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

일상 2016. 7. 25. 18:21

퇴근 길 성수역 2번 출구에는 항상 꽃을 판다.
비가 오지 않는 퇴근길에는 항상 크지 않은 평상에 파스텔톤의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노상의 꽃은 일반 꽃집 가격의 4분의 1 가격이다. 어쩔 때는 꽃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10m 밖에서부터 꽃향기가 난다.
사장님의 안목이 출중하여 꽃의 종류나 색이나 언제나 참 곱다.
그 노상앞을 지나갈 때마다 꽃을 좀 살까 말까 망설이지만, 예쁜 꽃을 들고 신도림역에서 시루떡 같은 동인천급행을 타면 꽃이 다 상할 것 같아서 포기한다.
오늘 같이 더운 날에도 노상의 싱그러운 꽃들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오늘 노상에는 험상궂게 보이는 덩치 큰 아저씨가 손님으로 오셔선 다홍색과 흰색의 이름모를 꽃을 한아름 사셨다. 사장님은 뜨거운 햇빛 아래서 꽃을 포장하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꽃을 사는 사람, 꽃을 파는 사람 두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 꽃을 받는 분은 누구일까. 정말 부러워.


성수역 냄새

일상 2016. 3. 27. 21:33

1. 레일 토스트
성수역 개찰구 옆에는 레일 토스트라는 토스트 테이크 아웃 가게가 있다. 성수역 안에 있는 가게는 하나같이 다 망해가는데, 그 토스트 가게만 사람이 항상 많다. 먹어보진 못했지만 맛있는 모양이다.
아침에 전철에서 내려와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대번에 토스트 냄새가 난다.
마가린을 바른 식빵을 굽는 냄새가 솔솔 나면 아침밥을 먹고 왔는데도 군침이 고인다.
어떤 기억이 청각이나 후각과 결합되면 훨씬 더 강렬한 법인데, 언젠가 이 회사를 그만 둔 후 토스트 굽는 냄새를 맡는다면 성수역 출근길이 자동으로 떠오르겠지.

2. 부정 교합
난 앞니가 부정 교합이라 토스트, 샌드위치, 햄버거 안에 든 햄이나 양배추를 한번에 자르질 못한다. 그런 음식을 먹고 싶으면 앉아서 칼로 잘라야만 하기 때문에 테이크 아웃으로는 샌드위치를 먹을 수가 없다.
내가 양배추를 물면 그 샌드위치 안에 있는 양배추 전체가 다 딸려 나오고 그걸 손으로 자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한번에 급히 먹다보면 배탈이 난다.
또 양배추나 야채를 처음 몇 번만에 다 먹어치우고 나면 느끼한 재료만이 남은 맛없는 샌드위치를 먹어야 한다.
치과에서 외관상 문제는 없더라도 너무 불편하니 교정을 하라고 했지만, 난 그냥 살고 있다.

내가 갑자기 부정 교합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 부정교합 때문에 성수역 레일 토스트를 아직도 못 먹어봤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였는데, 일생동안 부정 교합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불만 성토가 되어버렸네.


3. 공무원 시험
대학 졸업 직전과 첫직장 다니며 힘들어 하던 시절 끊임없이 주변에서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특히 공무원 내외이신 셋째 큰아빠 댁에서 제일 심하게 공무원이 최고다 라고 주장하셨다. 난 내 직업이 최고 인 거 같지 않은데, 유독 공무원들만이 내 직업이 세상 최고의 직업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어찌보면 참 행복한 사람들 인 듯 하다. 군무원으로 국군 수도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도 남편의 첫째 조건은 공무원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전 직장에서 공무원들이랑 같이 일하면서 그들의 나태함과 갑질에 지쳐 난 남자가 공무원이라면 (선입견이지만) 싫어진다. 공무원들이 자기 직업 최고라고 생각하는 게 본인들이 생각해도 너무 편해서 일까?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자부심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부터 생기는 걸까? 성실하게 일하는 공무원도 분명 있겠지만, 난 별로 못봤다.
난 공부하는 양에 비해서는 객관식 문제는 잘 맞는 편이라 아마 주변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심지어 남동생은 아직도 시험 준비하라고 함) 권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체력과 집중력 부족으로 한 시간 공부하면 거의 무조건 누워 쉬거나 먹거나 하는 식으로 30분 정도 쉬어야 한다. 또 결정적으로 외롭게 공부만 하다보면 심하게 우울해진다.
내가 어른들 꼬임에 안넘어가고 시험 준비 안한 건 아직까지도 내 인생동안 최고 잘한 일로 남아있다.


4. 분노 조절 장애

"평소 분노 조절 장애인 사람들 = 자기보다 센 사람 앞에서는 기가 막히게 분노 조절 잘한다. " 라는 글을 봤다. 나이가 들수록 개인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크게 화내거나 실망하는 일이 적은 반면, 회사에서는 자꾸 쉽게 화를 내게 된다. 직원한테나, 거래처나 기타 등등 사람들에게. 특히 전화를 하면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화를 내고 나면 언제나 후회스럽고,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게 무의식 중에 상대방을 나보다 약자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 자신에게 실망하게 된다. 목요일에는 거래하는 회계 법인 직원과 언성이 높아질 뻔 하다가, 메일로 실수하고 법인카드 때문에 전화한 콜센터 직원이 자꾸 대답을 못해서 짜증나는 마음에 또 화를 내고 말았다. 아마 그 콜센터 직원이 일을 한지 얼마 안되서 버벅댄 것일텐데, 왜 난 별 것도 아닌 걸로 그렇게 열을 낸건지... 아직까지도 마음이 좋지 않다.

