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고뇌.

일상 2010. 7. 31. 14:26
백수생활을 한지 8월 9일이면 4개월이 되어가려는 찰나였다. 운 좋게 과외하는 집을 잘 잡아서 한달 100만원 남짓의 돈을 벌고, 수영도 배우고 9시까지 잠도 자고 그럭저럭 잘 보내왔다. 나름 만족하면서.
그러다가 앞에 글에 포스팅을 한 다음부터 모든게 급물살을 타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상황정리가 된 상태다.
우선 결론을 말하자면 난 8월 3일부터 한남동으로 출근을 한다.
저번 충무로 보다는 조금 가까워 졌지만 역시 멀다. 인천은 망해가는 도시인지 내가 일할 자리가 없었다. 저번에 송도에서 면접본 곳은 정말로 가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교수가 말해준 곳으로 어떤 곳인지 하고 가봤는데, 전에 일하던 곳에서 미친듯이 하기 싫어했던 업무가 일단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약간 정부의 모 부 밑에 있는 부서 중의 하나로 만약에 다닌다면 정년도 보장이고 육아휴직도 보장이고 4대보험도 들어주고. (일단 가기로 마음 먹고 나니 필사적으로 그 직장의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 중) 난 내 전공을 정말 싫어하지만 대학 때 내 전공을 좀 인정해 주는 분위기고. 정말 문제가 많았던 월급은 올려준다고 해봤자 얼마 안되겠지만, 조금은 올려준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가서 보니 사람들이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 신고 회사 다닌다. (나한테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다. 맨날 화장에 오피스룩 입고 다니는 회사는 절대 못다닐 체질)
또 거기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한남동과 함께 고민중이던 다른 직장에  떨어져버렸다. 에잇.
밤에 누워 생각을 하는데 미친듯이 이력서를 쓰고 면접보러 가서 어떻게든 날 포장하는 짓을 또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한남동은 내가 말하면 될 분위기던데 싶고, 지금 과외 하나만 더 하면 대충 먹고 살긴 하는데 하다가도 그래도 내 나이가 28인데 정기적으로 나오는 월급이 있어야 어른 노릇 하는거 아닐까 하는 여러가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중에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일 거 같아서 결심을 했다. (고민 하는 동안 잠도 완전 설침)
그러다가 어제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한남동에 다녀온 후 그래도 이틀 정도는 생각을 해봐야겠다 싶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금요일 오전 중으로 말씀드리겠다 했는데 전화가 절대 안되는거다. 그래서 계속 전화를 하다가 지쳐서 여기를 추천한 교수에게 전화를 했더니 나한테 크게 화를 냈다. 너는 면접을 어떻게 봤길래 여기서 다른사람 뽑으라고 메일이 오냐고. 내가 한 말이라곤 전에 회사 왜 관뒀냐 물어봐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고 말했는데 그 쪽에서는 힘들어서 관두는 사람이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따졌댄다. 그래서 다른 애 이력서 넣으라고 말을 해놨다고.갑자기 난 다급해졌다. 그래서 모양 빠지게 그 연맹에 매달리는 꼴이 됐고, 난 급히 8월 3일에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
출근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건 바로 과외. 물론 계약서 안 쓰고 하는 일이라지만, 2달만에 과외 이제 못한다고 학부모님들한테 말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 지끈했다. 그리고 내가 과외하는 애들이랑 필요 이상으로 정이 든 것도 걸림돌이었다. 남의 집 사정이라 하나하나 열거하면 안되기 때문에 안 썼지만, 나 중학교 때에 비하면 어쩔 수 없이 의젓해질 수 밖에 없는 애들이라 정도 가고 안쓰럽기도 해서 정을 너무 많이 준 것이 화근.
두군데 과외 중 한 군데는 집이랑 가까워서 일단 다른 선생님 구할 때 까지는 주말에 해주기로 하고, (여기는 주말에 하루 2시간만 시간내서 하면 되는거라 괜찮으면 계속 해도 괜찮을 거 같다;;) 다른 한 군데는 (이 집에서 공부하는 여자애랑 정이 심하게 많이 들어서 울 뻔했음) 일단 내일 가서 주말에 2시간 정도면 봐주겠다고 할 예정인데, 본의 아니게 돈에 미친 사람처럼 당분간은 투잡 뛰게 생겼다.
여하튼 상황이 좀 정리되서 편하다. 다시 새로운 직장에 익숙해질 생각하니까 토나오지만.  

