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미 인' 을 보고

위로 2017. 8. 14. 11:26


" 난 살기 위해 살인을 하지만, 넌 마음 속으로 수도 없이 살인을 했지.

  오스칼... 넌 나와 같아. 제발 한 번만 내가 되어봐. "

* 내가 기억하는 대사일 뿐 정확한 대사는 아님.


   영화를 보고 호들갑 떠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난 남의 호들갑 때문에 본 영화는 대부분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어떤 영화에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건 앞으로 그 영화를 감상할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스' 보고는 어마어마하게 호들갑 떨고 말았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도 호들갑을 떨어야할 것 같다. 영화 '렛 미 인'은 내 인생 영화 중 한 편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 영화를 앞으로 10번 연속 시청하라고 해도 즐겁게 시청할 수 있을 정도다.

  혹자는 거의 대사가 없고 과감하게 대부분의 배경 이야기를 생략한 이 영화가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여름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스웨덴의 겨울 풍경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습하고 무더운 여름 밤에 이 영화를 보며 살을 에는 추위와 마법에 걸린 듯 신비롭고 하얀 겨울을 꿈꿨다. 추운 걸 혐오해도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겨울을 어느 정도는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 꼭 허락을 받아야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 언제나 타인에게 해로운 존재인 뱀파이어 '이엘리' 가 피눈물을 흘리며 '오스칼' 에게 애원하는 장면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며칠이고 이 영화의 환영에 시달리고 눈물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존재의 본질이 어떻든, 어떤 죄를 저질렀든, 무슨 일을 당했든 모든 이는 외롭고 종종 도저히 입밖으로 내뱉지도 못할만큼 사악한 상상을 하며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간다. 결국 너와 나의 구별이 무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누구나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애초에 사랑받지 못할만큼 추악한 존재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잔혹한 장면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 마지막 수영장 장면에서는 전율했고, 어린 남녀의 사랑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본 그 어떤 사랑 영화보다 에로틱했다. 특히 이엘리가 밤에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오스칼 침대로 들어오는 장면에서 어찌나 가슴이 뛰든지. 어린 남녀의 첫 사랑이야기를 단지 순수하게만 연출하는 흔한 일본 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훌륭하고 특별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에 대해서 찾아봤는데 원래는 주로 코메디를 연출하던 감독이라는 정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은 남을 감동시키는 능력보다도 훨씬 더 우월한 능력인가 보다. 처연한 분위기에서도 끝끝내 웃긴 구절 하나씩은 섞여 있는 체호프의 단편소설이나, 진로를 잘못 택한 듯 탁월한 정극 연기를 보여줬던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짐캐리를 봐도 역시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인 것 같다. 웃길 수 있으면 뭐든 잘할 수 있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렛 미 인'의 성공 후, 헐리우드에 진출하여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연출했다고 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는 소설을 먼저 읽고 보려고 아껴두고 있다. ('렛 미 인' 보다는 별로라는 소문이... 하긴 이보다 잘만들기 쉽지 않겠지.)


P.S 1. 어쩌다보니 엄마랑 같이 '렛 미 인'을 시청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호러' 영화 참 좋아한다. 초등학생 때도 여름방학 때 낮에 여름 특선으로 해주던 13일의 금요일이나 사탄의 인형 같은 호러 영화를 맨날 엄마랑 같이 시청했다. 재작년 '샤이닝' 이랑 또 몇 년전 '컨저링' 도 엄마랑 같이 봤다. 대부분 영화는 시청하다 1시간 정도 지나면 결국 쿨쿨 주무시는 우리 엄마인데, 호러영화는 웬만하면 끝까지 다 시청하시고, 이번 '렛 미 인' 역시 재밌으셨다고.


P.S 2. 유럽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공식 개봉하는 영화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보장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특히 서유럽 영화 아닌데 정식 개봉한 경우라면 더더욱.


PS 3. 처음 이엘리를 봤을 때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뱀파이어와 이미지와 안맞는다 생각했다. 오히려 오스칼이 내가 생각했던 뱀파이어 이미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영화 설정 상 이엘리의 나이가 모호하게 느껴져야 하고, 어느 정도 무자비함도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이미지에는 딱이다. 오스칼을 맡은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북유럽 어린이 그 자체 였다.  감독은 두 아역 남녀배우를 찾느라 1년 동안 오디션을 봤다고 하던데, 역시 공들여 뽑은만큼 담백한 연기가 최고다. 우리나라 아역 배우들이 보여주는 귀여운 척의 함정에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래도 귀엽지만)


사진출처-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