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편지의 주인공

일상 2015. 5. 11. 00:53

모교에 일하면서 졸업생과 재학생 모두의 학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난 대학 다닐 때 알았던 모든 이의 학적을 조회해봤다.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는 물론이고 졸업 성적, 석차, 주소, 졸업 후 취업한 회사, 출신 고등학교, 입학 전형 등등 대학교 직원으로서 알 수 있는 개인 정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당연히 나와 관련 있었던 남자들의 정보를 더 자세히 볼 수 밖에 없었고,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다른 건물 갈 때마다 제발 만나지 않기를 기원하곤 했다.

 

저번에 용인 친구네 집 놀러가서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에게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기억 저편에 있던 남자애가 떠올랐다. 대학교 근무할 때 걔 정보도 조회를 해봤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구나.. 하고 그 뒤로는 그냥 잊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걔 이름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신기했다.  

 

갑자기 생각난 그 아이는 2003년에 입학했고 나보다 1년 늦게 입학했지만 재수를 해서 나와는 동갑이었다. 사투리를 심하게 썼고, 덩치가 컸다. 어느날 걔와 내친구 이렇게 셋이 함께 저녁을 한번 같이 먹은 후, 학교 앞 당구장에 갔다. 걔는 가끔 나에게 연락을 했지만, 딱히 의미있는 연락은 아니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걔를 무척 싫어했다. 결국 얘가 나에게 연락하는 것 때문에 나는 남자친구와 크게 싸웠고, 어쩔 수 없이 걔와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게 걔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의 전부다.

 

그런데 2005년 4월에 뜬금없이 걔에게서 편지가 왔다. 보낸 주소를 보니, 얘는 공군에 입대했고, 벌써 상병이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 얘는 대체 누굴까... 싶었다. 나는 이름의 주인공을 기억해내기 위해 엄청 애를 써야만 했다. 마침내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나는 편지를 읽었다.

 

학교에 있을 때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이 남자는 예상 외로 글을 무척 잘썼다. 정말 잘 쓴 편지라, 난 그 편지를 200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나 따위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줬다는 것이 황송할 지경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편지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걔는 여전히 구만리 같이 군생활이 남아있었고, 걔가 전 남자친구의 후배라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무척 꺼려졌다. 전 남자친구와 관계된 모든 것이 싫었기 때문에. 2005년 부터 나는 여러가지 일을 겪었고, 원래 살던 집에서 이사까지 하면서 걔와는 결국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가끔 편지의 내용이 떠올라 위로를 받곤 했지만 그것도 그 뿐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것이다.

 

용인에 다녀온 뒤 왜 이런 생각이 나는건지 신기해서 편지를 모아놓는 박스를 뒤졌고, 걔 편지가 나왔다. 어디서 그런 미친 짓을 할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모교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이 남자의 학적조회를 부탁했고, 학적에 있는 핸드폰 번호로 걔가 2005년에 나에게 보낸 편지사진을 찍어 보냈다.

 

솔직히 좀 망설였다. 내가 이 남자 애라면 정말 황당할 것 같았다. 또 중간에 전화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고, 자기 전화번호를 무단으로 빼돌렸다는 사실에 화가 날 수도 있고, 문자를 받았음에도 아예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일하는 기계 처럼 살고 있을 사람한테 이런 황당한 문자는 반가웠으면 반가웠지 절대 짜증날 문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낸 황당한 문자에 답장이 왔는데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보낸 편지 맞고, 부대 주소 보니 본인이 근무했던 부대도 맞는데, 내가 누군지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었다. 정말 재밌는 반전이었다.

내 일생에서 남자에게 받은 편지 중 그 편지는 단연 제일 잘 쓴 편지였고, 이 정도 편지면 엄청 오래 고민하고 썼겠구나 생각했는데 정작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나를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니.