면접 탈락.

일상 2010. 7. 16. 00:54
저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난 예전 회사 경력을 이용하여 다른 일을 할 계획은 없다. 회사를 관둘 때 다시 정상적인 직장인으로 편입은 영원히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는 거 정도는 각오했기 때문에 요즘 내가 이렇게 고용보험 가입자가 아닌 상태로 놀고 있는 것에 조바심도 두려움도 없다.
그래서 과외나 하나더 늘려볼까 하고 나름의 영업활동을 펼쳤는데 그것도 뭐 그닥 잘 되질 않고. (엊그제도 집 가까운데 사는 애 하나 하는건가 싶었는데 별안간 다 취소되고)  
일전에 내가 송도에 간 이유는 이력서 때문이었다.
취업에 목숨 건 사람처럼 하루 종일 구직 사이트 들여다보고 이력서 쓰는 게 하루 일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가끔 집에서 가까운 괜찮은 자리가 있으면 하나씩 그냥 넣어보고는 있다. 그 중 하나가 송도에 있는 거기였는데 평생 계약직이긴 했지만 가깝고 무슨 일 하는지 대충 알겠는거라 이력서를 넣었다.
한달이 넘도록 아무 연락이 없어서 또 서류 탈락이구나 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냥 과외 하면서 당분간은 돈벌자 하고 한건데 저번주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유령도시 송도에 다시 갔는데, 생각보다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한 3명 면접 보는 줄 알았더니 무려 5명.
예전 대학 졸업 후 면접 보러 다니면서 떨어진 면접 같은 경우는 느낌이 딱 오더니 역시나 그 예감이 딱 맞았다. 내가 면접실에 들어가자마자 거기 면접관들이 나한테 관심없는게 대번에 느껴져서 이러려면 날 도대체 왜 뽑았니 싶었다.
경력직으로 다시 취직하는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이렇게 아예 신입 뽑을 때 처럼 여러 명 면접도 안보고 나름 대접해주면서 하는 거 같던데 다시 이런 취급(?)을 받다보니 새롭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랬다.
부모님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난 보기좋게 떨어져버렸다.
역시 사람한테든 회사한테든 거부당하는 느낌은 좋지 않구나.
과외를 두 집 하고 있는데 한 집 애는 다행히 머리가 나쁘지 않은 애라 성적이 꽤 올랐다. 뭐 중간고사 성적이 50점 이었으니 거기서 더 떨어지기도 어려웠을 터. 그리고 다른 한 집 애는 수업을 하면서 얘는 수학에 아예 관심이 없구나.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30점이나 떨어졌다.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30점이나 떨어진 집 갈 때는 껄끄롭고 그렇다. 그리고 그 30점 떨어진 집에서 7월이 중순인데 아직까지도 과외비를 안주고 있다.; 달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그런데 그 30점 떨어진 애는 내가 일차방정식의 활용 부분에서 소금물의 농도, 속도 속력 부분을 너무 못해서 내가 똑같은 문제유형으로만 한 30문제 풀어준 것 같은데, 그래도 전혀 한문제도 못 풀고 과외 시간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중간 중간 문제만 읽어봐도 아는 질문을 해도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아...다음 중간고사 때도 점수 떨어지면 왠지 짤릴 거 같다.
돈도 없고 비도 오고 면접에서 떨어지고 해서 갑자기 좀 우울해졌다.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내 인생.

게으른 블로거.