직장생활 오래하면 원래 성격에서 좋았던 건 점점 사라지고 나빴던 것만 남게 되는 것 같기도. 워낙에 훌륭한 사람들은 고귀한 인격 유지하면서 일도 잘하겠지만, 난 수양이 부족한건지 그게 참 쉽지 않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전화기에 흥분하지 말자고 써 붙여놨는데, 항상 명심하면서 살아야 나도 지키고 상대방도 지키고 하는 거겠지.


5. 회계법인 담당자

회사 특성상 회계 법인 담당자랑 전화할 일이 많은데, 정말 나랑 너무 성격 안 맞는다. 그 회계법인 담당자도 아마 자기가 맡고 있는 회사 담당자 중 나를 최고 싫어할 듯 하다. 저번에 연말 정산 때문에 최초로 언성을 높였는데 그를 통해 걔가 (나보다 나이 어림) 나에 대해 갖는 불만이 뭔지 알게 되었다. 걔가 나한테 말하길 나는 기본적인 사항을 안 알아보고 다 물어본다는 것이었다. 그 담당자는 나에게 대리님은 너무 몰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드려야 하고, 다른 회사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거 같은데 맞나요 라고 질문한다면 나 같은 경우는 뭐예요 라고 묻는다고 했다.

그런데 나도 억울한 게, 나는 기본적으로 회계 업무는 처음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걔한테 다 물어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회사는 너무 작아서 아주 간단한 질문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

내 무지에 나도 화가 나고, 하나도 모르는 업무를 지금 이 정도면 어찌어찌 유지는 잘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걔한테 너 너무 일 못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듣고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럴 때 마다 전 회사의 L 부장 생각하면서 참는다. 그래 그래도 이 회계법인 애랑 전화하면서 열 받는 건 일주일에 한 두번 뿐이지만, L 부장이랑 일할 땐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시궁창 기분 맛봤으니 참자.. 하면서.


6. 전 회사 동료

나와 함께 잘린 제일 친했던 대리님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그 대리님도 남편 따라 부산에 내려가서 재취업을 하셨는데, 다른 회사 다녀보니 L 부장이 얼마나 재수없는 상사였는지 알겠다고 했다. 나도 이 회사 와서 정말 L 부장 같은 인간이랑 내가 참 오래 버텼구나... 싶었으니까. 다 지난일 이니 잊자 하다가도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가끔 울화가 치민다. 이것도 역시 수양이 부족한 탓이다. 



일사천리

일상 2015. 8. 16. 18:55

내일부터 성수역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대학교에 근무하기 시작한게 7월 21일인데 정확히 4주만에 그만두고 다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고 잊고 있었는데, 어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직접 가서 보니 괜찮은 회사인 것 같고, 또 정규직이고 다만 우리집에서 너무 멀다는 게 단점이었지만 경력을 쌓을 수 있는 회사이니... 결국 가기로 했다.

하고 있었던 학교 일은 무조건 계약직이고, 입사를 제의한 회사는 무조건 정규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로서 한동안 내 길이라 생각했던 대학원 입학도 없던 일이 되었다. 대학원에 붙긴 붙었지만 등록하지 않았다.

교수님께 그만둔다고 말하기가 죄송해서 잠을 한 이틀 설치고 살도 빠졌다. 하지만, 교수님들도 날 잡을 순 없었다. 학교는 2년 뒤에 무조건 짤리니 말이다.

나와 같이 면접을 봤었던 사람 한명을 다시 불러서 앉혀놨고, 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인수인계 해줬다. 교수님이 다시 모집공고내서 사람 모집한다고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보통 다른 과 교수님들은 내가 맘에 드는 애 뽑는다고 시간 끌어서 전임자가 속타고 힘들고 그런다고 하든데... 난 하루만에 그만둔다고 말하고 사람 뽑고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다. 나와 같이 일하던 교수님 별명이 "엔젤" 인데 왜 별명이 엔젤 인지 알 수 있었다. 공부도 최고로 잘하시고, 직업도 교수고, 인간성도 최고 좋고 대체 그 교수님께 부족한 게 뭘까.  

새로 오는 아이는 오자마자 시간표도 바꿔야 하고 수강신청도 해야되서 힘들것 같지만 의욕있고 똘똘해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걔도 일자리가 급했는데 일자리를 갖게 되서 잘됐고 나는 인수인계 제대로 시켜서 사람을 앉혀놓고 가니 마음이 편하고 누이좋고 매부좋았다.

7월 21일부터 8월 13일까지 제일 더웠던 시기에 모교 사무실에서 혼자 시원히 잘 보냈다. 집에 있었다면 그렇게 시원히 있을 수 없었을 거다. 낮에는 혼자 라디오 듣고 음악도 들었으니 피서를 갔어도 그보다 좋을 순 없었을 거다.

정확한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 알 수 없어서 독립을 하기도 뭐하고, 처음부터 지각하면 안되니 일단은 전철을 타야 하는데 7시에 집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잘 할 수 있겠지?

 

어제는 수술한 친구 병문안 때문에 아산병원에 갔는데, 정말 크긴 무지하게 컸다. 환자가 엄청나게 많고 친구도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나같으면 내 친구처럼 온화하게 친구 맞아주지 못했을 것 같은데 친구는 참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존경스러웠다.

 

나는 아마도 내일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면서 전철에 탈 것이다. 몇 년전에 충무로로 회사 다니면서 신도림에서 내리는 사람들 보면서 정말 딱하다 생각했는데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역시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