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성탄절

일상 2014. 12. 25. 23:06

  컴퓨터로 좀 할일이 있어서 하루종일 느려터진 내 노트북을 만졌다. 엄마는 모친상 당한 친구한테 가셨다. 우리 엄마가 집을 비운 건 잘 된 일이겠지. 작년과 똑같이 집에서만 죽치는 내 모습보면서 또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지 안봐도 비디오다.

  엄마가 잠깐이나마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서 얘기하고 올 수 있어서 잘됐단 생각을 했다. 아까 저녁때 집에 오셨는데 기분이 아주 룰루랄라 시다.

 

  덕분에 하루종일 아빠와 함께 둘이 집을 지켰는데, 너무 심심해 하셔서 모시고 영화라도 볼까 싶어 현재 상영 중인 영화를 아무리 검색해도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다. 숲속으로는 아빠가 너무 돈 아까워하실거 같고, 엑소더스는 러닝타임이 너무 길고. 그래도 아빠 혼자라도 엑소더스 보고 오시라고 했어야 했나? 아빠 그런 구약성경 스토리 영화 좋아하시긴 하는데.  

 

  오후 늦게 요즘 최고로 더러워진 차를 세차했고, 세차하러 나온김에 운동이나 하자 하고 공원으로 갔다. 그런데 성탄절날에도 뽕짝 틀어놓고 여러명이 에어로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 기억으론 설날 연휴 중에도 하루도 안 빼놓고 나와서 에어로빅 했던 거 같은데, 거기 단상에서 에어로빅 지휘하는 엄청 마른 아저씨는 365일 내내 6시만 되면 자유공원으로 와서 춤을 추시는 것인가.. 싶어 경외감이 들었다.

  원래 사람이 단 10분이라도 꾸준히 하는게 참 힘든건데, 10분도 아니고 거의 30분을 매일같이 눈이오나 비가오나 나와서 춤을 추시다니. 대단한 분이다. 이정도면 TV 에 나오셔도 될 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빠 혼자 심심하게 집에 놓고 온게 미안해져서 오는 길에 칭따오를 4병이나 사와서 아빠 한캔드리고 4500원짜리 영화를 함께 봐드렸다. 모스트 원티드 맨 이라는 영화인데, 워낙 평이 좋아 선택했는데, 너무 현실적인 현대 첩보를 다뤄서 재미는 별로 없었다. 총싸움도 없고 추격신도 전혀 없는 현실적이어도 너무 현실적인 첩보물.. 흥미롭긴 했다. 실제 저렇겠지 싶어서.

 

 요근래 엄청 춥고 아침에 눈 내렸던 한 3일동안 아빠는 내가 차 타기 전에 차에 눈을 다 치워놓고, 심지어 차안에 히터까지 틀고 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차탈 때 너무 추울까봐서.

  난 중학생 이후로 아빠에게 실망한 적도 많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적이 많아서 무뚝뚝해도 그렇게 무뚝뚝할 수 없고 아빠께 하루에 한마디도 겨우하는 딸인데,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시동 켜놓고 기다리는 아빠를 보면 가끔 눈물이 핑 돈다.  

 

  모친상 당한 분의 어머니는 올해 97살로 100살을 3살 남겨놓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정도면 호상이겠지. 97살이라니.

  사람이 기력이 쇠해지는 것이 45살 부터라고 치고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이제까지 살아온 기간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몸이 약해지고 보기 흉한 몰골로 변해가는 걸 매일 매일 봐야한다는 말이 된다. 정말 끔찍한 일 아닌가. 주어진 인생이니 끝까지 살아내야겠지만, 사는 게 참 재미가 없는 것 같다. 100년동안 기력 팔팔하고 생기로운 기간은 끽해야 15살때부터 30살까지 15년 남짓이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오늘 꼭 일요일 같다. 그런데 내일은 금요일.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