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의미

일상 2012. 11. 9. 01:25

학창시절 나는 내 또래 남자애들과 얘기할 일이 없었다. 고1때 전학을 가서 학원도 안다니고 학교-집만 왔다갔다 했고 실제로 고등학교 다니는 3년 내내 내 또래와 말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이텔에서 채팅으로 말해본 적은 있지만.
그렇게 공부를 해서 인천으로 대학을 와보니 대학에는 옷도 얼굴도 화장도 모두 나보다 세련된 여자 애들도 많고 가까이 해본 적 없는, 말한마디 해본 적 없어서 어색한 내 또래 남자애들이 대학교 안에 바글바글했다.
입학 초에 나는 열등감때문에 남들 앞에 나서는 게 쉽지가 않았다. 겉으로는 내색은 안했지만,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항상 약간의 초라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예쁘다." 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예쁘다는 말을 남자에게 들은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결국 난 끝끝내 그 남자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남자가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는 항상 오늘은 우연히 그 사람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캠퍼스 내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걷고,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가고, 식당에 갔다. 심지어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어쩌다 운이 좋게 도서관에서 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면 가슴이 엄청나게 뛰어서 그 방향으로는 고개를 못돌릴 정도였다. 

새벽 1시 39분에 잠도 안자고 서른살 여자가 혼자 블로그에 쓰기에는 민망하고 웃기지만, 그 분이 나에게 말을 건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변했다. (말하고보니 부족하지만 솜씨가 부족하여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분의 마음이 넓고 깊고 또 눈치가 빨라서 주눅들어 있는 1학년 여자애에게 그냥 한마디 해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살 4월초에 그 한마디를 해준 덕분에 나는 대학시절에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졸업도 할 수 있었다. 

그 분이 졸업을 해서 더이상 우연히도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허한 느낌.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으랴. (또 그 여자친구가 엄청 예쁘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더욱더 컸었지. 흐흐흐)

그 뒤로도 그 분은 아주 가끔 나에게 연락도 하고 보고 싶다는 말도 몇 번 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미련하게 난 도망만 쳤다. 그렇게 좋아 했으면 여자친구가 있어도, 차일 거 뻔해도 고백해볼 걸. 하는 후회를 그 분이 졸업한 후 엄청나게 했다. 

이게 내 첫사랑의 전말이다. 짧게 줄이면 '내가 어떻게 감히?' 라는 생각에 아예 시도조차 못해보고 혼자 좋아하다 끝난 거. 

쳇. 내 첫사랑은 뭐 이렇게 시시해. 

어디에 이게 내 첫사랑이오. 하고 말하기도 쪽팔리다. 하지만 그 사람이 결국에는 내 첫사랑인 걸 부정할 순 없겠지. 

딱 10분만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숨어서라도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기회는 다시는 안오겠지. 음... 안오는 게 더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추신.  작년 트위터 아이디를 개설할 때 그 사람 메신저 아이디에 있던 숫자를 똑같이 붙였다. 미친 기억력. 심지어 그 예뻤던 그 사람 여자친구 이름도 아직도 기억한다. (얼마나 미웠음)



일주일 후.

일상 2010. 3. 11. 11:57
나는 남자가 나에게 호의를 배풀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물론 나한테 호의를 배푸는 때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대학 때도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배풀면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물론 호의를 받는 건 복받은 일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눈에 뛰지 않는 나를 발견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크다.  처음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나 대학 2학년 때 재수로 들어와서 나랑 딱 한번 포켓볼 같이 친 남자 애가 (도대체 어떤 경로로 알았는지 모르겠는데)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편지를 보냈을 때 편지에 眞光不輝 라는 말을 하며 잠깐 날 감동시켰던 적이 있다. 별로 화려하지 않은 여자한테 하기 좋은 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난 걔가 날 스토킹 비스므리하게 내 뒤를 밟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서워서 피하다가 결국 아무 일도 없이 끝났다.  그도 그럴 것이 포켓볼 한 번 치고 1년 넘게 전혀 연락이 없다가 남자친구랑 헤어지자마자 전화한다는 거 자체가 그때 당시에는 쪼금 공포였다.
여하튼, 몇 안되는 남자들이 대학에서 (입사 이후엔 전혀 없었음 큭) 노골적인 멘트를 날려도 못본 체 하거나, 못들은 체 하거나, 화제를 전혀 다른 것으로 돌리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런건데 간혹 그걸 지금 날 무시하는거냐. 이렇게 받아들이는 분도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계속 다른 소리를 하니, 니가 지금 그러는 건 지금 상태가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맞냐고 물어봐서 대답을 못했다. 결국 또 혼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날렸지만, 모르겠다. 어쩌면 난 진짜 지금 상태가 훨씬 더 편하고 좋은 건지도.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지금 이건 아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럭저럭 행복하게 지냈을 거 같은데.
그런데 내 지론은 신중해서 나쁠 건 전혀 없다.기 때문에 만족한다. 후회할 짓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송도중학교