 

이 얘기를 들은 남동생은 군대에서 여자에게 쓴 편지를 기억 못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그 남자가 거짓말 하는 거 같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때는 정말로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얘가 군대에서 외로운 마음에 이런 편지를 한 열댓명한테 보냈나보다.. 했다. 그래서 정 기억 안나시면 기억 안하셔도 된다, 직장생활 어차피 매일 똑같은데 그냥 저 때문에 잠시 재밌는 일이 있었다 생각했으면 좋겠다. 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기억이 났다고 그 남자에게 연락이 왔고, 어찌저찌 하다가 그 남자를 10년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사투리는 여전히 심하게 썼고, 평일에는 무조건 야근, 주말에도 근무를 밥 먹듯이 하며 영혼없는 사람처럼 피폐하고 살고 있었다.

 

내가 벌인 황당한 일 때문에, 며칠동안 꽤 재밌었다. 편지의 주인공인 이 사람과 내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 어떻게 보면 10년이나 지난 편지 가지고 여자가 남자에게 수작을 건 거니깐 걔한테 좀 쪽팔리기도하다.

하지만 요즘 가만히 있다가도, 밤낮 일만 하는 걔가 참 딱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고, 걔도 가끔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있는 걔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군대간 동생한테 면회 갔다온 얘기를 갑자기 하고 싶었다. 우리엄마는 필요이상으로 음식을 엄청나게 많이 싸 가는데 매번 갈 때마다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저번에는 심지어 새우랑 꽃게를 저기 연안부두 가서 엄청 많이 사서 삶아갔다. 내동생은 굿 초이스라고 미친듯이 새우 까먹고. (맛있긴 하더라)
언제인지 기억은 안나는데 원래 맨날 토요일에 가다가 일요일에 한번 면회간 적 있었다. 우리 엄마는 동생이 다니는 교회는 어떻게 생겼는지 가봐야겠다고 가자고 그래서 결국 우리 가족 4명이 군대에 있는 교회에 갔다. 결국 우리만 사복입고 맨 뒤에 앉았다. 사람들이 신기한지 힐끔힐끔 쳐다보고 어휴. 진짜. 찬송가도 거기서 들으니 완전 군가야.

이제 거기 젊은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했는데 군인 애들이 아예 대놓고 엎드려서 자는거다. 내동생 말로는 교회오는 이유가 일요일에 내무반에 멀뚱멀뚱 앉아있기 싫어서 그냥 자러 오는 거랜다. 뭐 그 목적에 충실하게 거기 있는 거의 3분의 2 이상이 다 엎드려서 자는데 설교하던 목사님 옆에 있던 드럼에서 갑자기 챙! 하는 소리가 나는거다. 그래서 아니 이건 뭔소리인가. 하고 쳐다봤더니 그 목사 왈 이제부터 예배시간에 2분의 1이상이 자면 드럼을 치기로 했다고. 크크크크. 별 거 아니지만 예배보다 갑자기 드럼 치는 그 상황과 아이디어가 너무 웃겨서 혼자 킥킥 댔다.

내동생 밑으로는 이제 3명이나 들어오고 대구에서 온 애는 오자마자 일주일만에 12키로가 빠져서 얼핏보면 주진모 같이 생긴 미남이 되었다고 그러고 울산에서 온 애는 경상도에서 왔는데도 사투리 하나도 안 쓰는 애고 서울에서 온 애는 뭔가 맘에 안든댄다. 서울에서 온 애가 89년 생이랜다. 맙소사. 군인아저씨가 89년생이래. 대단하다.
국군의 날 행사 때문에 두달 넘게 연습하고 대통령 앞에서 깃발들고 미친듯이 뛰어다녔는데 휴가도 안준다고 짜증부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2008년 내에는 휴가 못나올 듯 싶다. 아.. 추운데 또 우리 엄마는 면회가자고 하겠지. 내동생네 부대 짱추워. 미안하다 동생아. 난 이기적인 누나야. 누나는 추워서 가기 싫어.

