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관계

일상 2018. 5. 30. 16:04

1. 친한 사람의 기준

  나에게 친한 사람이란 상대방을 만날 수 밖에 없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간을 내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학창시절에 학교에서 같이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친구들과 학생이 아닌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하고 얼굴을 보니 그들과 나는 아직까지도 정말 친한 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중 지금까지도 얼굴 보고 연락하는 사람은 오로지 단 한명이다. 이제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직장에서 같이 일할 땐 분명 친했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지만 더이상 그 사람들을 볼 기회 혹은 의무가 사라지고 나니 전혀 연락을 할 생각도 들지 않고, 볼 마음은 더더욱 안든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들과 직장에서 보낸 그 시간과 관계는 대체 뭐였을까? 동료애? 이렇게나 거창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가끔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퇴직은 고사하고 업무시간이 종료됨과 동시에 서로 메시지 하나 주고 받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아쉬울 것 전혀 없는 관계. 이걸 어느 정도 인정하고 거리를 두는 게 내 직장생활에 이롭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좀 슬프지만 어쩌겠나...


2. 병원 사람들

 우리 엄마 때문에 병원을 자주 왔다갔다하면서 그곳의 의료인들에게 경외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고등학생 때 '교련' 과목을 마지막으로 배운 세대인데, 교련 수업시간에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는 순서 같은 걸 배웠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 수업 내용 중 가장 충격이었던 건, 가망이 없어보이는 사람은 포기하고 살 가능성 있는 사람부터 구하라는 내용이었다. 간신히 숨이 붙어 있으면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니.. 이게 아무리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나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그 사람들 유언이라도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가 입원하신 병원은 전국에서 더이상 가망없다고 포기한 사람들이 많이 오는 병원인데, 원래 가던 병원에서 아무 것도 안해주겠다는 우리 엄마 상태를  담당 선생님께서 보자마자, 수술 날짜 잡고, 우리 엄마보다 심했던 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시는데 난 정말 그 자체로 너무 고마워서 의사선생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죽음을 목격할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더라도 죽음에 초연해지지 않는 의료인이 정말 좋은 의료인이 아닐까. 정말 존경스럽다.



1. 크리스마스 

  요 근래 매년 크리스마스 쯤 만나던 (남자인) 친구가 있었다. 올해는 그 친구한테도 메리크리스마스라는 형식적 메시지 조차 없는 정말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틀 뒤면 내 생일. 매년 별 거 없었다. 아마 난 죽을 때까지 이럴 것 같다. 나는 누군가와 이 정도면 많이 친해졌고, 상대방도 나를 진짜 친구로 받아들여주겠지? 라고 착각하는 병에 걸린 것 같다. 이런 애정결핍적 행동과 태도가 스스로 짜증이 나서 날이 갈수록 사람을 멀리 하게 된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 없는 곳에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길 바랄 뿐이다. 27일 내 생일에는 가족 제외한 누구한테라도 축하한다는 말을 단 한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내 생일은 언제나 회사에서 제일 바쁜 시즌이라 생일답게 보낸 적 거의 없기 때문에 크게 의미부여 안하지만, 2016년은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해 라, 혼자서라도 의미깊게 보내고 싶다.

2.  사무실 이전

  사무실 이전이 드디어 끝났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난 사무실 이사도 가정집 포장 이사처럼 그날 아침에 다 싸고 옮겨주고 정리까지 해주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나랑 막내만 죽어라 짐싸고, 죽어라 전화하고 일했다. 걔랑 전우애 같은 감정을 느꼈다. 어쨌든 끝났고, 나는 가산디지털단지 내 수많은 아파트형공장 중 한 건물 안의 한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인천에서 비정상적으로 멀었던 성수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사무실이 이전한 덕분에 출퇴근시간이 약 90분 줄었다.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그나마 보람 있다. 만약에 2년 뒤 여기 계약 연장 안하고 또 이사간다고 하면 정말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할 것 같다. 사무실 이사는 일반 가정집 이사와는 차원이 다르더라. 우리집은 이사만 한 15번 정도 했는데, 15번 이사하는 동안 이번 사무실 이사 처럼 힘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사를 토요일에 해서 어쩔 수 없이 토요일에도 출근했는데, 휴일 근로 수당 같은 것도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심하게 몸살이 나서 월요일에 간신히 일하고, 화요일에는 도저히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라 결근했다. 할머니 체력인 나는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힘든 노동을 하면 무조건 탈이 난다. 나같은 체력의 소유자는 규칙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

 

3. 내 자리

  나는 언제나 딸린 짐이 많은 편에 속한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내 짐만 세 박스가 나왔다. (다른 직원들은 보통 한박스) 짐을 줄이려고 회사에서 쓰던 컵과 커피 드리퍼, 원두, 우롱차잎, 커피 필터, 잎차용 필터를 집으로 가져왔다. 아침에 커피를 내려 먹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라고 할만큼 2008년 부터 쭉 아침에 원두커피를 마셨지만, 요즘 나오는 아메리카노 믹스가 워낙 훌륭해서 이제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직접 내려 마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컵은 회사 싱크대를 열어보니 아무도 안 쓴 것으로 보이는 컵이 있어서 그냥 그 컵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짐을 줄여도 내 왼쪽에 있는 서류 들은 정리할 수 없었다. 안쓰는 파일이 하나도 없이 다 수시로 꺼내보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다.

