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몇 번 썼지만, 나는 불행히도(?) 아빠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사회성 떨어지고, 외골수인 게 특히 그렇다. 하지만 아빠 덕분에 어린 시절 좋은 음악도 많이 듣고, 그림도 봤고, 책 읽는 습관도 생겼으니 원망스럽지는 않다.

  아빠 영향으로 좋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거의 B4 사이즈만한 그림책 세트가 있었다. 외국책 이었고 해외 유명 화가들의 (어렴풋이 모네 랑 르누아르 그림을 봤던 기억이 남) 고급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책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봤던 모든 책에는 하나같이 다 크레파스 낙서가 가득한데, (우리 엄마는 내가 하도 벽이나 책에 낙서를 많이 해서 벽면에 큰 종이를 하나 붙여주고 낙서하고 싶으면 여기에 하라고 말씀하셨다. 앨범에 그 낙서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음) 어린 내 눈에도 그 책은 비싸고 좋아보였는지 그 책에는 낙서를 전혀 안했다. 너무 무거워서, 아빠가 꺼내서 펼쳐주시지 않으면 볼 수도 없었다. 10번이 넘는 이사를 하며 우리 가족에게 그 책 세트는 너무 큰 짐덩이리였고, 결국 언젠가 아빠께서 헌책방에 그 책을 팔아버렸는데, 책방 주인이 어찌나 좋아하든지 집에 혹시 이런 책 또 있으면 꼭 자기한테 팔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집에는 007 가방 처럼 생긴 갈색 큰 가방도 있었다. 그건 클래식 음악 테이프 세트였다. 이 세트도 역시 수입된 것이었다. 그 옛날 강원도에서 직수입 책이나 음악세트를 구입하셨던 걸 보면 아빠도 꽤 유별난 사람이었던 거 같긴 하다.

  하긴 세계 최초로 Auto-focus 기능 탑재한 니콘 카메라도 강원도 살 때 샀고, 그 카메라가 아직도 우리집에 있으니.. 역시 돈이 좋긴 좋은건가. 싶다. 그때는 아빠도 안정적 직장에 수입도 많았으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하는 호사를 누리셨다. 그 니콘 카메라 파는 아저씨가 카메라 하나 들고 서울에서부터 우리집인 강원도 홍천까지 오셨고 그 카메라 값을 3년 할부로 갚았다고 하니 당시 엄청난 고가였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세트 60개 테이프 중 아빠가 많이 들으신 건 막 음악이 늘어지고, 안들으신 건 음질이 깨끗했다. 나는 모든 테이프가 다 늘어나서 그 세트를 버릴 때까지 심심하거나 혼자 있으면 그 클래식 음악들을 듣곤 했는데, 어느 날은 뭔지 모르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생했다가 음악이 너무 무서워서 울었다. 봄의 제전은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곡이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한번 들어봤을때도 역시나 봄의 제전은 전혀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건 유명 협주곡을 모아놓은 테이프였는데, (60번 중에서 30번인가 28번인가 그랬음) 나중에 커서 들어보니 그 테이프에 들은 곡은 슈만의 유모레스크,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등등 엄청 유명한 곡들이었다.  

  원래 쓰려던 걸 안쓰고 말이 길었는데, 우리 가족은 나와 아빠는 정리정돈형이고 엄마와 동생은 어지르기형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난 엄마에게 집을 치우라든가, 니 방 좀 정리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집을 어지르고 정리를 못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심한 편은 아니지만, 약간의 강박 같은 게 있어서, 샴푸나 폼클렌저, 화장품이 상표가 보이지 않게 세워져 있으면 꼭 상표를 보이게 세워놓고, 자동차 열쇠, 가방, 이어폰 같은 소지품이 항상 있던 자리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또 내가 쓰는 서랍은 언제나 찾기 쉽게 정리정돈 되어 있는 편이고. 

  하지만 동생이나 엄마는 손에든 물건은 손 닿는 곳에 두고, 서랍을 열어보면 뒤죽박죽 절대 원하는 물건을 바로 찾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뇌가 좀 다른 것 같다. 동생이 엄마보다 정도가 좀 심한데, 군대를 갔다오면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뭐 군대 2년은 사람을 변화시키기엔 너무 짧은 시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그냥 엄마나 동생이나 뇌가 나와는 다르다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나보다 더 어지르기형 인간이라 잔소리 안해 좋다... 생각하는데, 아빠는 엄마가 집안 어지르는 것 때문에 가끔씩 크게 화를 낸다.

