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단문 2015. 3. 25. 19:41

요즘은 나 빼고 우리팀이 다 바빠서, 할 일이 없는데 눈치는 보여서 회사에 오래 머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업무시간에 딴 짓도 하고 이렇게 블로그 글도 쓰고 그러고 있다. 

어제 동생이 누나의 자업자득이라고 말했던 걸 들으며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 동생이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며 내가 찬 남자들의 목록을 보낼 때 그 목록에도 전혀 없는 사람이다. 가족도 친한 친구도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그 남자에게 저지른 잘못이 워낙 크기 때문에 도저히 정말 친한 사람한테도 이 남자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남자에게 저지른 짓을 말하면 아마 남자들은 다 나한테 오만정이 떨어질 것이고, 정말 친한 친구도 왜그랬냐고 다그치겠지.  

잊고 있다가 나쁜 동생 때문에 다시 쓰린 기억을 떠올렸다.

벌써 엄청 오래된 일인데, 아직도 그 일이 생생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그 남자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이 엄청 많았다. 그 남자를 멀리서 발견했을 때 난 비겁하게 숨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냥 뒤돌아서 그 사람이 날 안봤길 기원하면서 말이다.

난 그때 뒤를 돌아서 가면 안됐다. 욕을 한사발 먹더라도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난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남자 연락처를 구할 수 있는 언니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며, 그냥 아주 예전에 잘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고 한다고 말했더니, 죽고 사는 문제로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면 지금 연락하는게 더 미친 짓이라고 말렸다.  

나는 가끔 말도 안되게 불행한 일이 닥칠 때 마다, 이게 다 그때 걔에게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생각하곤 한다. 이상하게 효과를 발휘하여 이번에 정신병자처럼 찌질하게 아래 지껄여놓은 사건도 그래 내가 지금 당한 건 내가 걔한테 한 짓보단 덜하잖아. 하는 생각을 하고, 남자가 나에게 주는 고통에 대하여 충분히 수긍하게 되고 심지어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엄청 편안해진다.

그런데 다신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그 사람에게 연락할 방법을 오늘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건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이니 가만히 입닥치고 있어야겠지만, 정신이 나가서 순간 연락을 할 뻔 했다.

물론 나보다 더 나쁜짓을 남자에게 해놓고도 아무런 일 없이 잘만 사는 여자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걔한테 저지른 잘못은 내 기준에서는 너무 큰 잘못이었다. 걔는 다 잊었을지 모르는데... 차라리 걔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지른 잘못이 너무 크다면, 용서를 구하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난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런 나를 보면서 나는 가끔 하나님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이 죄는 하나님은 용서해도 내가 내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난 행복할 자격을 그때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