일상 2010. 1. 12. 10:18

1월 4일에는 눈이 엄청 와서 정상적으로도 1시간 반 씩이나 걸리는 출퇴근 거리를 1호선 타고 일주일 동안 왔다갔다 했다. 블로그에 포스팅 했을 당시에는 엄청 화가 났지만, 한 수요일 쯤에는 이미 내 힘으로 어떻게 되는 부분이 아닌 걸 깨닫고 포기를 했다. 내가 화를 낸다고 해서 수도권에 엄청 쌓인 눈이 다 녹아버리는 것도 아니었고, 얼어붙는 전철문의 결함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놀라운 자연의 힘이여~)
수요일에는 부모님과 일생일대의 중요한 대화를 하다가 속상해서 엄청 울었다. 지금 오면 내가 너무 오바해서 생각한 면이 있긴 한데, 그냥 단 한번도 내가 하려는 일이 성공할 것이라고 용기를 주지 않는 부모님이 야속했다. 부모님도 젊었을 때 꿈도 있고, 희망도 있고, 최악의 경우보다 최상의 경우를 먼저 생각했던 시절이 있으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게 그렇게 최악의 경우만을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가여웠다. 내가 태어나기 전 태어난 후 최상을 생각했다가 숱하게 최악을 경험하셨을 것이고, 당연히 내가 지금 시도하려는 모든 행동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세상의 이치는 어쩔 수 없다. 난 28살이다. 50살이 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알게 될 일을 지금 알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세상에 멋지게 살고싶지 않았던 인간은 없다. 부모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날 믿지 못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기 보다는 세상을 믿지 못하셔서 그랬다고 생각하고 싶다.
1월 13일 부터 14일까지는 경북 문경까지 워크샵을 갔다. 말이 워크샵이지 가서 배드민턴, 사격, 골프, 알까기, 다트, 볼보이 등등 별의 별 운동을 시켜서 그걸 다했다. 하루종일.그리고 이틀동안. 13일 아침 7시까지 회사에 집합하라고 해서 새벽 4시반에 일어나서 용산역직통 첫차인 5시 28분차를 기다렸다. 올해 들어 최악의 추위라는 영하 15도의 새벽이었다. 너무 서둘러서 5시 10분쯤 동인천역에서 첫차를 기다리는데 지독하게 외롭고 추웠다. 아무래도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북극 남극에는 얼음이 녹고,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벤쿠버는 이상고온이라는데 그날 인천은 필요이상으로 추웠다. 레깅스, 얇은 츄리닝바지, 조금 두꺼운 츄리닝바지까지 총 3겹을 입었는데도 추웠다. 위에는 총 5겹. 5겹이고 3겹이고 춥고 외로웠다.
동생이 말년휴가를 나왔다. 17일 복귀하여 하룻밤 자고 18일 제대라고 한다. 내동생이 군대를 갈 때도 난 직장인이었다. 지금도 직장인이다. 동생이 말하길 가만히 있다가도 "나 18일에 제대." 이 생각만 하면 좋아서 미칠 것 같다고 한다. 하루에도 자신이 드디어 제대라는 생각을 100번이상 하는 것 같다. (옆에서 보기에 그렇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분 좋은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저번 주 금요일 내 심경의 이상징후를 느낀 나랑 가장 친한 중학교 친구는 늦었어도 잠깐 자기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1호선이 또 종각역에서 연착되었음에도 친구를 만났다. 그때 놀라운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입사한지 두달쯤 되었을 때 내가 친구한테 그랬더랜다. "나 이 일 적성에 안 맞아. 아닌 것 같아." 라고. 2007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난 미련하게 참았다. 내 동생은 이게 다 누나가 소신없는 삶을 살아서 그런 거라고 했고, 친구는 너무 착해서란다. 소신없고 착한척 한 걸 다른 말로 하면 바보 같아서 겠지. 난 바보다. 바보. 으하하하하하.
대학 때도 전공이 무지하게 내 성격과 안 맞는다고 대학교 1학년 때 이미 뼈져리게 깨달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과로 가봤자 졸업해도 실업자가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여 꾹 참고 4년을 허비했다. 취직을 할 때도 이 일이 내 성격과 정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래도 돈을 벌자. 해서 취직을 했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무식하게 버티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1월 초에 하도 답답해서 썼던 인턴 서류에 붙었다. 썼는지 안 썼는지 까먹고 있었던 이력서였다. 당장 월요일에 인적성을 보러 오라는데, 머리가 나빠서 아이큐 테스트 비스므리한 문제는 절대 못푸는 나는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이 죽일놈의 오지랖 때문에 후배, 선배에게 사실대로 다 말했다. 사실 다른 데 알아보고 있다고. 내가 없으면 힘들 후배만 아니면 얏호 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후배만 생각하면 진심으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남 생각해준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1년 넘게 "같은 적" 을 두고 하루 8시간 이상 함께 한 정이 만만치 않은가보다. 진짜 전우애 비슷한 기분. 그래도 후배는 나보다 2살이나 어리고 키도 크고 얼굴도 이쁘니까 괜찮을거야. 하면서도 못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과거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농담이 아니라 이 블로그에 맹세하는데 지금 후배 결혼하면 축의금 30만원 이상 낼거다.
워크샵 다녀와서 일하고, 금요일에는 야근하고 월요일에는 되도 않는 머리로 시험도 봐야하지만, 2주일 사이에 성인이 된 이후 가장 큰 결심을 해서 그런가 기분이 꽤 괜찮다.  