대학 때 그나마 최고 친했던 친구를 안 만난지 1년이 되간다. 보고싶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이 친구 뿐 아니라 대학 때 알던 모든 사람을 안만난지 거의 6개월 이상이다. 이상하게 시간이 안나는데 주말에 보면 하는 건 잠 퍼자고 인터넷 하는 것 뿐이니..
갑자기 허하고 그래서 걔 이메일로 꽤 긴 편지를 보냈다. 답장 확인하는 걸 까먹고 있다가 일주일 지나서 확인했는데 너무 짧은 답장이 와 있었다. 별 거 아닌데 갑자기 너무 외로웠다.

주말마다 시간을 내서 매주 누구 만날지 시간표 만들어서 만나고 다녀야 모든 인간관계가 유지되는 걸까? 사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들구나.

오늘 아침에 아파트 통로를 나왔는데 바닥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눈은 오는데 우산가지러 올라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눈 맞으며 걸어갔다. 새벽에 혼자 출근하면서 맞는 첫눈이라. 꽤 괜찮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다시 외로워졌다. 이젠 새벽이 괴로운 계절 시작이구나.

오늘은 회사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다 꼬였다.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인데 그나마의 위로는 내 눈이 겉 보기에도 조금 부어 있어서 이번 토요일 행사에는 빠지게 되었다는 거. 나 이번 토요일에 안과나 가려고 했는데 하필 이런 때 대학 선배가 보잰다. 그 선배는 참~~ 특이한게 꼭 내가 동생면회에 가 있거나 다른 친구 만날 약속 잡아놓고 이러면 뭐하냐고 물어보더라. 크크큭 안만난지 거의 8개월이 넘었네. 아 근데 별로 안 땡긴다. 이제 사람 만나는 것도 어색해져버렸는지 귀찮다.


내동생이 자대 배치를 받고 우리는 4월 5일에 면회를 갔다. 특공부대여서 그런건지 그 부대가 원래 특이한 건지 모르겠지만 부모님이랑 난 내동생 내무반까지 구경가고, 부대 내 행정실에서 행정보급관, 지역대장, 심지어 대대장까지 면담을 했다. 뭐 난 옆에서 구경하는 거였지만 말이다.
아.. 동생 면회 간거에 대해서는 워낙 할말이 많아서 나중에 또 다시 쓰겠다.
근데 그 이후로 내동생이 전화해서 말하길 군대에 있는 모든 간부가 동생을 볼때마다 나랑 2지역대장 이랑 만나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본다는 거다. 2지역대장이면 중위라는데. 나 참. 군대에서 소개팅 제의가 들어올 줄이야.
우리가족은 4월에 면회 갔으니 이젠 5월달에나 다시 면회 가야지 하고 있었는데 4월 19일에 걔네 부대에서 원래 봄마다 하는 행사가 있다는거다. 우리가 이런 저런 눈치로 살펴 본 결과 그 날은  막내네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 것 같고 행정보급관이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했고 해서 우린 2주만에 또 면회를 갈 수 밖에 없었다. 걔네 내무반 애들한테 먹을 거 줘야 하는 거라서 엄마도 도와줘야 하고 해서 결국 나도 또 갔다.
근데 진짜 4월 19일에 갔을 때도 그 부대 모든 간부가 다 제2지역대장 잘생겼다고 한번 만나보라고 하는게 아닌가. 동생이 이미 누나가 생각없다고 했다고 말해놓은 상태라 나도 뭐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또 간부들과 인사를 끝마치고 동생 내무반 애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초과인생의 표본인 내가 아무리 군인 어린이 들이지만 남자에 둘러싸여 있으려니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말 한마디 못하고 애들 밥먹고 있는 걸 훔쳐보고 있었다.
10명도 안되는 애들이 밥 먹고 있는데 2시방향에 앉아서 밥먹는 놈을 보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다른 애들은 다 2D 로 보이는데 어떤 놈 하나만 3D  입체영상으로 보이는 느낌이랄까? 서로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닌데 난 갑가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난 결국 그 이후로 놈을 한번도 제대로 못 쳐다봤는데 그러고나니 또 그 다음부턴 다른 소리는 다 mono 인데 그 놈 목소리만 stereo 로 들리는 거다.
그 놈은 이제 제대 40일 남겨놓은 병장이라는데. 미쳤나. 어려도 한참 어린놈한테. 동생 부대 소대장이 83년생이라는데 말 다했지.
결국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외면하면서 집으로 왔고 다음날 동생이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내가 집에 가고 나서 그 병장이 나한테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내가 자기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는거다.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무진장 좋았다. 어찌 안 좋을 수가 있나. 눈 한번 못 마주치고 말 한번 못하고 헤어졌지만 눈에 들어왔던 남자가 관심을 표명하는데. (헉 심지어 나 그 병장 이름도 몰라)
한편으로는 또 슬펐다. 그 병장이 내 나이를  동생한테 듣고 쇼크 받았다는 거다. (자기 또래인 줄 알았다나) 하긴 나도 쇼크 받았다. 86이라니! 아.. 86. 이 3살 아래라는 나이는 호감을 잃기에는 충분한 나이 차 아닌가. 적어도 나한테는. 내가 늙었음을 다시한번 절실히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4월 19일 이후로 가끔 그 병장이 생각난다. 그 병장이 좋아졌다기 보단,
처음보고 서로 괜찮게 생각했다는 그 상황 자체가 신기하고 좋다.
말로만 듣던 게 가능한 거구나. 하는 희망도 갖게 되고 또 나는 남한테 호감을 갖는 데 단 1초도 안걸리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말이다.

