨 다녔다. 사무실 책상 앞에 서서 중요한 도면을 그릴 때조차 나는 이 화(禍)를 물리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중략)...
  어느 순간에 그녀는 인내의 화신처럼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인내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용납하지 않는 고상함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지었다. 쓰러져 우는 대신 단정히 앉았다. 마치 그렇게 앉은 자리 밑에서 자신의 발이 썩기를 기다리는 듯이. 요컨데 그녀의 인내는 인내라는 의미를 넘어 거의 그녀의 자연에 가가운 무엇이었다.

P.357
   형님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 앞에 머리 숙여 눈물을 흘릴 만큼 바른 사람입니다. 굳이 그렇게 할 만큼 용기를 지닌 사람입니다. 굳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판단할 만큼의 식견을 갖춘 사람입니다. 형님의 머리는 지나치게 명민하여 자칫하다간 자신을 내버려두고 앞서가고 싶어합니다. 마음의 여타 도구가 그의 이지(理智)와 보조를 맞춰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데에 형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인격으로 보자면 거기에 빈틈이 있습니다. 성공으로 보자면 거기에 파멸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부조화를 형님을 위해 슬퍼하는 나는, 모든 원인을 너무나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의 이지의 죄로 돌리면서도 역시 그 이지에 대한 경의를 버릴 수 가 없습니다. 형님을 그저 까다로운 사람, 그저 고집센 사람으로만 해석한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형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형님의 고통을 덜어줄 가능성은 영원히 멀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요.

P.370
  여러분들은 형님의 장래에 대해 특히 명료한 지식을 얻고 싶다고 바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예언자가 아닌 나는, 미래에 참견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덮었을 때,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또한 비가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구름이 하늘에 있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는 건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형님이 곁에 있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하여, 딱한 형님에게 다소 비난의 의미를 던지는 모양입니다만,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에게 남을 행복하게 해줄 힘이 있을 리 없습니다. 구름에 가린 태양에게 어째서 따스한 빛을 주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건, 다그치는 쪽이 무리겠지요.

2008년 내내 읽은 책들 중에서 최고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들이었다.
다른 블로거들 처럼 정성스러운 서평은 1년에 한 번도 잘 못쓰는 나이지만, 로알드 달에 대해서는 진짜로 뭐라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소설이 다들 너무 너무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 재밌는 소설의 세계로 빠졌으면 하기 때문에.
아침에 로알드 달 소설 읽다가 두번씩이나 내려야할 서울역을 지나 시청역까지 갔었다.

저번 봄 휴가 때 나들이 나간 영풍문고 세일코너에 로알드 달의 "세계챔피언"과 "맛"이 있었는데 내 절친 민양이 이사람 책 진짜 진짜 재밌다고 둘다 너무 재밌다고 두권 다 사라고 적극 추천을 했더랬다. 그래도 한권만 골라줘봐 했더니 "맛" 을 골라줬었다. 결국엔 나중에 "세계챔피언"도 사고 "개조심"도 사고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 "당신을 닮은 사람" 도 사버렸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와 당신을 닮은 사람은 아직 못 읽었다.(근데 당신을 닮은 사람은 앞 서 읽은 소설이 많이 중복되더라)
난 안톤 체호프 같이 간결하고 위트있고 뒤가 너무 궁금해서 빨리 이 페이지를 넘기고 싶어서 안달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이런 책 안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 안톤 체호프 책 이후 이렇게 재밌는 단편 소설집은 정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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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ld Dahl (1916.10.03 ~ 1990.11.23)

'에드가 앨런 포' 상을 두 차례.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사람. 1916년 사우스웨일스에서 태어나 영국의 랩턴 스쿨을 다녔다. 부모는 노르웨이 이민자들이었다. 재기와 상상력으로 충만한 꺽다리 소년이 억압적인 학교교육과 충돌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나가는 성장기 이야기는 그의 자전소설 [보이] 에 잘 그려져 있다. 랩턴 스쿨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그가 선택한 진로는 석유회사 쉘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공군에 지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1942년 워싱턴 영국 대사관의 공군 무관으로 부임한 뒤, 정보국으로 옮겨 공군 중령으로 종전을 맞았다. 그의 작가적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전장의 경험을 담은 단편소설들을 미국의 유력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했고 기발한 이야기 솜씨는 단번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첫 단편집 [개조심 (원제: Over to you)] 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어 두번째 단편집 [당신을 닮은 사람] 이 나왔고 이 책으로 '에드거 앨런 포'상과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수상했다. [찰리와 초코릿 공장],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등 전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한 술수 등 인간사의 미묘한 국면을 차근차근 밀도 높은 이야기로 조여붙이는 그의 솜씨는 마침내 절묘한 유머와 반전을 선사한다. 2000년 '세계 책의 날' 전세계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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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생 책상 위에서 로알드 달의 책. 흠 뜬금없는 말이지만 내동생 책상밑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스터가 깔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