끝이 나버렸다.

일상 2008. 5. 17. 22:46
이제 이 얘기를 마음껏 해도 될 듯 싶다.

나는 작년 7월 말에 입사했다. 7월 일주일 남겨놓고 입사했기 때문에 월급은 8월부터 받았다. 그런데 약 5개월 정도 이 일을 했을 때 부터 도저히 이 일은 못해먹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데 원서를 쓰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들이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말하는 대학병원 행정직에 서류가 붙었다. 그래서 그냥 부장님께 이제 더이상 여기 일 못하겠다고 그냥 관두려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내가 있는 자리는 1년이상 버틴 사람이 한명도 없는, 거깃다 내 자리를 거쳐간 약 7명의 사람 중 한명은 뇌종양 한명은 자궁에 혹, 이렇게 화려한 병까지 얻어간 자리가 아니던가. 직장생활 다 힘들다고 하지만, 솔직히 내가 하는 일이 뭐다. 라고 말하면 다들 힘들다고 인정하는 일 중 하나다. 스트레스가 엄청나지. 그래서 그런지 누구한테 내가 하는 일 사실은 이거라고 속시원히 말해본 적도 없다.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3명 정도? 뭐 내 인간관계가 좁기도 하지만.
일도 일이지만, 내 윗 상사인 루꼴라가 인간의 인내를 시험해보는 인물 중 하나기에 더 힘들기도 했다. 사람도 사람이고 일도 일이고 도무지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고, 나이 더 들고 나중에 왜 그때 박차고 못 나왔나 후회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관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장님께 관둬야겠다고 말한거고.

그랬더니 부장님께서 육아휴직으로 자리 비운 사람이 오면 나를 다른 자리로 빼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그 여자는 6월 복귀니까 그때까지만 버텨달라고 하셨다. 난 내심 기뻤다. 다시 또 이력서 쓰고 면접보는 끔찍한 짓을 안해도 되니까. 그래. 끝이 있다고 생각하면 버틸 수 있어. 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원래는 그 육아휴직 간 여자가 내 자리로 오기로 되어 있고 그 여자가 오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선배, 나, 복직한 여자 이렇게 3명이서 일하기로 한 건데 내가 있는 곳이 사실 3명이나 필요한 곳이 아니니 나를 다른 곳으로 빼주겠다는 거다. 난 현재 같이 일하고 있는 선배한테 좀 미안했다. 옆에 선배는 내가 관두려는 의사를 비췄을때도 가지 말라. 나는 미영씨를 잃고 싶지 않다. 앞으로 3명이서 일하면 좀 더 수월할거다. 라는 말도 하고 내 생일때는 앞으로도 미영씨 옆에서 힘이 되겠다고 말하며 날 많이 위해줬고 그나마 루꼴라 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옆에 선배 때문이었다.
의도한바는 아니지만 친하고 의지하고 있었던 선배한테 말못한 비밀이 생긴 나는 양심의 가책도 좀 많이 느꼈다. 나만 쏙 좋은 자리로 빠지려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옆에 선배한테 내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순 없다. 아직 6월이 되지도 않았고, 어떻게 될 지 확신도 없으니까.

저번주 목요일 회의 때 부장님께서 육아휴직 간 여자가 6월 경에 복귀하고 내가 일하고 있는 부서에서 한 명은 다른 자리로 가게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거다. 근데 그게 나 라고 부장님이 말씀을 안하셨다. 그래서 회의 끝나고 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여쭤봤더니 부장님의 대답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이거였다. 내 표정은 어두워졌다. 사실 버티면서도 내가 여길 벗어날 수 있는건가? 없는건가? 라는 불안함 때문에 항상 걱정이었고, 만약에 부서변경이 안되면 깨끗하게 관두자. 라는 생각도 아주 자주했다. 물론 육아휴직 확실히 주는 회사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해보면 아깝긴 해도 그렇다고 내 인생을 이따위 일이나 하면서 보낼 순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왜 확실하지 않은지 부장님께 물었다. 그랬더니 사실 지금 다른 부서로 가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두명이나 되기 때문에 인사팀이랑 사장결제까지 올라가야 하고 그래서 이미 부장님은 결정권한이 없다고 하시는 거다. 난 그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부장님께서 대답을 망설이신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바로 내 옆에 선배 라는 거다. 하하하. 나보다 훨씬 전에 이미 말했댄다. 휴직간 여자 복직하면 자기를 내보내주고 나랑 그 여자랑 지금 부서에 남겨놓으라고. 나보다 한 술 더 떠서 어느 부서 가고 싶다고까지 말씀드렸댄다.