  휴. 또 이 일기의 결론은 아빠와 엄마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구나. 아빠가 엄마를 좀만 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만약에 누군가와 살게 된다면 어지르기형 인간이더라도 화내지 말아야지... 하고 또 다짐해본다.


월미공원과 여러가지

일상 2016. 10. 10. 09:36

1. 평일에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면서, 운동을 전혀 하지 않다보니 건강이 점점 나빠진다. 환절기라 ​비염 때문에 점점 더 괴로워서 토요일에 내과에 가 약을 받아왔다.

요즘 친구 만나서 웃고 떠들 기분이 아니고 또 공교롭게도 주말마다 몸이 좋지 않아, 요근래 주말에는 거의 요양하며 집에 있는다.

2. 점점 아빠와 외출을 꺼리게 된다. 아빠가 야외에서 사고 칠까봐 외출해서도 내내 눈치보고 노심초사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아빠와 내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걸 느끼며 안타까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엄마가 많이 아픈데도 전혀 변화 없는 아빠의 모습에 나는 더 절망하고 포기하게 되고 그렇다. 아빠와 최소한의 대화를 하고 최소한 짧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게 유일한 해답인 거 같다. 저번 상담해주시던 선생님 조언대로 아빠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엔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솔직히 말하면 상담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빠다. 하지만 그런 말을 아빠에게 하는 거 조차 힘겹고, 수고스러워 관두기로 했다. 아빠의 병은 일종의 발달 장애니까 상담을 받는다고 해서 바뀔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요즘 들어선 엄마가 아빠의 성격을 왜 평생 참고 사신 건지 원망스러운 기분도 든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도 그 나름의 고충과 애로사항이 있겠지만, 엄마아빠가 서로 맞지 않는 걸 인정하고 헤어졌으면 요즘 이처럼 괴로운 기분은 아니었을 것 같다.  

3.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번 주 목요일에는 가족이 주는 행복과 불행 중 대체 뭐가 더 큰 걸까. 하는 생각에 유서라도 먼저 써놔야 되나 싶었다. 엄마가 또 아빠 때문에 또 힘든 일을 겪는다면 정말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4. 토요일에 아빠가 대전에 가셔서 모녀만 집에 남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월미공원에 갔다. 주말에 엄마 데리고 어디를 가고 싶어도 아빠만 집에 혼자두기 뭐해서 못갔는데 토요일에는 기회가 좋았다.

바람이 너무 세서 약간 추웠지만,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때문에 엄마도 나도 기분전환 확실히 했다. 오랜만에 토끼들을 가까이서 봤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여워 걔네들 노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도 아빠랑 외출하는 것 보단 나랑 나가는 게 편하실 테니 시간 나면 함께 시간 보내드려야지.. 하고 다짐했다.

5. 여기 쓴대로만 보면 난 인생 포기한 것처럼 사는 것 같지만 의외로 회사 생활 착실히 잘 하고,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한테 우울한 모습도 안 보인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대 단점은 월급인데 이걸 무마할 정도로 큰 장점이 몇 개 있다. 몇 개를 나열하자면, 회식이 거의 없는 점, 야근 없는 점, 전화 응대 적은 점,직원들이 사생활 관련 질문 안 하는 점. 정도? 특히 마지막 장점이 너무 좋다. 전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많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나에게 했는가.. 정말 끔찍했다. 엄마가 치료 받으시는 동안은 군말없이 지금 회사에 몸 담으며 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엄마가 입원하실 때마다 눈치 안보고 휴가 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 중 하나이니.

6. 저번 주에 노트북이 완전히 고장나서 AS 센터에 보냈는데, 수리비가 14만원이 나왔다. 하드디스크가 완전히 못쓰게 됐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SSD로 교체했는데, 과연 얼마나 좋아졌을지. 돈을 들였으니 앞으로 한 10년은 더 쓰려고 한다.




수술 후

일상 2016. 8. 16. 12:54

엄마가 그렇게 아파하는 걸 처음 봤다. 수술 전에 엄마랑 농담으로 애 낳는게 아플까. 이 수술이 더 아플까. 하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마취에서 깨서 정신 없는 와중에도 이게 백배는 더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수술 전날 입원한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울었다.

