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편지의 주인공

일상 2015. 5. 11. 00:53

모교에 일하면서 졸업생과 재학생 모두의 학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난 대학 다닐 때 알았던 모든 이의 학적을 조회해봤다.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는 물론이고 졸업 성적, 석차, 주소, 졸업 후 취업한 회사, 출신 고등학교, 입학 전형 등등 대학교 직원으로서 알 수 있는 개인 정보는 생각보다 많았다.

당연히 나와 관련 있었던 남자들의 정보를 더 자세히 볼 수 밖에 없었고,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다른 건물 갈 때마다 제발 만나지 않기를 기원하곤 했다.

 

저번에 용인 친구네 집 놀러가서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에게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기억 저편에 있던 남자애가 떠올랐다. 대학교 근무할 때 걔 정보도 조회를 해봤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구나.. 하고 그 뒤로는 그냥 잊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걔 이름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신기했다.  

 

갑자기 생각난 그 아이는 2003년에 입학했고 나보다 1년 늦게 입학했지만 재수를 해서 나와는 동갑이었다. 사투리를 심하게 썼고, 덩치가 컸다. 어느날 걔와 내친구 이렇게 셋이 함께 저녁을 한번 같이 먹은 후, 학교 앞 당구장에 갔다. 걔는 가끔 나에게 연락을 했지만, 딱히 의미있는 연락은 아니었다. 당시 남자친구는 걔를 무척 싫어했다. 결국 얘가 나에게 연락하는 것 때문에 나는 남자친구와 크게 싸웠고, 어쩔 수 없이 걔와는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게 걔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의 전부다.

 

그런데 2005년 4월에 뜬금없이 걔에게서 편지가 왔다. 보낸 주소를 보니, 얘는 공군에 입대했고, 벌써 상병이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고 얘는 대체 누굴까... 싶었다. 나는 이름의 주인공을 기억해내기 위해 엄청 애를 써야만 했다. 마침내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나는 편지를 읽었다.

 

학교에 있을 때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이 남자는 예상 외로 글을 무척 잘썼다. 정말 잘 쓴 편지라, 난 그 편지를 200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나 따위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줬다는 것이 황송할 지경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편지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걔는 여전히 구만리 같이 군생활이 남아있었고, 걔가 전 남자친구의 후배라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무척 꺼려졌다. 전 남자친구와 관계된 모든 것이 싫었기 때문에. 2005년 부터 나는 여러가지 일을 겪었고, 원래 살던 집에서 이사까지 하면서 걔와는 결국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가끔 편지의 내용이 떠올라 위로를 받곤 했지만 그것도 그 뿐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것이다.

 

용인에 다녀온 뒤 왜 이런 생각이 나는건지 신기해서 편지를 모아놓는 박스를 뒤졌고, 걔 편지가 나왔다. 어디서 그런 미친 짓을 할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모교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이 남자의 학적조회를 부탁했고, 학적에 있는 핸드폰 번호로 걔가 2005년에 나에게 보낸 편지사진을 찍어 보냈다.

 

솔직히 좀 망설였다. 내가 이 남자 애라면 정말 황당할 것 같았다. 또 중간에 전화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고, 자기 전화번호를 무단으로 빼돌렸다는 사실에 화가 날 수도 있고, 문자를 받았음에도 아예 무시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일하는 기계 처럼 살고 있을 사람한테 이런 황당한 문자는 반가웠으면 반가웠지 절대 짜증날 문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낸 황당한 문자에 답장이 왔는데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보낸 편지 맞고, 부대 주소 보니 본인이 근무했던 부대도 맞는데, 내가 누군지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었다. 정말 재밌는 반전이었다.

내 일생에서 남자에게 받은 편지 중 그 편지는 단연 제일 잘 쓴 편지였고, 이 정도 편지면 엄청 오래 고민하고 썼겠구나 생각했는데 정작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나를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니.

 

이 얘기를 들은 남동생은 군대에서 여자에게 쓴 편지를 기억 못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그 남자가 거짓말 하는 거 같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때는 정말로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얘가 군대에서 외로운 마음에 이런 편지를 한 열댓명한테 보냈나보다.. 했다. 그래서 정 기억 안나시면 기억 안하셔도 된다, 직장생활 어차피 매일 똑같은데 그냥 저 때문에 잠시 재밌는 일이 있었다 생각했으면 좋겠다. 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기억이 났다고 그 남자에게 연락이 왔고, 어찌저찌 하다가 그 남자를 10년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사투리는 여전히 심하게 썼고, 평일에는 무조건 야근, 주말에도 근무를 밥 먹듯이 하며 영혼없는 사람처럼 피폐하고 살고 있었다.

 

내가 벌인 황당한 일 때문에, 며칠동안 꽤 재밌었다. 편지의 주인공인 이 사람과 내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또 어떻게 보면 10년이나 지난 편지 가지고 여자가 남자에게 수작을 건 거니깐 걔한테 좀 쪽팔리기도하다.

하지만 요즘 가만히 있다가도, 밤낮 일만 하는 걔가 참 딱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고, 걔도 가끔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있는 걔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