참고로 19일에 하도 들어서 결국 이름까지 외워버린 2지역대장님은 그날 다른데서 훈련을 받느라 자리에 없었다. 소개팅 할 생각이 없긴 해도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긴 했는데. 흣.


p.s 백만년만의 여유라 오랜만에 2개나 포스팅. 아. 내가 4월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4월이 날 배신하나. 너무 바쁘다.


설레임.

일상 2008. 3. 19. 11:48

3주 연속 우울한 금요일을 맞을까 두려워서 금요일에 휴가를 냈다. 어제 얼마나 눈치를 보며 휴가를 냈는지 모른다. 저번에는 다른 팀 부장이 쟤는 왜저렇게 일찍 퇴근하냐고 뭐라고 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다. 그 얘기 듣고 진짜 열받았다. 님이 뭔상관?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이런 때일 수록, 나는 바빠도 휴가내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일 없으면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연한 의지로!
정말 두려운 소문은 따로 있다. 나 그 소문이 진짜면 앞뒤 생각치않고 관둬야지 했는데 나 그럴 수 있을까? 아.. 아니야. 그 소문이 진짜면 관둬야지 어떻게 일해? 그건 인권침해야.

뉴스를 통해 금요일 날씨를 확인하니 비도 안오고 화창하댄다. 재작년 그러니까 24살 때 친구랑 종로 인사동 일대를 놀러다녔던 기억이 났다. 오전 11시쯤 만나서 저녁까지 먹고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왔는데 아마 4월 말 정도였지. 24살 봄은 진짜 잔인했다. 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유일하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나들이가 그 나들이다. 서울은 평일 낮에 보면 한가롭고 이쁘기까지 한 도시다. 저번에는 친구랑 남산, 명동, 경복궁 등등 완전 관광코스로만 하루종일 놀았던 적이 있는데 어찌나 유익하고 기분이 좋은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마구 추천하고 싶었다. 특히 남산은 케이블카가 있어서 올라가는데 힘들지도 않고 올라가서 보면 또 기분이 극락이고. (뭔가가 극락이다. 라는 표현은 친구가 쓰는 표현인데 벌써 옮아서 나도 사용하고 있다)