내가 부장님께 관두겠다고 말했던 시점에도 이미 부장님하고 옆에 선배랑도 얘기가 되어 있었던 상태고, 내가 원했던 것을 똑같이 옆에 선배도 원하고 있었다. 물론 당연하다. 그야말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지 같으니까. 루꼴라 역시 그지같고. 루꼴라가 갈아치운 사람이 도대체 몇명인데. 우리라고 뭐 별 수 있겠냐고.

그런데 왜 내가 관두려고 할 때 그냥 나는 다른 부서로 갈 수 있는 가망 없다고. 너 6월까지 버텨봤자 거기 계속 붙어 있어야 된다고 말 안했냐 이거다. 그리고 왜 나는 옆에 선배 때문에 맘 약해져서 그 좋은 자리 면접을 그냥 날리고 그래 6월까지 버티고 있어보자 하면서 몇 개월깐 그 스트레스를 다 받고 있었냔 말이다. 옆에 선배는 왜 나한테 앞으로 우리 잘해보자고 말하면서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할 것 처럼 말해놓고 왜 나보다 훨씬 먼저 부장님한테 다른 자리로 빼달라고 말했냔 말이냐. 6월이 되면 그나마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게 다 날아가고 6월이 되면 나는 옆에 선배 일까지 다 도맡아야 하는 건데.
나보고 버티라고 말한 것도, 옆에 선배가 계속 같이 일하자고 한 건도 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고, 둘이 이미 다 다른 얘기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바보 같은건가. 회사 사람들 연기력이 뛰어난 건 지 잘 모르겠다.
애초에 결심대로 난 정식으로 옆에 선배가 다른 부서로 변경된다는 발표가 나면 바로 관둘 예정이다. 괜히 옆의 선배 좋은 자리로 가고 난 선배자리로 가서 선배하는 일 다 떠안기 싫다. 그러는 건 다 그 선배 좋은 일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했더니 다들 그냥 꾹 참고 버텨보랜다. 너 나가서 뭐할 거냐고 한다. 물론 그 말은 맞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뭐 일반 사무직, 사무보조 이정도 밖에는 없으니까. 나 정도 되는 스펙으로는 그 정도도 벅차다는 걸 이미 작년에 다 겪어봐서 안다. 그리고 이제 26살이고 졸업예정자들도 취직 안되서 전전긍긍하는데 한 직장에서 10개월 밖에 못버틴 사람을 써줄 회사가 별로 없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난 정말 이 일을 하기 싫은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그냥 버텼는데 그게 다 물거품이 되고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 때문에 이지경이 되고 나니 완전히 넋이 나가고 눈물이 나고 모든 게 다 싫어졌다. 부모님한테도 한마디도 못했는데 엄마아빠 반응도 뻔하다. 분명 죽어도 버텨보라고 그럴 거고.  

오늘 한달 115만원 준다는 계약직 공고를 보면서 이력서 쓸까 말까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한심했다. 결국 못썼다. 아. 답답하다. 답이 없고 진짜 싫다. 물론 20대를 이렇게 만든 사회의 탓이 더 크다는 걸 안다. 난 죽어라고 노력만 하면서 살지도 않았지만, 딱히 게으르게 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돈 없어서 전전긍긍하면서 하고 싶은 것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대학 졸업했다. 근데 내가 이력서 써서 서류 붙은 데라곤 외국계 회사긴 한데 대신 미국 시간에 맞춰서 출퇴근 하는 회사, 인천공항 근무긴 한데 새벽 3시에라도 회사에서 부르면 공항 나와서 일하라는 회사, 죽어도 정직원으로 안바꿔 준다는 신문 인쇄소, 면접 갔더니만 하는 일이 서류 복사고 옵션으로 남자직원들 커피도 매일 타줘야 하는데 할 수 있겠냐고 묻는 회사. 이런 회사 뿐이었다. 그때는 어렸고, 졸업한 지 얼마 안됐는데도 그런 회사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죽할까.

아. 점점 우울해진다. 제길. 왜 이모양이냐. 왜이리 일생에 운이 없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때려치고 싶어지는 건 또 어떡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