 


  회사를 워낙 많이 옮겨 다녀서, 내 자리 사진을 웬만하면 남겨 놓는 편이다. 위 사진은 성수동 사무실에 있을 때 내 자리다. 지금 가산동에도 거의 똑같이 정리해놓았다. 우리 사무실에서 내 컴퓨터가 제일 후지고, 모니터도 나만 유일하게  4:3 비율 모니터를 쓴다. 근데 뭐 상관 없다. 일하는 데 아무 문제 없다. 난 어차피 오피스 패키지 외 다른 프로그램은 하나도 안쓰니.

 

4. 고독한 삶

  12월 10일에 너무 우울하여, 혼자 산책을 나섰다. 하루종일 늘어져서 TV 보다, 책보다, 음악듣다, 석양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삶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생일인데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요즘 필요한 게 없다. 아니, 내가 갖고 싶은 것 중에서 남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너무 슬프고, 자주 좌절한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내 맘을 알고 들어주리라 확신하지만, 요즘들어 부쩍 마음이 약해진다. 의심하면 될 것도 안되는 건데.

 

 

 

 

  이 동네 살면서 셀 수 없이 자유공원에 자주 갔지만, 비가 억수로 오던 어느 여름날 이후 이렇게 사람이 없는 자유공원은 처음 봤다. 찬 겨울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추운 바다 속으로 야속하게 사라져가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그 순간 인천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느낌이었다.

 

5. 건강

  아직 감기 몸살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화요일에 받아놓은 약이 떨어져 어제 병원에 가서 2시간을 대기했다. 정말 지루해 죽을 뻔 했다. 너무 심심해서 신문도 봤다가, 핸드폰도 보다가, 너무 심심해서 혈압도 쟀다. 혈압이 최고 87 에 최저 54 가 나왔길래, 네이버에서 저혈압에 대해 찾아봤다. 몇 년 전 신문에서 의사가 고혈압보다 저혈압이 위험하다는 건 완전히 잘못된 의학상식이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난 저혈압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안쓰고 산다. 네이버에서 보니 저혈압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증세는 만성피로 라는데, 정상 혈압인 사람들의 일상은 나보단 훨씬 덜 피곤하고 활력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평생 저혈압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현재 내 상태가 피곤한지 어쩐지도 모른다. 다만, 남들보다 쉽게 피로하고 지치는 게 운동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체질적인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근데 뭐 이런 취약점이 있는데도 운동 안하고 체력 키울 생각 안한 건 100% 내 잘못이다.

 

6. 엄마의 치료

  내가 엄마에게 감기몸살을 옮긴 것 같다. 암환자는 다른 병에 걸리지 않게 엄청 조심해야 하는데, 오늘 우리 엄마는 내가 사무실 이사 후 앓은 증세와 완전히 동일한 증상의 감기에 걸려서 앓아 누우셨다. 죄책감이 든다. 다행히 내일 원래 병원 가는 날이라, 의사 선생님께 관련해서 상담을 받을 예정이다. 문제는 요즘 병원마다 내과에 감기 때문에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엄마도 2시간 이상 대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15분 이상 앉아 있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나도 힘들어 죽을 뻔 했던 장시간 대기를 하실 수 있을지..

  엄마께 항암용으로 투약하는 약이 3개에서 한 개로 줄었다. 하지만 6차 항암 후 C.T 사진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나쁜 소식이 내 감기 몸살의 결정타가 됐다. 월요일에 간신히 일하고 있는데 그렇게 힘들게 6번이나 항암을 받았는데, 복수가 다시 찼다는 소식을 사무실에서 전해 듣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물을 마시는데 손이 덜덜덜덜 떨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결근했다.