일상 2007. 11. 21. 16:32

골초에 주량은 소주 7, 당구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이제 와서 청승맞게시리 왜 예전에 알던 남자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괜히 이젠 주변에 남자 없으니까 저런다. 쯧쯧..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여중, 여고를 졸업했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등학교 시절 내내 또래 남자애와 한 번도 대화할 일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몇 번 있었지만) 그 이유를 찾자면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역이 혼자 30분 넘게 걷는 중에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하는 일도 있을 만큼 시골이었다는 점, 동아리나 학원 등을 전혀 다니지 않은 점, 우리학교 앞이 다 산과 논 밭이었다는 점, 축제 때에도 외부인을 철저히 차단했다는 점. 등등 찾자면 무궁무진한 이유가 있다. 이래 놓고도 고3때 여대를 가려고 했으니 그 상황에 대한 불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왠지 한국인은 삼세판! 여중 여고 여대까지 졸업해 주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점수 모자라서 못간 건 그렇다치고;

 

그런 나에게 20살 처음 입학한 대학은 진정한 쇼크! 였다. 후문에 들어섰는데 온통 남자뿐 이었다. 여기도 남자, 저기도 남자. 처음에 눈을 어디에 둘지도 몰랐을 뿐 더러 이 세상에 내 또래 남자가 이렇게 많이 살았구나! 하는 거 자체에 좀 놀랐다. 그 덕분에 입학해서 몇 개월간은 오빠 라는 호칭이 굉장히 낯설어서 혼났다. 집에 오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최 불러봤어야지. 안 그러려고 노력은 했지만 남자들 앞에만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도 제대로 한 번 못 쳐다보고 안절부절 했다. 그래서 너 내외하냐?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지금이야 20살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남자랑 대화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이런 게 나쁜 건 절대 아니지만 그만큼 나이 들어버린 기분이다.

 

어찌되었든 20살의 나에게 생전 처음 듣는 소리만 해주는 남자가 있었다. 내 입으로는 도저히 못할 엄청난 칭찬들이었다. 나를 왜 좋게 봤는지 이해는 좀 안되지만, 사람이 주변에 있든 없든 너무 노골적이고 진지하게 나한테 예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 안 그래도 어색한 사람들 속에서 난 몸 둘 바를 몰랐다. 내가 진짜로 이쁘고 귀여운 여자애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 애한테 그러시니 주변 사람들이 다 비웃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블로그를 보면서도 비웃는 사람 꽤 될지도 모르지 크크)

 

거의 매일 보는 사람이 매일 같이 저런 이야기를 하니 나중에는 내가 생각보다 이쁜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 드린다. 20살 이전에는 한 번도 못해본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해 주셔서.

 

매일 같이 하던 그 말이 진짜였는지 거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구장창 나에게 잘 대해준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대학 4년을 통틀어 소갈비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어보고. (. 그때 소갈비!!! 진짜 맛있었다!) 그냥 밥이나 그 외의 먹을 거 사준 건 아마 셀 수도 없을 것 같고. 누구랑 밥 같이 먹으면서 그렇게 챙김을 받아보기도 처음이었고. 이거 맛있다 먹어봐라. 저거 맛있다 먹어봐라 등등의 말까지.

