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에서 뜬금없이, 식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뮤지컬 영화 마냥 I say a little prayer 를 부른다. 줄리아 로버츠 옆에 앉은 극 중 그녀의 남자 동료가 줄리아 로버츠를 사랑하는 척, 엄청나게 불안정한 음정 박자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가 너무 좋아서, 영화 끝나고 찾아 들었다.

사랑한다고 열렬히 고백하는 것 보다, 틈틈이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와닿았으니까.

Aretha Franklin 버전도 좋지만, 이 영화를 워낙 재밌게 봐서 그런지 내 핸드폰 플레이 리스트에는 이 OST 버전이 들어있다.

 이 영화는 줄리아 로버츠가 오랫동안 친구로만 지냈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니 그제서야, 남자친구의 결혼을 막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줄리아 로버츠와 친구가 끝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발랄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카메론 디아즈를 볼 수 있는 것도 큰 재미 중 하나다. 저렇게 예쁘고 착한 여자와 사귀고 결혼을 약속해놓고 그냥 친구로만 지낸 여자에게 가는 건 말이 안되니까.

아마 다른 영화들 처럼 약혼녀를 버리고 줄리아 로버츠와 키스하며 끝났다면 화났을 것이다.


 요즘 이 음악을 들으며, 또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하며 내가 하는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그러다보니 '너를 위해 기도할게.' 라는 말의 다른 의미는 '너를 위해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는 말과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기도라도 하면 그 혹은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한 것 같지만, 사실 난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이쯤되니, 기도가 정말 상대방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의심도 든다. 어쩌면, 기도는 그 사람보다 나의 심신 안정을 위해 하는 건 아닐까.

정말 그 사람을 위한다면, 눈 감고 기도하기 보다 적극적으로 뭐라도 해보려고 발벗고 나설 것이다.

퇴근 후 피곤하고, 엄마가 괜찮다고 하시니까... 와 같은 이런 저런 핑계로 요즘들어 내가 엄마에게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든다.

난 엄마를 위해 틈만나면 기도를 하고 있지만, 정작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무언가를 실제 행하고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9월에 일기를 한번도 못쓴 것 같다.

요즘에는 회사에서 괜히 바쁘고, 집 노트북도 대책없이 너무 느리고, 티스토리 아이폰 앱은 도저히 너무 너무 후져서 활용하기 힘들고, 뭘 쓰고 싶은 생각도 전혀 안들지만, 내 인생 어쩌면 가장 힘든시기로 기억될 요즘 기분을 최소한이라도 기록해 놓고 싶어 쓴다.

어제 우리 엄마는 아픈 엄마라도 있는 게 너희들에게 좋은 거 겠지? 라고 물으셨다.

난 그럼~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며 용케도 전혀 울지 않았다.

예전에는 성경에 아픈 사람들이 제발 내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비는 장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저번주 어느 날 그 장면을 읽는데 마음이 찡했다.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스쳐서 병을 고치고 싶었던 환자들 처지가 지금 내 마음과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다.

내일 3차 항암치료를 하는 엄마가 저번 같은 부작용 없이, 무사히 마치시길, 또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