엄마가 입원하기 전까지는 계속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좀만 더 지나면 꿈에서 깨어나고, 우리 엄마는 건강하게 일도 하고 평소처럼 깔깔깔 웃으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환자복 입고, 병실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정말 현실이구나 싶었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엄마도 나도 엉엉 울 것 같아서 엄마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간신히 엄마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엄마가 60대가 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건강하실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보다 일찍 엄마와 이별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 혼자 남겨놓고 가면 도저히 편히 눈을 못감을 것 같다고 하신 것이 떠올라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마음이 편할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아무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수술 침대에 누워서 울고 계시는데, 나는 도저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걸 못볼 것 같아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내가 엄마 손을 잡아줬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우리 엄마는 결국 4기초 진단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의사가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큰 일이 닥치고 보니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간혹 전이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서 개복하자마자 닫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는 수술을 6시간 가량 하셨으니 치료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좌절하다가, 지금은 엄마가 항암치료가 가능한 정도라는 것에 감사드린다.

일요일에 교회만 가는 정도였는데, 큰 고난이 닥치고보니, 종교가 큰 힘이 된다. 기도를 하면 엄마가 완치될 것만 같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제 나도 책임이 좀 무거워졌다. 제일 걱정인 건, 아빠다. 아빠가 잘 하실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다르게 엄마 마음 편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이런 때 일수록 나나 동생이 아빠랑 잘 지내서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어쨌든 2016년 이 덥고 또 더운 여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잊고 싶은 여름이 되겠지만, 아마 절대 잊지 못하겠지. 


조용한 성탄절

일상 2014. 12. 25. 23:06

  컴퓨터로 좀 할일이 있어서 하루종일 느려터진 내 노트북을 만졌다. 엄마는 모친상 당한 친구한테 가셨다. 우리 엄마가 집을 비운 건 잘 된 일이겠지. 작년과 똑같이 집에서만 죽치는 내 모습보면서 또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지 안봐도 비디오다.

  엄마가 잠깐이나마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서 얘기하고 올 수 있어서 잘됐단 생각을 했다. 아까 저녁때 집에 오셨는데 기분이 아주 룰루랄라 시다.

 

  덕분에 하루종일 아빠와 함께 둘이 집을 지켰는데, 너무 심심해 하셔서 모시고 영화라도 볼까 싶어 현재 상영 중인 영화를 아무리 검색해도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다. 숲속으로는 아빠가 너무 돈 아까워하실거 같고, 엑소더스는 러닝타임이 너무 길고. 그래도 아빠 혼자라도 엑소더스 보고 오시라고 했어야 했나? 아빠 그런 구약성경 스토리 영화 좋아하시긴 하는데.  

 

  오후 늦게 요즘 최고로 더러워진 차를 세차했고, 세차하러 나온김에 운동이나 하자 하고 공원으로 갔다. 그런데 성탄절날에도 뽕짝 틀어놓고 여러명이 에어로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 기억으론 설날 연휴 중에도 하루도 안 빼놓고 나와서 에어로빅 했던 거 같은데, 거기 단상에서 에어로빅 지휘하는 엄청 마른 아저씨는 365일 내내 6시만 되면 자유공원으로 와서 춤을 추시는 것인가.. 싶어 경외감이 들었다.

  원래 사람이 단 10분이라도 꾸준히 하는게 참 힘든건데, 10분도 아니고 거의 30분을 매일같이 눈이오나 비가오나 나와서 춤을 추시다니. 대단한 분이다. 이정도면 TV 에 나오셔도 될 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빠 혼자 심심하게 집에 놓고 온게 미안해져서 오는 길에 칭따오를 4병이나 사와서 아빠 한캔드리고 4500원짜리 영화를 함께 봐드렸다. 모스트 원티드 맨 이라는 영화인데, 워낙 평이 좋아 선택했는데, 너무 현실적인 현대 첩보를 다뤄서 재미는 별로 없었다. 총싸움도 없고 추격신도 전혀 없는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인 첩보물.. 흥미롭긴 했다. 실제 저렇겠지 싶어서.

 

 요근래 엄청 춥고 아침에 눈 내렸던 한 3일동안 아빠는 내가 차 타기 전에 차에 눈을 다 치워놓고, 심지어 차안에 히터까지 틀고 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차탈 때 너무 추울까봐서.

  난 중학생 이후로 아빠에게 실망한 적도 많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적이 많아서 무뚝뚝해도 그렇게 무뚝뚝할 수 없고 아빠께 하루에 한마디도 겨우하는 딸인데,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시동 켜놓고 기다리는 아빠를 보면 가끔 눈물이 핑 돈다.  

