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년도 내 다이어리의 이름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다.
음헤헤헤헤.
평소 소심의 끝을 달리는 나로서는 가슴이 답답하면 책상에 쪼그려 앉아서 다이어리에 내 우울을 토로한다. 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울적한 감정은 덜어진다.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난 다이어리를 중3때부터 썼는데, 1년내내 한 다이어리를 쓰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해에 다이어리를 샀으면 1년내내 그 다이어리를 쓸 수 있다.
대신 다른 여자애들 처럼 이쁘게 꾸미는 데는 잼병이다. 고작해야 색연필로 찍찍 줄을 긋거나 스티커 하나 띡 붙여놓는 식. 다른 여자애들은 어떻게 그렇게 꾸미는지 신기하다. 근데 난.. 그런거 좀 별로다. 다이어리를 쓰고싶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쓰는 느낌이 들어서.
고1때 홍대 나온 미술선생이 있었는데 그 미술선생의 취미는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여자애들 다이어리 보기 라고 그랬다. 내용은 안볼테니 내가 니네 다이어리 들면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진짜로 안 읽었을까?) 그 이유인 즉슨 여고애들이 다이어리 꾸며놓은 거 보면 가끔 놀랄 정도로 미적으로 멋있는 페이지 들이 있어서 자기가 일할때 아이디어로 참고하기 위해서랜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다이어리 꾸미는 거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미술시간에 해달라고 흐흐. 뭐 내 다이어리는 열외였지만;
난 다이어리를 다 모아놓긴 했는데 예전에는 그 다이어리를 다신 펼쳐보지 않고 나중에 결혼할 때 남편될 님에게 줘야지. 했다. 하지만 며칠전에 재작년 다이어리 한페이지를 읽고서는 미련없이 그 생각을 접었다.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낯뜨겁고 나 진짜 왜이랬니? 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나.
다행스러운 건 내 주변의 다이어리 열심히 쓰는 사람들이 거의 동일하게 나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거다. 내 친구 하나는 며칠 전 발견한 2005년 다이어리를 누가 볼까봐 다 찢어 버리느라 손아파 죽는 줄 알았다고 하고, 다른 친구 하나는 무조건 새해에 작년 다이어리를 아무도 못보게 버린댄다. 이건 다이어리를 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수치감 이다.
나 역시도 가끔 종이가 되어준 나무에게 사죄해야 할 정도로 찌질한 내용들을 적어놓지만, 그로써 내 맘이 가벼워지기 때문에 다음 해 다이어리는 修身에 촛점을 맞췄다.
'마음의 평화'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중에 고민하다가, 왠지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로 정했다. 1년 내내 내 곁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열심히 고르는 편이다. 다이어리에 집착이 심한 한 친구와 함께 작년에는 코엑스를 갔다. 거의 '다이어리 원정대' 라고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코엑스에 있는 모든 다이어리를 봐주겠다는 각오로 다이어리 구경에 임했는데 결국 체력이 딸려서 몇 개 못봤다. 요즘 한참 다이어리가 나오는 시즌이라 틈틈히 구경하고 있는데, 나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한 다이어리 고르기 기준을 알려주고자 한다. (큭. 인생에 절대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1. 딱딱한 하드 커버 별로 안 좋아한다.
2. 그림 너무 많으면 안된다. 특히 글씨쓰는 부분은 흰색이었으면 좋겠다.
3. Monthly 만 쭉 있고, Weekly 만 쭉 있는 것 보다는 Monthly + Weekly 가 12개월 반복 되는게 좋다.
4. Weekly 가 한쪽에 좁게 있는 것 보다 두쪽에 넓게 있어야 한다. (Weekly 제일 열심히 쓴다)
5. 특정 목적을 위한 칸 (용돈기입장, 체크리스트, 쇼핑목록, 영화 티켓 붙이는 란 등등) 싫어한다.
6.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안된다. 가지고 다니기 좋아야 하니까.
7. 본드제본 말고 실제본이 좋다. 그래야 쫙 펴진다.
8. 종이가 두꺼우면서 연필도 잘 써지는 재질이어야 한다.
9. 각 시각별 계획이나 일일 계획표가 있는 건 최악이다.
10. 가격은 이만오천원 이내!
대략 이런 기준으로 다이어리를 구경하지만,
결국 나는 작년에 던킨도너츠에서 공짜로 주는 다이어리를 썼다. 왜냐하면 위의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다이어리는 내가 제작하기 전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년도에 거의 부합하는 다이어리를 찾았으나 아끼는 웹카툰을 그리는 작가들의 다이어리를 보면서 침 흘리다가 결국 저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아래에 보이는 다이어리로 결정했다. (내가 그렇지 뭐;)
내년이면 이제 20대 후반인데. 나 참 어울리지 않게 이런 다이어리 써도 되나 몰라;; 쫌 부끄럽네.
그래도 귀여워서 맘에 든다!!!

프리즌 호텔 : 가을 秋
아사다 지로
문학동네
솔직히 말해서 이번 권은 완전히 실망스러웠다. 진부하고 또 진부했다. 진부함을 노리고 이렇게 쓴 거라면 대성공.
물론 나는 아사다 지로의 만분의 일 만큼도 글을 못쓰지만 어찌되었든 기대가 컸기 때문에 실망도 컸다.
물론 여타 소설가 나부랭이라고 우리나라 서점가를 완전히 점령해버린 젊은 일본작가들보단 괜찮지만.
