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느낌.

일상 2010. 9. 11. 08:09

내가 웬만한 일에는 눈을 꿈쩍도 안하게 된 사실을 느꼈을 때 나는 조금 서글프다. 오늘 생긴일 만해도 그렇다. 고등학생의 나 같으면 아마 눈물도 엄청 많이 쏟고 밤새 울어서 눈이 퉁퉁 불어선 애들이 내 얼굴을 보고 도저히 무슨일 있었냐고 말을 못 걸정도의 몰골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나올랑 말랑 하다가 결국 울지 않았고, 태연히 kbs 1에서 하는 브라질 이라는 다큐도 시청하고, kia 타이거즈가 8회말에 실책을 연발하며 무너지는 경기도 끝까지 시청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주는 상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받는 상처보다 치명적인 거 같다. 난 그래서 친한 친구들이나 엄마나 동생한테 조심하려고 하지만 이게 디게 웃긴게 오히려 남한테는 조심하는데 가족한테는 심한 말을 하고 더 못된 행동을 하고 짜증을 내고 그런다.
오늘도 엄마아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뼈져리게 했다. 가끔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했다가도, 내가 어렸을 때 부터 자라면서 느껴왔던 지금의 감정들을 다시 되돌아보면 두려워 지고 그래서 회피하게 되고 그렇다. 아직 모성애 같은 건 모르지만, 나와 비슷하게 생긴 애가 또 똑같이 상처 받으면서 자라는 걸 옆에서 보다보면 난 아마 엄청 죄책감을 느낄 거다. 이런 걸 보면 난 지독한 비관론자임에 틀림이 없다.
누구나 가족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다가도 정말 밉기도 하고, 또 고맙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그냥 어디로 멀리 떠나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런 건데 어렸을 때의 나는 어떻게 보면 어떤 가정에서나 당연하게 나타나는 일에 예민하게 반응을 했고 일상생활에 타격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게 참 답답했고 불만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크고 나니까 울지도 않고, 아마 내일 회사가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종일 삽질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
좋은걸까? 이런건?
점점 더 인생이 우울해지고 나는 더욱더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민했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엊그제 안과 의사가 내 눈을 다 꼬매버리겠다고 말하는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그게 개꿈이었던 거 같다. 완전 공포스러워서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시체처럼 잠들었는데.


그나마 공채하는 곳에 원서를 내려고 중부교육청까지 가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떼어왔다. 몇년만에 보는 생활기록부인지. 신기했다. 종이 몇장으로 내 과거를 마주대하다니.  내 생활기록부의 몇몇 기록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출결상황
- 3년 내내 개근. 흐흐흐. 고등학교 때 난 꽤 착실했다. (그리고 꽤 건강했나보다) 지각은 많이 했지만.

2. 신체발달상황
- 키는 3년 동안 0.5 cm 밖에 안자랐고, 체력급수는1학년, 2학년 3학년 각각 1급 2급 1급. 이거 누가 보면 완전 체육소녀인줄 알겠지만, 중학교 때는 4급 4급 5급 이었는데 전라북도의 체력급수 기준은 불구가 아닌이상은 2급 받을 수 있나보다. 나 50미터 9초에 뛰고, 다리 밑으로 손 내리기는 9cm (만점은 20cm 넘었음)로 반 전체에서 꼴찌에서 2등하고 윗몸일으키기는 야매로 만점 맞았는데. 아 오래달리기는 선생님이 날 다른 반 애로 착각해서 1바퀴 덜 달린 적도 있었다. 거의 걸어서 들어왔는데.. 아 나는 세상에서 오래달리기를 최고로 싫어했었지. 이때 전학와선 초등학교 때 부터 생전 못받아보던 체력장 1급을 받았다. 전학가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군.

3. 수상경력
- 해당사항 없음. 크크크

4. 진로지도상황
- 특기 또는 흥미는 독서, 음악감상, 독서. 1학년때 장래희망은 영화평론가 라고 써 있다. 풋. 2학년 3학년은 진짜 부끄럽지만 연구원이랜다. 우리 엄마 아빠의 진로희망은 3년 내내 공무원.

5. 특별활동상황
- 1학년 : 배드민턴반, 2학년 : 수학반, 3학년 : 현대문학반. 전혀 일관성이 없다. 그도 그럴것이 저기 있는 클럽활동부서는 클럽활동 시간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허송세월 보내기로 유명한 선생님 쫓아서 들어간거다. 클럽활동 들어가선 그냥 몇시간 내내 친구랑 놀다왔음. 배드민턴반 옆에는 나보고 서브능력이 뛰어나다고 써있다. 푸하하하. 배드민턴반 가서 배드민턴 친건 아마 3번도 안될 걸.

