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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때를 꼽으라면, 런던에서 에딘버러로 올라가는 기차를 탔던 그 시간인다. 한국에서 예매한 기차 티켓은 좌석이 있는 티켓인 줄 알았는데 기차를 타고보니 입석이었고, 비어 있는 자리는 엄청나게 떠들고 냄새가 나는 중국인들 바로 뒤 역방향 좌석 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튼 섬의 동쪽 해안을 타고 올라가는 기차 바깥의 풍광은 아름다웠다. 수시로 나타나는 양떼들과 수시로 바뀌는 날씨.

  영국은 기차 안에서 스마트폰 인터넷이 전혀 안되기 때문에 창밖 풍경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난 입석티켓 끊은 주제에 좌석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라 노심초사 하느라 5시간 내내 잠도 제대로 못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를 타고 에딘버러로 가던 그때 정말 좋았다. 


  처음에 호텔을 찾느라 무지 고생했다. 에딘버러 호텔값이 런던 호텔값보다 더 비싸서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잡았는데, 그 호텔은 정말 추워도 너무 추웠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진심으로 추워서 이를 부딪치며 떨었다. 넓고 깨끗하고 친절했지만, 그렇게 추울 줄이야. 난 한국 9월 날씨 생각하고 따뜻한 옷도 안가져온 터라, 샤워를 하고 나서도 두꺼운 가디건과 남방을 겹겹이 껴 입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얇은 옷을 무려 6겹이나 껴입고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H&M 매장에 가서 레깅스를 사서 청바지 안에 입고 털모자를 사서 썼다. 끝끝내 추웠지만, 에딘버러성까지 씩씩하게 올라갔고, 열심히 성 구경을 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에딘버러 성 안의 내 무릎만큼 높은 계단을 내려가다 무게 중심을 잃는 바람에 무릎을 다쳐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 때문에 난 급격히 우울해지기 시작했고 하필 그날 핸드폰 여분 배터리를 빼놓고 오는 실수를 해서 사진도 거의 없다. 무릎이 아파 원래 보려던 관광지의 3분의 1도 못봤고 결국 이 예쁜 도시에서 내가 본 거라곤 에딘버러성, 로얄마일, 홀리루드궁전 이렇게 3개 뿐이다.  

 

  저녁으로 더럽게 맛없는 햄버거를 먹고 간신히 호텔로 돌아와 퉁퉁부어 오른 내 무릎을 보면서 이 무릎으로 앞으로 구만리같이 남은 이 여행일정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 막막했다. 이상하게 스코틀랜드에는 약국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파스라도 하나 바르면 덜 아플 것 같은데, 하필 파스도 한장 안가져와서는... 그 아픔을 그냥 견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 경험으로 올해 여행 때는 파스를 엄청나게 많이 챙겨갔다)

 

  원하는 만큼 둘러보지 못했던 도시 에딘버러는 아직도 너무 미련이 남고 기회가 되면 꼭 다시 가보고 싶다. 고상한 빛깔의 돌로 만들어진 옛날 건물들과 그 돌로 만든 길, 그리고 평화롭고 조용했던 주택가도 좀 여유롭게 걸어보고 싶고. 이번에 프라하 다녀와선 다신 비싼 서유럽을 안가겠다 결심했기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뭐 죽기 전에는 한번 다시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동안 나에게 슬픈 연애 영화는 금지 영화였다. 어떤 사건이 있은 후로는 여기 일기장에서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기 싫었고, 그 사건이 조금이라도 떠오를만한 행동은 아무것도 안하려고 노력했다. 무지하게. 죽을 힘을 다해. 그 사건으로부터 도망쳐 다녔다.

  나에게 있었던 사건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연애도 뭣도 아닌, "그냥 나 혼자 어떤 남자를 좋아하다가 쪽팔려서 죽고 싶을 정도로 찌질하게 끝이 났다." 정도 되겠다. 사건 얼마나 찌질했냐면, 최소한의 자기 변호를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조금 섞지 않고서는 그 사건에 대해 도저히 한마디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난 내 인생에서 엄청 큰 전환점이 된 이 슬픈 사건에 대해 완벽하게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가까운 친구에게는 2년동안 있었던 그 일에 대해 한 50% 정도는 말했지만, 죽기로 맘먹지 않고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아마도,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뭐 사실 그럴 필요도 없긴하지만.