이번 휴가에도 나랑 놀아줄 친구는 24살 4월 말에 놀아줬던 친군데 우리 사진도 그때처럼 찍기로 했다. 엊그제는 그 때 찍은 사진을 다시 보여주면서 우리 완전 늙었어. 나이 왜이렇게 쉽게 먹냐. 라고 했는데.. 얼굴이 완전 애띠고 심지어 지금에 비해선 해맑기까지 한거다. 서글퍼졌지만 그래도 그땐 즐거웠고 그럼 된거지. 어제 마을버스 타고 오면서 이번 주 휴가 낼 생각을 하니까 요근래 들어 최고로 가스이 쿵쾅 거리는 게 아닌가. 휴가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이런다. 아.. 재밌겠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서울시청앞 분수대도 이제부터 다시 가동한대고, 잔디에 새싹은 좀 돋았나? 아 신난다. 요즘 내 일상에 너무 뭔가가 없었다. 맨날 퇴근 후 바로 집으로 와서 씻고 어떻게든 10시 반 이전에 취침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살아온 3월이여. 점심시간에 청계천 가서 나는 오늘 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며 직장인들 약올려야지. (그래봤자 나도 직장인이지만) 원래는 월요일에 쉴수도 있고 월요일에 쉬는게 나한테 훨씬 유리하지만 이번주 금요일도 안쉬었음 분명히 또 우울했을거다.

아 군대가서 아직도 훈련받고 있는 동생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부대로 배치될 것 같다. 키 175 이상만 간다는 소문도 있고, 그냥 군인보다 훈련 두배 행군 두배 라는 소문도 있다. 우리 엄마는 어디서 그렇게 안좋은 소문만 듣고 오시는지. 내무반도 일반 군인과 다르게 10명 밖에 안 쓰고 월급도 무려 4만원이 많댄다. 거기서 많이 하는게 헬기 에서 줄타고 내려오는 거라는데 이거 생각하니까 블랙호크다운에서 블랙번인가? (블랙호크다운을 5번 넘게 봐놓고 그거 하나 모른다. 하핫) 그.. 반지의 제왕에서 꽃미남 아. 이름 기억안나. (결국 네이버에서 찾았다. 올랜도 블룸!) 하여튼 그 놈이 헬기가 흔들려서 땅에 떨어지고 의식불명 되는 게 생각났다. 고작 생각난게 이런 불길한 거라니! 우리 엄마가 대령으로 제대한 삼촌한테 여기 어떤데냐 물어봤더니 요즘 군대 죽을만큼 훈련 안시킨다. 다 할 수 있을만큼 시키는거다. 라고 말씀하셨댄다.  근데 그것까진 좋은데 삼촌은 왜 마지막에 엄마한테 기도 많이 해야겠다는 말을 덧 붙이신건지 원. 그 말에 우리 엄마는 다시 심란해지셨다.

휴가를 이틀 앞두고 있는 수요일. 오늘도 불길하게 일이 없다. 그리고 나 일하기가 너무 싫다. 오늘은 특히 싫은걸. 좀있다 점심먹고 치과에서 스케일링 받기로 했는데 아프면 어떡하지. 제대로 된 이가 거의 없고 금니도 엄청 많은 나는 치과에 대한 안좋은 추억이 너무 많다. 설마 스케일링 하다가 또 뭔가를 발견해서 견적 100만원 입니다. 하는 건 아니겠지. 무사히 스케일링 받고 오늘도 결연한 의지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퇴근해야겠다.


동생이 군대에 갔다.