 

7. 그리운 친구

  자유공원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동인천 파스쿠치에 갔다. 그 카페는 지금은 시집간 친구와 같이 가던 곳이었다. 대학교를 중간에 그만둔 친구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어느 날은 자기가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로 유명한 주요섭 소설가의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면서, 그 책 이야기를 신나게 해줬다. 그런데 주요섭 소설 이야기를 한 다음부터 친구는 자꾸 주요섭 소설 속의 말을 따라했다. "처녀티 좀 나면 나아디갔디."  같은 말로 대화를 할 때마다 난 배꼽을 잡고 웃었다. 혼자 파스쿠치에 앉아서 듣고있기 힘든 멜론 최신가요 100 곡 중 하나로 추정되는 구린 가요를 들으며 (예전에는 선곡이 좋았는데..) 주요섭 소설체 생각이 나서 혼자 베시시 웃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친구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헤어진 옛 애인을 그리워 하는 것 만큼이나 절절할 수 있음을 그 때 느꼈다. 그 친구에게 이런 저런 고민을 이야기 하고 푸념을 하면 항상 최상의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근데 그게 거짓말로 나 위로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친구는 정말로 내가 언젠가는 그 누구보다 행복해 질 것이라 믿고 있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친구의 말이 정말 이뤄지기 힘든 일 임을 알면서도 너무 힘들때는 이상하게 듣고 싶다. 다 잘될거라는 진심어린 친구의 말이.

 

 

 

메리크리스마스


1. 지금은 병원을 옮기신 것 같지만, 지난 여름 엄마가 입원 하셨을 때, 7층에 상주하는 간병인이 있었다. 그 간병인 아주머니는 밥 때가 되면 병실을 돌아다니며, 거동이 힘드니 환자들의 식판을 대신 반납을 해주시겠다고 말하며 식판들을 수거하고 다니셨다. (식판 반납하는 곳은 층의 가운데에 위치) 신판 반납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온 병실을 돌아다니시면서 수고를 할까 하고 의문스러웠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은 환자들이 남긴 밥과 반찬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2. 엄마가 입원하시는 층은 여성전용 입원 층이다. 그 층을 청소하시는 분이 일이 끝났는데도 안가시고 가끔 우리 엄마 손, 어깨, 발 같은 데를 마사지 해주신다. 힘드실텐데…엄마가 하지말라 해도 기어코 해주신다. ​

​3.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수다를 떠는 한 환자 아주머니가 우리 엄마를 너무 쫓아다녀서 저번 항암 치료 때 너무 고생했다. 한시도 안쉬고 떠들면서 우리 엄마 입원 침대 바로 옆으로 침대까지 배정받아 우리 가족 모두 밤낮으로 심히 괴로웠다. 내가 엄마 힘드시니 그만 말 걸어달라고 한마디 하려다 엄마가 불편해하실까봐 참았다.

4. 심보가 못된 건지, 가끔 전철에서 연인들을 보며 속으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가끔 한다. 오늘 내 옆에 있던 커플은 여자가 남자에게 죽고 못사는 것 같은데, 여자가 자꾸 남자몸을 더듬고 과하게 예쁜 척, 귀여운 척을 해서 안보려고 엄청 노력했다. 그 여자는 자리에 앉고 남자친구는 내 옆에 서 있었는데 남자친구를 올려다보며 남자의 허벅지 엉덩이 등을 계속 더듬었다. 남자친구 눈에는 저 과한 표정도 사랑스럽겠지. 나 점점 꼰대되가나…

5. 일요일에 엄마 가발 다듬으러 동네 미용실에 갔다. 인모가 아닌 건 원래 안해준다는데, 사정해서 간신히 손질했다. 엄마가 항암 치료 금방이라고 비싼 거 사지말라고 하셔서, 인모 가발을 안샀는데​ 살걸 그랬나 싶다. 지금 산 가발도 일본 브랜드라 자연스럽고 가발인 거 티 하나도 안나는데 엄마는 어색하다고 한 번도 안쓰셨다.

6. 미용실에서 나왔는데 웬 중국인 아저씨가 술에 잔뜩 취해서 회색 내복만 입고 동인천 일대를 활보하고 다녔다. 늙은 중년 남성이 내복만 입은 모습이 너무 역해서 괴로웠다.

7. 친구가 공들이던 남자와 사귀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난 근데 진짜 아직 먼건지…어째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남자가 진심으로 친구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 예감이 제발 틀리길.


수술 후

일상 2016. 8. 16. 12:54

엄마가 그렇게 아파하는 걸 처음 봤다. 수술 전에 엄마랑 농담으로 애 낳는게 아플까. 이 수술이 더 아플까. 하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마취에서 깨서 정신 없는 와중에도 이게 백배는 더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수술 전날 입원한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울었다.

엄마가 입원하기 전까지는 계속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좀만 더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우리 엄마는 건강하게 일도 하고 평소처럼 깔깔깔 웃으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환자복 입고, 병실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정말 현실이구나 싶었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엄마도 나도 엉엉 울 것 같아서 엄마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간신히 엄마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엄마가 60대가 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건강하실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보다 일찍 엄마와 이별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 혼자 남겨놓고 가면 도저히 편히 눈을 못감을 것 같다고 하신 것이 떠올라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아무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수술 침대에 누워서 울고 계시는데, 나는 도저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걸 못볼 것 같아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내가 엄마 손을 잡아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우리 엄마는 결국 4기초 진단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의사가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간혹 전이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서 개복하자마자 닫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수술을 6시간 가량 하셨으니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좌절하다가, 지금은 엄마가 항암치료가 가능한 정도라는 것에 감사드린다.