 

  모친상 당한 분의 어머니는 올해 97살로 100살을 3살 남겨놓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정도면 호상이겠지. 97살이라니.

  사람이 기력이 쇠해지는 것이 45살 부터라고 치고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이제까지 살아온 기간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몸이 약해지고 보기 흉한 몰골로 변해가는 걸 매일 매일 봐야한다는 말이 된다. 정말 끔찍한 일 아닌가. 주어진 인생이니 끝까지 살아내야겠지만, 사는 게 참 재미가 없는 것 같다. 100년동안 기력 팔팔하고 생기로운 기간은 끽해야 15살때부터 30살까지 15년 남짓이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오늘 꼭 일요일 같다. 그런데 내일은 금요일.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다.  

 

 


내 나이 미혼 여성이면 주말마다 데이트도 좀 하고 남자한테 카톡오면 연락도 좀 주고 받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하튼 난 지금 그러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회사에서도 일이 너무 많이 겹쳐서 좀 바빴다. 안바빠도 뭐 별다른 점 없겠지만.


저번주에는 처음으로 싱가폴에 전화를 했다. 나는 전화영어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게 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뭐... 너 내 이메일 확인했니? 확인하고 답장줘 이정도 말 밖에 안했지만 아마 전화 영어 아니었으면 그것도 안됐을거다.


어제는 한양대에 가서 졸업시험을 봤다. 내가 다니는 사이버대가 한양대에서 만든 대학교라 어쩔 수 없이 그 먼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한양대는 내가 고3 시절 많이 가고 싶었던 학교다. 뭐 꿈도 못 꿨지만. 내가 졸업한 인하대 애들 중에는 원래는 한양대 가고 싶었는데 못가서 온 애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한양대 붙었으면 아마 좋아서 엉엉 울었을거야. 인하대 붙고서는 한없이 무덤덤한 기분이었는데. 

원래 나는 미디어 학부라는 곳을 가고 싶었는데, 내가 꽤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였는데...  여하튼 미디어 학부고 뭐고 다 지난 얘기니깐. 

한때나마 내 꿈이었던 한양대를 걷다보니 학교 참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인하대의 외관에 전혀 신경쓰지 않은 후진 모습과는 달라. 역시. 


졸업시험은 3과목을 보는데 2번째 과목이 정말 큰 문제였다. 어떤 유형으로 나오는지 이번에 알았으니깐 다음 시험에는 붙을 수 있다. 진짜로. 다음학기에 또 시험 보려면 졸업을 못하는거고 졸업안하고 시험 또 보려면 16만원이 나가는데 이거 참 쌩돈 나가게 생겼다. 


오늘 엄마랑 아빠랑 함께 자유공원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콩국수를 먹었는데 그 맛이 어찌나 일품이었든지. 이름도 기억해놨다. 이름은 "개성집" 다음에 또 가야지. 우리동네는 참 좋은 동네다. 들어가는 식당마다 웬만하면 다 맛있다. 신포시장에서 떡볶이 사먹어보고 느꼈던 그 폭풍감동이란. 눈이 번뜩 뜨일 맛이었다. 그뿐 만이 아니라 칼국수, 순대, 회덮밥 내가 신포동에서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건 진짜 다 맛있었다. 


우리 엄마는 작년에 폐경이 오셨다. 꽤 늦은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엄마가 폐경 뒤에 신경질 부리고 많이 울고 또 우울증 비슷한 증세가 와서 고생하고 당황스럽다든데 우리 엄마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도 참 긍정적이신 것 같다. 엄마도 한동안 약간 우울 증세같은 게 있으셨는데, 동생이 좋은 회사 취직하고 나도 직장에 자리 잡아가고 그러는 걸로 많이 위안을 받으시는 모양이다. 엄마께 진짜 고맙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울하고자 하면 한없이 우울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유머를 잃지 않으시니, 그건 참 엄마 닮고 싶다. 


근데 이게 우리 엄마 천성인 거 같기도 하다. 산후 우울증 관련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우리 엄마는 나랑 동생 낳고 우울하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힘들긴 해도 그냥 애들 쳐다만 봐도 좋고 행복했다고 하셨으니... 가끔 엄마가 불쌍하고 안쓰럽고 한데, 요즘에도 TV 보다 웃긴 장면에 막 큰 소리로 웃으시는 걸 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싶다. 우리 엄마 정말 좋아.  


