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량한 여자.

단문 2015. 3. 21. 18:54

작년에 지하상가를 지나가다가 가죽으로 된 치마를 샀다. 락커들이 입는 그런 검정 가죽치마 아니고, 진짜 예쁜 치마였다.
지하상가 치마인데도 7만9천원씩이나 했다. 하지만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 이건 아마 명품 카피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명품디자인을 배낀 거 겠지. 겨울에 입기엔 추워서 오늘에서야 이 치마를 입었다.
새로산 아이섀도우도 하고, 립스틱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바르고 나왔다. 드디어 모직옷을 벗어던지고 살구색 봄자켓도 입었다.
그렇다. 오늘은 데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오늘이 4번째 만남이었다. 이건 개인적으로 신기록이다. 남자를 소개를 받은 후 4번이나 보는 건. 3번까진 있었지만, 4번은 처음이었다.
영화를 보기로 하고, 위플래쉬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그는 미안한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며 회사로 갔다. 회사가 경기 동부의 끝이니까, 아마 이번 주말은 볼 수 없겠지.
오늘 차려 입은 옷과 공들인 화장이 아까워서 혼자 더 있다 가려고 스타벅스에 들어와서 카모마일 티를 마시는 중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시간보낼 책도 없고 그냥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행인들을 보는 중이다.
나도 직장인이니까, 윗 사람이 갑자기 호출하면 가봐야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처량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괜찮다고 말하고 보냈지만, 사실 괜찮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신기록을 세운 남자이기 때문에 특별하지만, 뭐 걔한테는 4번 만난 여자일 뿐일 수도 있고.
일주일동안 오늘 뭘 어떻게 할까만 기다려온 나는 정말 실망스럽고 우울할 수 밖에 없다. 하아. 이 차만 다 마시고 나도 그냥 택시 타고 집으로 가야지.


커피의 각성효과.

일상 2009. 12. 10. 10:31
아침 9시반경 커피를 드립해 먹는 게 내 회사생활의 유일한 낙이다.
옆에 후배가 골동품이라고 말하는 10년 넘은 머그컵에다가 드리퍼로 내리면서 커피향 맡으면서 오늘 하루도 제대로 버텨보자. 하고 전의를 다진다.
어제 다이어리랑 달력을 1300k에서 보는데 2900원으로 왕창 세일하는 머그컵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금 컵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관뒀다. 지금 쓰는 컵은 엄마 친구분이 나 고등학교 때 선물로 사들고 온 건데 대학 때 자취하러 나가는 나를 위해 엄마가 아껴두었다가 꺼내주셨다. 한 개는 자취하면서 깨먹었는데, 지금 들고 있는 한 개는 정말 안 깨진다. 하도 오래 써서 낡았는데, 정이 들어서 버리질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딜 가면 꼭 컵 구경을 한다. 항상 사고 싶다. 생각하고 살까 말까 고민하긴 하지만, 그냥 쓰자. 멀쩡한데 뭐.
요즘 먹고 있는건 스타벅스 크리스마스 블랜드 인데, 이제까지 사먹은 스타벅스 원두 중 제일 맛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뭐 원두나 커피에 조예깊은 사람 같지만, 그런건 아니고 그냥 회사 근처에 가까운데서 대충 사다 먹는다. 이게 원두의 차이도 있지만 드립용은 갈아서 줘야 하는데, 스타벅스는 커피빈보다 조금 두껍게 갈아줘서 좀 약한 맛이 나서 맘에 안들었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 블랜드는 포장이 이뻐서 샀는데 향도 좋고 입자가 굵은데도 진하고 맛도 굳!
예전에는 아메리카노를 왜 먹는지 몰랐는데, 이젠 그 이유를 알겠는게 이 아메리카노의 각성효과가 장난이 아니다. 믹스커피보다 카페인은 더 많다고 하니까.. 점점 커피를 진하게 해서 먹다보니까 가끔 속이 쓰릴 정도지만, 이젠 아침에 이걸 안 먹으면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다.
난 회사에 공채 말고 그냥 중간에 수시로 들어왔기 때문에 동기가 딱 한명 있는데, 그 분도 야구를 좋아하기도 하고 유일한 동기 (사실 난 이렇게 동기 개념으로 서로 묶이고 묶이려고들 하는 걸 정말로 싫어하지만) 이기 때문에 메신저에서 말을 많이한다.
몇 개월 전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왜 이러실까 싶을 정도로 말을 많이 걸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때는 한참 야구 시즌 중이어서 그랬던 거 같다. 크큭.
그런데 이 분 한테 한번 커피를 드립을 해줬더니만, 진짜 맛있다고 하면서 일주일에 한 2번 이상은 맨날 커피를 얻어 마셨다. 뭐 나야 남들한테 커피 내려주는 거 좋아히지만 같은 팀이 아니라서 번거롭기도 하고 커피 드립 하는데도 시간이 좀 걸려서 눈치도 보이고 했는데, 엊그제는 너무 얻어먹었다면서 스타벅스 기프트 카드라도 사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야지 암.
야구 좋아하는 남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블로그를 쉬는 동안 소개팅을 한 번 했었다. 부천에 사는 분이고 직장도 괜찮고 야구도 좋아하고 착하고 배려 있고 다 괜찮았는데, 그냥 두번째로 만났을 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문자 한번 안보냈더니 다신 연락을 안하셨다. 그런데 솔직히 연애만 아니면, 그냥 동일 취미 가진 아는 사람으로는 좋을 거 같았는데 소개팅에서 만나선 저 그냥 서로 친하게 지내면 안될까요. 라고 말하면 사이코고.
그 분은 한화 이글스 팬이었는데, 올해도 꼴찌. 내년도 거의 꼴찌 예약이라 뉴스에서 한화 이글스 뉴스 나오면 종종 생각난다. 나랑 소개팅 했을 때만 해도 한화가 5등인가 그랬는데 말이다.
이번 주말에 내 친구가 소개팅을 해주기로 했는데 이 분과도 사실 사연이 길다. 원래 여름에 하기로 했는데 금요일에 친구랑 종각에서 계단에서 웃긴 이야기 하다가 결국 완전 미끄러져서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서 토요일 아침에 "죄송한데 제가 어제 저녁에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도저히 못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흐지부지 됐다.
그 날 파란색 퍼진 치마 입고 완전히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세상에. 집에 오니 세게 부딪친 엉덩이 바로 위 꼬리 뼈 부분의 속바지와 팬티가 찢어져 있었다. (내친구들은 이 얘기 할 때마다 열라 웃는다) 진짜 세상에서 그렇게 아프게 넘어져보긴 처음이었다. 그 아픔을 무릎쓰고 종각에서 동인천까지 왔는데 집에 와보니 팔꿈치에서 피까지 나고 있었다. 비오는 날 넘어져서 옷도 완전 엉망이었고. 이제와서 이야기 이지만 그때 이렇게 넘어져서 세상을 하직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뒤로 비오는 날 계단만 보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커피로 시작해서 이상한 이야기로 끝나는 목요일 포스팅이다. 내일 회사 회식이다. 역시 가기 싫다.
그런데 회사에서 40 넘은 남자가 귀여운 척 혀짧은 소리로 이야기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아. 기분 갑자기 그지 같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