나카조삼촌의 사랑(보스의 여자를 사랑한다는 뻔한)도, 경찰과 야쿠자가 화해하는 과정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인 기도 고노스케 라는 작자도 마음에 안들었다. 더 괜찮은 캐릭터가 나와줬음 했는데 나나 라는 여자도 매력 없고 기분 나빴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와타나베 간사와 가가와 신스케 라는 사람이 등장했던 것.
이렇게 평면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돌머리를 탓하시든지 말든지. 기도 고노스케 라는 인물은 애정을 갖고 봐달라는 캐릭터인지 환멸하라는 캐릭터인지 이해가 안간다. 아무리 성질머리가 드럽다고 해도 정이 가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요 캐릭터는 정말 아니올시다 이다.
물론 기도 고노스케 라는 인물이 그렇게 폐륜아가 되어버린 건 그로 인해 나카조 삼촌하고 친엄마가 죄책감을 안겨주기 위한 설정이라는 것은 알겠다. 내가 기분 나쁜 건 기도 고노스케가 아니다.
개페미 라고 해도 이 말은 해야겠는데, 남자한테 얻어터지고 막말을 들어가면서도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건 개잡스런 허상이다. 설마 모든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여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하겠지만 아무리 소설이고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기요코라는 인물이 이해가 안가고 나나 라는 인물도 이해가 안간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역겨워하고 혐오스러워 마지 않는 것이 이런 관계다. 이렇게 기분 나쁜 상태에서 왜 계속 읽느냐 집어쳐라 라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그냥 시작은 했으니 끝은 봐야겠다.
다음은 인상 깊었던 구절.
"어느 날 밤, 학교에 가보니 캠퍼스가 개판이 되어 있더군. 책상과 의자는 바리케이드로 변하고, 영문 모를 구호가 캠퍼스에 메아리치고, 한구석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어. 교정은 폐허나 마찬가지였지.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우리는 아냐. 부모에게 학비 받으면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학교에 오는 놈들이었어. 대단한 말들을 하더군. 일본제국주의 타도, 안보반대, 체제분쇄라고 말이야. 제국주의가 대체 어디 있는데. 그런 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 허리까지 차는 눈길을 헤치고 고향을 떠나 개처럼 일을 해서 이제 겨우 대학이라는 문을 뚫고 들어왔는데. 즐거움이라고는 고작해야 일요일 밤에 신주쿠의 라이브 찻집에서 고함 한번 질러보는 것밖에 없었던 나한테 제국주의니 안보니 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냔 말이야. 그렇지 않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이런 말 할 자격 없는 편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살아온 인물이지만.. 취업전선에 있으면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말도 안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오빠가 했던 말처럼 '그 사람들이 뭔데 사람 평가를 해?'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말 재주가 없어서 제대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충분한 비용이 있어야 하며,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하며, 충분한 심적 여유가 있어서 내 의지에 의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예정대로 행한 사치와도 같은 '고생' '고뇌'에 대하여 그것의 자신의 심오한 경험인양, 마치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양 포장하는 것도 짜증이 났고, 그 포장대로 옳타쿠나 하고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짜증이 났다.
그에 비해 예상치도 못하게 내가 정말 피하고 싶은 고통을 남들한테 말한마디 못하고 고독하게 아무도 모르게 다 감당해온, 그걸 견디느라고 남들은 멋있다고 말하는 경험 한 번 해 볼 기회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왜 위에 말한 별것도 아닌 것들보다 못나게 그리고 불행하게 살아야 하느냔 말이다. 그리고 왜 더 게으르고 할 일없이 시간만 보낸 한심한 인간 대접을 받느냐 이거다.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서 억울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난 그야말로 귀찮아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니까 이 벌을 달게 받겠지만,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승승장구 하고 정말로 힘들게 견뎌온 사람이 겉에서 보기에는 초라하디 초라한 20대를 보내고 있다는 게 조금 화가 났다. 저 가가와 신스케의 말 처럼 말이다. 그냥 남들이 하는 거 평균정도만 하기에도 여러가지로 힘든 사람들이 있는거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안그런 사람들을 평생을 두고 비웃고 애송이라 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억울한데 당하는 사람은 어떻겠어.
다음은 내가 결정적으로 실망했던 계기.
나카조 오야붕은 주위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흥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구먼. 자, 이제 칸막이도 없어졌으니 여기서는 딱딱한 이야길랑 집어치우고 신나게 한번 놀아봅시다.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면 또 어떻소. 어이! 술,술 가져와. 술이고 안주고 있는 대로 몽땅 가지고 와!"
예잇, 하고 여급들이 먼저 웃음을 되찾고 달려나갔다.
까까머리를 맞댄 채 손을 꼭 잡고 있던 구로다와 마쓰쿠라 계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오물이라도 만진 듯 손을 털고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돌렸다.
이 앞에서 부터 위의 장면이 있는 페이지를 읽으면서 대략.
'설마 아사다 지로.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경찰과 야쿠자가 화해하는 것은 아니겠지.'
'헉. 왠지 불길한 예감이'
'아아아아악. 안돼. 아사다 지로.. ㅠㅠ'
이런 상태였다. 소.. 솔직히 난 더 드라마틱한 화해를 원했다고.
어찌되었든 난 2권을 다 읽었고 현재 3권 즉 겨울 이야기 편을 읽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반 정도 읽은 지금 내 느낌으로 봐서는 가을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 같다. 이게 시리즈 물이고 어떤 권을 맨 처음으로 읽든지 내용파악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리포터처럼) 인물소개를 또 해주고 또 해주고 하는 건 좀 지겹지만.
아아. 그래도 아사다 지로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 지겹지 않게 해주셔서.; 적응안되는 저 표지는 그렇다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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