저번 주 회사에서 보낸 부산에 갈 사람은 얘기하라는 메일이 모든 사람에게 간 내용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정말 크게 실망을 해고 심란했다. 결국 사장님께 장문의 메일까지 썼는데 (그 메일 발송하고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다행히 답장이 왔다. 나랑은 상관 없는 거라고. (근데 정말 상관이 없었던 거 맞아? 상관 없는데 왜 그런 이메일을 보내셔선... 크흑) 


추가로 회사에서 우리팀 차장님께 진짜 잘해드리기로 결심했다. 다른 팀 팀장들 보니 정말 우리 팀장님은 가끔 무섭긴 해도 천사시다. 잘해드려야지. 서운한 점 있어도. 


결국 또 6월이 왔다.  벌써 2013년이 반절이 지나가는데 아마 내 2013년은 이렇게 또 심심하게 마무리되려나보다. 요즘에는 런던 미술관 산책 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고는 있지만, 여행 준비는 아무래도 한 8월이나 되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욕적으로 여행책 왕창 사놓고 앞에 좀 보다가 너무 바빠서 못보고 있다. 

내 2013년 도 별볼일 없을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9월에는 유럽땅 밟을 거니깐. 솔직히 그 낙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극복해야 할 문제

일상 2007. 12. 20. 09:37
난 몸을 엄청나게 사리는 사람이라 어제 밤에 11시에 누웠는데 2시간 넘게 잠을 못 이루며
아.씨. 이러면 내일 진짜 피곤한데!!!!
라면서 끝끝내 누워서 뒤척였다. 누워서 피로라도 풀자 싶어서.
어제는 아빠 생신이었다. 주말에 이미 선물을 드렸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원주에서 보셨다던 '왕이 되려고 했던 사나이' DVD를 추가 선물로 드렸다.
엄마가 맘먹고 갈비를 하셔서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케익까지 아구아구 집어 먹었더니 배가 살살 아팠다.
TV에는 온통 대선특집방송만 하는 중 이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아서 여론조사는 다 조작한거라고 라고 믿고 있었다.
난 정동영이 흔히 말하는 사표를 찍었다. 그렇다고 이회창을 찍은 건 아니었다.
난 이명박이 싫다.
어디서 봤듯 경제회생이 대통령의 최대 공약이 되는 것 자체가 비극 아닌가.

어제 누워서는 또 우울한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겐 나 좀 불쌍하지 않어? 라고 말을 했지만, 어제 느꼈던 감정은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찌질한 나 자신에 대한 동정심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계속 좀 나쁘네. 이것도 거짓말이다. 기분 나쁜 것과는 다른 감정이다.
이 생각 자체를 우울한 생각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좀 웃기다.

어제밤에 누워서 2007년에 나에게 어떤 일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나.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렇다. 난 사실 7월에 벌어졌던 사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난 비겁했다. 그렇다. 완전히 비겁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나는 훨씬 더 심하게 모욕하고 비방하고 경멸했을 거다.
그래 이전의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이후의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새삼 깨닫고 있다.
아직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나서 괴롭다.
난 아직도 궁금한 것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당시 오랜시간 그 말을 기억하면서 괴로워하라는 의도로 그런걸까. 아니면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걸까.
어떤 의도에서든 나는 당분간은 그 말때문에 괴로워할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될 말을 하면서 이 사람이 내가 한 말 때문에 얼마나 긴 시간을 괴로워할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었나.
그래.. 솔직히 말하면 한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
내가 이렇게만 말하면 이 상황을 끝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쏟아낸 말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비겁하고 상대방에게 부담과 민폐만을 주는 인물이었다고 해도,
난 진심을 다해 많이 좋아했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니 애쓰지 않아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게 그냥 너무 슬픈거다.
난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걱정도 많이 했는데
그 사람은 내 일기를 보면서 나에 대하여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살까 생각했다는 것이.
나는 그 사람에게 있어 끝끝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고 말도 안되는 불만만을 쏟아내는 여자였다는 것이.
그런 중에도 그래도 내가 그 사람에게 아주 큰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의미있는 사람이겠지.
내가 가끔은 위로가 되는 사람이겠지.
라는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서 전화 한통에 울고 웃었다는 것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많은 이유들 때문에
7월이후로 난 말로는 다 못할 만큼 가슴이 쓰리다는 거다.
흠. 그래. 뭐 이것조차도 그 사람의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난 말도 안되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겠지만.

2007년이 끝나고 2008년이 쨍하고 밝으면 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순전히 감정적인 문제라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난 상대방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여자라는 생각에서 언제쯤 자유로워 질 수 있을지.
극복하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