일상 2008. 2. 27. 11:27

어제는 동생의 입대일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의정부에 갔는데 그곳이 바로 306보충대. 눈이 별로 없는 겨울이었는데 어제 아침에는 눈이 엄청 쌓여 있었다.
어제 군대가는 인원이 약 2400명이라는데 다들 어찌나 어리든지 내가 나이 먹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일이 많으셔서 못갔는데 지금 생각으론 안가시길 잘한 거 같다. 가면 100% 많이 우셨을 것 같아서..
집앞에서부터 우셨는데 가셨음 많이 우셨겠지.
내가 보기엔 그냥 군대 보낼때 안울고 잘가~~ 라고 말하는게 가는 사람한테나 가족한테나 좋은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냥 잘 갔다오라고 하고 울진 않았다. 몸 아파서 안가는 거 보단 낫잖어~ 하고 말았지.
2월 말에 들어가는 거고 3월부턴 점점 따뜻해질테니까 날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100일휴가가 없어졌기 때문에 동생은 7월 경에나 휴가를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아직은 실감이 안나는데 나중에 동생 옷이 소포로 도착함 진짜로 실감 나겠지.

내가 가봤던 훈련소는 친구들 & 나 & 전 남자친구가 갔던 공군 진주 훈련소 인데, 4월이라 날씨가 징그럽게도 좋았다. 걔 갈 때는 눈물 났는데. 흐흐. 뭐 많이 어렸으니까.
근데 내 주변에 의외로 그 진주 훈련소 다녀온 여자들이 많다. 흠.. 공군 가는 애인 둔 사람들은 많이들 가는건가? 내가 그냥 흘리는 말로 나 진주 훈련소는 가봤는데. 라고 말하면 주변에서 나도. 나도. 이런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란다는 거.

동생을 보내고 차를 타고 오는데 차가 어찌나 밀리든지,(밀리는 게 당연하지만) 5시쯤 집에 도착해서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 머리가 아파서 허겁지겁 타이레놀 이알을 먹고 잤다. 자고 일어나니 8시. 그렇게 자고도  밤 되니까 졸려서 컴퓨터 좀 하다가 12시 쯤 잤다.

오늘 아침까지도 우리 엄마는 기분이 완전히 다운된 상태. 하지만 뭐.. 내동생이 바보도 아니고 대부분은 몸 건강히 다녀오는 군대니깐 잘 다녀오리라 믿는다.

거기 있던 2400명 남자애들 오늘부터 어제와는 전혀 다른 하루가 펼쳐질 거란 생각이 하니 쌩뚱맞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하는 일을 안해도 되고, 매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당연해지지 않아 지는, 한 사람의 인생이 변하고 인생이 너무 거대하다면 하다못해 한 사람의 생활패턴이 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은 얼마일까?
난 단 1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귀던 사람이 헤어지자고 하는 순간. 내가 사표를 내는 순간. 한국을 떠나는 순간. 결혼하는 순간. 등등 모든 게 다 순간인데. 그 순간을 전후해서 더 행복할 수도 더 불행할 수도 있는건데.
쉽게 변할 수 있을 것 같은 내 일상은 왜이렇게 하루하루가 구질구질하고 재미없고 지루한걸까. 다만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더 즐거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뭐가 있을까.
문득 내가 직장인이 되었다는 게 지금 인생에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적어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사실은 그럴만한 용기가 없어진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몸이 안좋아서 그런지 우울한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제발 뭐라도 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여행은 이미 한 1년전에 갔다온 것 처럼 까마득해진지 오래고.

P.S 저번에 엘리베이터에서 이사님을 만났다. 처음 들어올 때 면접을 보셨던 분이라 날 기억하고 계셨는데, 오랜만에 본거라 그런가 "일은 이제 좀 재밌나?" 하고 물어보시는 거다. 한심하게도 난 거기에 대고 되물었다. "근데.. 일을 재미로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나요? " 라고. 크하하하하. 나 참. 간도 부었다. 그 때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진 못할지언정 이런 망언을. ;; 내 물음에 대한 이사님의 대답은 당연히 있다면서 그 사람 중 하나가 나라고 하시는거다.
난, 흥! 거짓말! 말도 안돼! 라고 생각했다. 물론 속으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