6. 단체활동
- 난 전학가는 바람에 1학년때도 극기훈련 받고, 2학년때도 극기훈련 받아야 했는데 2학년 때는 지리산 가기 싫어서 그냥 안가고 학교에서 잡초 뽑았다. 갔다온 애들 말 들어보니 천만번 잘한 일이었다. 오전동안만 잡초 뽑고 오후에는 더워서 교실에서 비디오보고.. 캬. 천국이었지.

7. 행동발달상황
- 1학년 : 침착하며 끈기 있는 일처리를 함.
  2학년 : 언행이 바르고 신중하며 근면한 학생임.
  3학년 : 차분한 성격에 예의가 바르고 근면 성실하며 표정이 밝음.
  오~~ 언빌리버블!!!! 이런 평가가 나오다니.

8. 교과학습발달상황
- 1학년 1학기 : 미술하나만 수 맞고 다른 과목은 다 양 아니면 가의 평점. 이때 저번 블로그에도 썼지만 이모댁에서 한참 방황중이었다.
- 1학년 2학기 : 국어 성적 제일 좋음. 다행히 양하고 가는 없고 오 1학년 2학기때는 미도 없다. 1학년 2학기부터는 전라북도 학교 성적.
- 2학년 1학기 : 영어 성적 제일 좋음. 근데 난 2학년 때 부터 이과 였다는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2 성적 제일 안좋음.
- 2학년 2학기 : 우와 나 한문 전교 1등이었어!! 근데 난 요즘 신문 보면 한자 거의 못 읽는데..  고등학교 땐 하룻밤만에 한자 다 외우고 시험을 봄과 동시에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곤 했었다. 아 그때 좀 해놓을 걸. (한문 못하는 거 꽤 큰 컴플렉스임)
- 3학년 1학기 : 작문 성적 제일 좋음. 3학년 1학기 때부터는 선생들이 대학교에 수시입학시키려고 점수 막 퍼주는 바람에 평어도 제일 좋다.
- 3학년 2학기 : 역시 작문 성적 제일 좋음. 1급 2급 1급의 체력급수에도 불구하고 체육은 거의 전교 꼴찌권. (실기평가 항상 최하점 맞았고, 체육시간에도 실내 체육관에서 누워자기 일쑤였다. 뭐 더 중요한 건 지독한 몸치이기도 하고)

이번 생활기록부 때문에 날짜까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난 1999년 7월 13일에 전라북도로 이사왔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엄마가 와선 전학 절차 끝냈다고 말씀하시는 거다. 나는 애들한테 인사한마디 못하고 쉬는 시간에 짐챙겨서 교복 입은 채로 낯선 곳으로 왔다. 쉬는 시간에 사물함 정리하는 나를 보며 너 어디가냐고 묻길래. 나 전학간다고 했더니 애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뭔 말 하냐고 하다가 내가 빌렸던 물건을 주인한테 다 되돌려주고 신발도 안신고 그냥 슬리퍼 신은 채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니까 그때서 진짜냐고 하면서 몇몇은 고맙게도 눈물까지 글썽거려줬다. 학교를 나올 때만 해도 안 울었는데 그런 날 보고 우리 엄만 우셨다.  아빠 차를 타고선 5개월 밖에 못다녔던 학교를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다니고 싶은 학교였다. 14지망 중에 1지망에 쓴 고등학교 였다. (그때 당시 인천의 고등학교 입학 시스템은 무식하게도 인천에 있는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해 들어가고 싶은 순위를 적어 내야만 하는 시스템이었다) 운좋게도 1지망에 붙어서 좋아했던 학교였다. 중학교 친구들도 많았는데.. 난 중3때도 전학생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어렵게 친해진 친구들이었는데. 그걸 다 뒤로 하고 떠나려니 미칠 것만 같았다. 난 중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흰 교복 윗도리에 초코 아이스크림을 쏟았다. 다신 입을 수 없는 교복이었다. 그렇게 얼룩덜룩 한 교복을 입고 한 눈에도 탐탁치 않았던 새 학교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 혼자만 남색치마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난 아직도 1999년 7월 1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학교에 다녔지만 난 3년 내내 결국 그 학교에 적응을 못했던 것 같다. 빌어먹을 이력서 때문에 다시한번 감회가 새로워져버렸다. (아니 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내라고 하는거냐고) 내 고등학교 시절이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스쳐가는 것 같다. 제길. 안그래도 우울한데 말이다.