일요일에 교회만 가는 정도였는데, 큰 고난이 닥치고보니, 종교가 큰 힘이 된다. 기도를 하면 엄마가 완치될 것만 같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제 나도 책임이 좀 무거워졌다. 제일 걱정인 건, 아빠다. 아빠가 잘 하실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다르게 엄마 마음 편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이런 때 일수록 나나 동생이 아빠랑 잘 지내서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어쨌든 2016년 이 덥고 또 더운 여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잊고 싶은 여름이 되겠지만, 아마 절대 잊지 못하겠지. 


응급실

일상 2009. 11. 11. 12:09
저번 주 일요일에는 팔자에도 없던 응급실에 갔다왔다.
11월 1일 이었는데 그 때가 생리를 할 때쯤이었지만 생리통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난 평소 때 별로 생리통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때 난 생리를 안하고 있었다. (여기 혼자 블로그 한다고 별 말을 다쓰는구나)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생리시작하기 전 통증이었던 거 같다.
아침에 배가 아파서 깼는데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어도 그 배가 아닌거다. 그런데 점점 그 통증이 심해지니까 엄살이 심한 나는 너무 아프다고 난리를 쳤다. 너무 아팠다. 정말. 그냥 장염 이런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괴로움. 아파서 식은땀이 그렇게 많이 나보기는 처음이었으니까.
결국 우리집과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솔직하게 말하라면서 여러가지 물어보고 또 정말 끔찍한 검사를 하더니 다 정상이라고 했다. 비용은 10만원 넘게 나왔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링겔을 맞았을 때 사실 모든 통증은 가라앉은 뒤였다. 일어나자마자 물한모금 못 마시고 와서 배도 고프고, 링겔 주사도 불편하고 다른 나보다 더 아픈 사람도 많은데 점점 민망해졌다. 그 링겔 진통제라고 했는데 정말 효과가 직빵이었다.
빈속이라 타이레놀 안 먹었는데, 다음부터는 그냥 빈속이어도 타이레놀 먹고 응급실 안 가기로 했다.

내가 간 응급실은 외상은 없는 사람들이 가는 응급실이었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가고 들어오고 그랬다. 내 맞은 편 젊은 남자 둘은 한명은 산소마스크 하고 한명 역시 산소마스크 하고 숨을 제대로 못쉬는데 불쌍해보였다. 특히 어린 남자애는 귀엽게 생긴 애였는데 윗층에서 담당 의사가 내려와서 수능 꼭 봐야 하는 거냐고 묻고 수능 못볼 것 같다고 말하더라. 원래 많이 아픈 애고 주기적으로 오는 애 같았다. 그 아이 부모님은 수능 안봐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을 하면서 걱정스럽게 걔를 쳐다보고 옆에 있는 산소마스크 낀 남자애는 꽤나 건장해 보였는데 얼굴이 사색이 되서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거기가 신종플루 거점병원이라 얘기하는 거 들으니까 신종플루 확진 환자들도 많던데, 난 현재 멀쩡하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어린 애들 응급실 이었는데, 원래 시끄럽고 뛰어다니고 그러는 게 정상인데 걔네들도 아프니까 축 쳐져서 엄마한테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발견한 건데 걔네들은 의사가 그냥 가까이 가기만 해도 엉엉 울었다. 그동안 얼마나 당한 게 많았으면.
아픈 건 너무 싫다. 아프면 성격이 이상해질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정말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용납하기 힘든 성격이 될 수 밖에 없을 수도 있겠지.
난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다면 다 감안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들어선 아니다. 난 나중에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신체 건강한 남자 만나고 싶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역시 그런 사람들이 착하고 편하고 좋다. 여러 고생을 해봤으면, 속이 깊어지고 남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심이 깊어진다는 건 거짓말이다. 고생 안하고 잘 자란 사람이 오히려 더 남을 배려하고 남들에게도 허용적이고 그런 경우가 많더라. 뭐 이제까지 봐온 바로는 그랬다. 그런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여러검사를 하고 결국 딱히 원인을 못찾고 오는데 의사가 나중에 산부인과나 가보라고 했다. 다음달에도 생리 오기전에 이렇게 생리통이 심하다면 가야하나. 사실 한번도 안가봤는데.
이제까지 생리통때문에 고생했던 친구들 심정 다 이해한다. 정말 배 아픈 것 때문에 손끝 발끝이 다 아파보긴 처음이었다. 매달 그런다고 생각하면 오마이갓. 그건 아니겠지 설마.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이 시작되려고 하는데 난 벌써 봄이 그립다. 으아.. 나 겨울 너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