 

남자들을 아예 구경도 못해본 나에게 , 담배, 당구 라는 남성적 이미지 (이분을 깍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공부도 엄청 잘하는 분이었으니까) 자체는 막연하게 좀 두려웠고. 왠지 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고 그랬다. 선뜻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 예요! 라고 물어 볼만한 용기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다가 그 분에게 몇 년을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여자가 엄청나게 이쁘다는 것 까지. 이거야말로 3단계 펀치 아닌가. 나중에는 친구랑 학교 앞에 그 여자분하고 같이 다니는 걸 목격까지 했는데 그 친구가 날 위로해주려 그랬는지 어쨌는지 전혀 돈독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 듣던 대로 과연 미인이긴 했지만. 근데 뭐 돈독하지 않은데 어떻게 몇 년을 사귀느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 둘은 돈독하구나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여자친구분 엄청 이쁘던데요? 라고 시치미 때고 말했더니 웃으면서 여동생이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그냥 무언(無言)의 인정을 해버렸다. 그리고선 3년 동안 점점 소원해 졌는데 가끔가다 도서관에서 만나거나 친구가 쿡쿡 찌르면서 맛있는 거나 얻어먹자고 부르라고 (맛있는 거 먹으려고 그런 거라기 보단 이 친구는 그 분이랑 내가 잘 되길 원하는 애 중 하나였음) 해서 가끔 밥을 먹을 때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지금 25살이 되고 생각해보니 절대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그 당시에는 그 분이 나이가 많은 것 처럼 느껴졌고 난 잘 사귀고 있는 사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고 그랬다. 지금도 바람둥이인가? 진심이었나? 아리송하지만, 상대방이 이랬든 저랬든 나는 뭐 항상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쁜 여자 사귀면서 왜 나 혼자 가슴 설레게 왜 그러나 싶어서 나 가지고 장난 좀 그만 치세요. 거짓말 좀 그만하세요. 등등의 말도 진지하게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벌써 3학년이 되어버린 나에게 그분이 어느 날 이젠 연락 안 하겠다. 여기서 연락을 안하고 안 봐야 나중에 날 떠올렸을 때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는 말을 했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못 만났다. 

 

위에 등장하는 친구에게 이 말을 했더니 .. 앞으로 그 이상 남자 없을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했다. 대부분은 괜찮아. 앞으로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건데 너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해버린 내 친구. 그 뒤로 우리 둘의 대화는 이러하다.

아니 그런데 왜 여자친구랑 안 헤어지고 나한테 사귀자고 안 해.

너는 그냥 그 사람이랑 사귀고 헤어져도 나이 어리고 창창하지만, 그 사람은 그 나이에 그렇게 헤어져버림 진짜로 다 끝인데 어떻게 쉽게 그러냐.

아냐 아냐. 진짜 내가 좋았으면 그렇게 했어야 돼.

이게 내 결론이었다. 진짜 좋았으면 그렇게 해야지. 싶었다. 그래서인지 별 아쉬운 마음도 안 들고 종종 생각나면 그랬었지~ 하고 말아버렸다. .. 사실 이제까지 말 안한 게 있는데 나랑 나이차가 5살 넘게 났으니 좀 나긴 했다. 그래서 매일 나에게 내가 3살만 어렸어도!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늘에 맹세하는데 난 정말 나이차에 대해서는 한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지금도 뭐 내 위로 10살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고.

 

나에게 그 사람은 그냥 종종 생각나는 정도였고 아주 가끔은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현재 나는 이제 그 사람을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곳에 살게 되었다. 언젠가 또 그 분에게 삼겹살을 얻어먹고 있는데 (같이 먹은 음식들이 소갈비에 삼겹살에..;;) 옆 테이블에 있는 사람하고 인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다. 아는 사람인가? 하고 말았는데 중학교 동창이라면서 송도중학교 나왔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내가 작년에 이사온 여기 동네가 바로 송도중학교 옆이다. 이제까지 그 송도중학교를 기억하고 있는 나도 웃기지만, 매일같이 출퇴근을 위해 송도중학교를 지나갈 수 밖에 없는 이 상황도 무지하게 웃긴 거 아닌가.

 

아직도 그 분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유부남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몇 년이 지난 일을 생각하게 되고 그 분을 차마 완전히 지우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 상황이 나에게는 저주라면 저주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해 자신을 매일 같이 회상하고 곱씹어주는 사람이 지구상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있다는 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축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분은 분명 결혼 후에도 잘 사실 거라 믿는다.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은 나는 매일같이 송도중학교를 지나가겠지만 말이다.

 


 



나 참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다니. 혹시 이 긴 글을 다 읽으신 분이 있다면 축하합니다. 다 읽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