난 중3 3월 말에 대전에서 인천으로 전학왔다. 전학 수속 때문에 교육청에 갔던 때가 생각난다. 아빠가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시더니 남녀공학으로 갈래 여중으로 갈래? 이러시길래 그냥 여중 갈래요. 이래서 나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아주 가까운 여중에 다니게 되었다.
대전과 인천은 정말 딴판인 도시다. 난 중3때 전학와서 고1 여름에 다시 전학을 갈 때까지 내내 인천에 전혀 적응을 못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낯선 시절이다. 앞으로는 그런 낯선 내 모습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다. 일부러 우울해지려고 노력했던 시기라고 하면 웃기지만 실상이 그랬다. 난 신체발달도 다른 애들이 비해 엄청 느렸고, 그 덕에 사춘기도 늦었는데 중3때가 되어서야 사춘기가 와버린거다.
그 시기에 전학은 날 정말 힘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멀쩡히 있다가 집에만 오면 자기 직전까지 울다 잠들었다. 눈이 퉁퉁 부어서 다시 학교가선 잠 많이 자서 부었나보다고 말하고 그냥 또 수업 잘듣고, 또 집에와선 울고. 동복입을 때 전학을 와선 하복 입을 때까지 나는 하루에 한번이상 안 울었던 날이 없다. 내 기분과는 반대로 성적은 수직 상승을 거듭했고, 대전에서는 오늘이 시험인지 아닌지도 모른채로 학교와선 다 찍고 그냥 엎드려 자고 100점 만점에 32점을 맞고 평균 60점 맞고 담배피고 술마시며 남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애들과 놀던 불량 청소년 생활을 인천에 와서는 완전히 청산했다. 32점 맞던 과목을 중3 땐 심심치 않게 100점도 맞았으니 성적면에 있어서는 인천으로의 전학이 꽤나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인간인 줄 알았고 공부 잘하는 게 굉장히 힘든 건 줄 알았는데 진득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하면 누구나 다 되는 게 공부구나. 혹은 아.. 뭐 내가 머리가 완전 꼴통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공부에 있어선 자신감도 얻었다. 하지만 난 친구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전학을 가서도 난 친구가 없었다. 그냥 친구들은 있었지만 단짝이 없었다. 중고등학교때 단짝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없어본 자 만이 알 수 있다.
대학교에 와서 힘든 일도 많았고, 지금 직장 생활도 많이 힘들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로 우울했던 시기를 꼽아보라면 아직까지도 당연히 중3부터 고1까지 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전혀 치유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과거라 생각만 해도 진저리 칠 정도로 싫다. (이래서 발달 장애라는 것이 무서운 거다)
예전 홈페이지나 블로그에는 내 16살에서 17살 까지의 기억에 대해서 많이 썼는데, 예전에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나보다. 그 시기에 대해 쓰려면 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을 쓰고 난 후에는 또 그 때의 잔상에 시달려야만 한다.
복잡한 사정에 의해 나는 엄마와 헤어져 이모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미 난 다시 전학을 간다는 사실을 알고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이 고등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선생님한테 잘보이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내 성적은 다시 급하강을 거듭하여 전교등수는 약 300등 넘게 떨어졌다. 반등수로 30등이 떨어졌으니 말 다한거다. 이때문에 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에 평어는 거의 다 양 과 가 를 기록하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나 고등학교 때 양하고 가 하도 많아서 양갓집 규수였다고 농담 하지만, 그 때는 거의 인생 포기한 채로 살았다. 이모네 집에서 그냥 택시 타고 늦게만큼 학교오고 시험을 보든 말든 상관도 안했다. 우리 엄마아빠가 학교 선생한테 얘는 전학갈 애라고 말해놓은 터라 선생들도 내가 뭘하든 전혀 상관을 안했다.
중3때는 인천에서 계속 사는 줄 알고 그래도 친구들하고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공부도 하고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활달하려고 노력했던 애가 고등학교 오자마자 딴사람처럼 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도 계속 친구 해주는 애는 없었다. 애초에 중3때 전학와서 알고 지낸지 1년 밖에 안된 애한테 뭐하러 그렇게 해주겠나.