  내가 이렇게 주구장창 설명하는 이유는  그만큼 그 때 내가 받은 상처가 컸고, 아직까지도 내 가치관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비통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인데, 역시 세월에는 장사가 없듯 28살 쯤이 되서는 그 사건에 대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이건 장족의 발전이다. 한동안 나는 맨날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 잠들었는데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경험은 실패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했지만, (200%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도 못하겠다. 나쁜 오스카 와일드. 꼭 그렇게 진실을 가슴아프게 콕 집어 말해야했나!!!) 그 실패로 인해 깨달은 바가 많다. 내 인생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미친 것 같긴 하지만, 아마 그 때 사건이 없었다면 난 엄청 재수없는 속물이 되었을 것 같다. 지금도 재수 없는 속물이지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난 정말 대책없는 여자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얻은게 전혀 없는 실패는 아니었다.

  덕분에 원데이 같은 영화 보면서도 울 수도 있으니까.

  영화는 20년동안 엇갈리기만 하는 두 남녀에 대한 이야기다. 대학 시절부터 인기 많았던 덱스터를 짝사랑하는 엠마. 하지만 덱스터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엠마를 몰라보고 철부지 행동만 하다가 뒤늦게 그녀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슬픈 영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는 행복한 여자다. 죽기 전까지는 덱스터한테 사랑 받았으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도 사랑받지 못하고 그냥 끝나는 짝사랑이 훨씬 많을거다. 아마도. 그 중 나도 포함이고. 

  이 사람이 내 평생의 소울메이트다 이런 생각은 서로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닌 거 같다. 그런 감정을 한쪽만 느낄 수도 있는거다. 이 영화에서는 서로가 딱 맞는 소울메이트였던 것으로 나오지만,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영화 '500일의 써머'는 그 반대에 있다. 남자 혼자 이 사람이 내 소울메이트다 라고 착각하다가 끝나니까. 어쩌면 소울메이트라는 말 자체가 그냥 서로가 주체 못할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모든 슬픈 연애 영화의 귀결은 "있을 때 잘하자" 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영화도 다르지 않다. 

  둘의 고향이 에딘버러라, 여행 가서 봤던 거리를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고 작년 가을 혼자 했던 여행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아련해졌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나는 장면은 각자 다르겠지만, 마지막에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대학 졸업식 다음날 장면이 다시 나올 때 눈물이 흘렀다. 그랬어야 했는데.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다 쓰고보니 내가 짝사랑 했던 그 남자를 엄청 미워하는 것처럼 썼지만, 사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도 즐거웠던 일이 꽤 있었다. 옛날엔 죽도록 미웠던 적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하나도 안 밉다. 심지어 어릴 때 경험해봄직한 사건을 만들어 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어쩌면 이건 내 인생 전체로 볼 때 엄청 건전한 경험이었으니까.

 

  당시 꽤 친했던 우리 둘이 했던 별거 아닌 귀여웠던 행동들이 조금씩 기억났다. 이 영화 덕분에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을 다시 추억할 수 있었다. (세상에!!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추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못내 또  그냥 친구 사이로만 알도록 내가 처신을 잘 했다면 덜 비극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또 했다. 수백 수천번 했던 그 후회를.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면 만약 친한 친구사이로만 남았다면 나는 아마 이 영화속 엠마처럼 10년 20년이 지나도록 짝사랑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2014년을 기점으로 그런 후회 조차도 안하기로 다짐했다. 아주 아주 오래전 일 일 뿐이다. 벌써 내 나이가 32살이니까.

 

 

P.S 두 남녀 주인공 비주얼이 요 근래 본 영화 중 최고라서, 인물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앤 헤서웨이야 워낙 유명하니 말 안해도 될 거 같고, 짐 스터지스라는 남자 배우 역시 깍아놓은 것 같은 진짜 진짜 미남이다.  만약에 배두나랑 사귀는 게 진짜라면 나는 그 둘이 헤어지기 전까지는 배두나를 저주할 거 같다. 제발 거짓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