그런데 그 시기에 유일하게 내 곁에 있었던 친구가 있다. 그 당시에 나는 걔한테 단짝이 되지 못했다. 이미 그 친구도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친했던 단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중학교 때도,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못나게 구는 때에도 그나마 내 곁에 있으면서 편지 써주고 내 얘기 들어주는 사람은 선생도 이모도 이종사촌언니도 아닌 내친구 민양이었다. (이런 걸 보면 학창시절에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 알수 있다)
아직까지도 내 인생 최대의 컴플렉스로 남아있는 학창시절에 유일한 친구는 민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다시 전학을 가서는 헤어져 있었지만 우리 둘은 싸우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기도 하면서 대학교 때문에 내가 다시 올라오면서 만났다. 대학교 때 부터는 우리 둘은 단짝이 되었다. 집도 가까웠고, 20살이 넘은 우리는 의외로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전에는 민양이 길가다가 다리가 꼬여서 넘어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니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 친구는 분명히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그대로 넘어졌을 거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둘은 서로의 행동에 대해 빤하니까.
오늘도 그 친구와 하루종일 같이 놀았다. 난 스탬프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친구에게 새로운 스탬프 세트를 선물했다. 연인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데 이런 걸 챙기는 게 참 우습지만, 오늘 이렇게 나름대로 선물도 주고 받고 사진도 찍고 고등학교때 자주 가던 부평역까지 가서 웃고 떠든 이유는 우리가 알게 된 지 10년이 되었다!!! 라면서 자축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이든 낯설어 지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보통 그 낯선 시기는 힘든 시기일 때랑 겹치는 것 같다. 최고의 활달함을 자랑하던 내친구 민양도 가장 친한친구인 나에게 조차 낯설어지는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행히 걔도 나도 그 낯선 시기는 다 넘겼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둘다 그 낯선 시기에도 곁에 있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내친구 민양에게 너무 감사하다. 16살 이후의 내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민양! 36살되어서도 같이 친구했으면 좋겠다.


극복해야 할 문제

일상 2007. 12. 20. 09:37
난 몸을 엄청나게 사리는 사람이라 어제 밤에 11시에 누웠는데 2시간 넘게 잠을 못 이루며
아.씨. 이러면 내일 진짜 피곤한데!!!!
라면서 끝끝내 누워서 뒤척였다. 누워서 피로라도 풀자 싶어서.
어제는 아빠 생신이었다. 주말에 이미 선물을 드렸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원주에서 보셨다던 '왕이 되려고 했던 사나이' DVD를 추가 선물로 드렸다.
엄마가 맘먹고 갈비를 하셔서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케익까지 아구아구 집어 먹었더니 배가 살살 아팠다.
TV에는 온통 대선특집방송만 하는 중 이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아서 여론조사는 다 조작한거라고 라고 믿고 있었다.
난 정동영이 흔히 말하는 사표를 찍었다. 그렇다고 이회창을 찍은 건 아니었다.
난 이명박이 싫다.
어디서 봤듯 경제회생이 대통령의 최대 공약이 되는 것 자체가 비극 아닌가.

어제 누워서는 또 우울한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겐 나 좀 불쌍하지 않어? 라고 말을 했지만, 어제 느꼈던 감정은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찌질한 나 자신에 대한 동정심은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계속 좀 나쁘네. 이것도 거짓말이다. 기분 나쁜 것과는 다른 감정이다.
이 생각 자체를 우울한 생각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좀 웃기다.

어제밤에 누워서 2007년에 나에게 어떤 일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나.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렇다. 난 사실 7월에 벌어졌던 사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난 비겁했다. 그렇다. 완전히 비겁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나는 훨씬 더 심하게 모욕하고 비방하고 경멸했을 거다.
그래 이전의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이후의 그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새삼 깨닫고 있다.
아직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나서 괴롭다.
난 아직도 궁금한 것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당시 오랜시간 그 말을 기억하면서 괴로워하라는 의도로 그런걸까. 아니면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걸까.
어떤 의도에서든 나는 당분간은 그 말때문에 괴로워할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될 말을 하면서 이 사람이 내가 한 말 때문에 얼마나 긴 시간을 괴로워할지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었나.
그래.. 솔직히 말하면 한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
내가 이렇게만 말하면 이 상황을 끝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쏟아낸 말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비겁하고 상대방에게 부담과 민폐만을 주는 인물이었다고 해도,
난 진심을 다해 많이 좋아했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니 애쓰지 않아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게 그냥 너무 슬픈거다.
난 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걱정도 많이 했는데
그 사람은 내 일기를 보면서 나에 대하여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살까 생각했다는 것이.
나는 그 사람에게 있어 끝끝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고 말도 안되는 불만만을 쏟아내는 여자였다는 것이.
그런 중에도 그래도 내가 그 사람에게 아주 큰 의미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의미있는 사람이겠지.
내가 가끔은 위로가 되는 사람이겠지.
라는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서 전화 한통에 울고 웃었다는 것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많은 이유들 때문에
7월이후로 난 말로는 다 못할 만큼 가슴이 쓰리다는 거다.
흠. 그래. 뭐 이것조차도 그 사람의 의도와는 완전히 벗어난 말도 안되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겠지만.

2007년이 끝나고 2008년이 쨍하고 밝으면 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순전히 감정적인 문제라 누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난 상대방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여자라는 생각에서 언제쯤 자유로워 질 수 있을지.
극복하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