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많음 & 스크롤 압박 & 호들갑 경고)


  지난 주말에 영화 Maurice 를 보고,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있다. 영화를 본 후, 가슴이 뛰어 잠을 설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영화 '모리스' 는 E.M 포스터가 죽은 뒤에야 공개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빅토리아 말기 동성애가 엄격하게 금지된 영국에서 중간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난 '모리스 홀'은 1910년대에 캠브리지에 입학하여 비밀 토론 모임에 가입한다. 그 곳에서 한학년 선배인 '클라이브 더럼'을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 최상위 가문의 아들이었던 클라이브는 동성애를 부정하던 당시 사회의 규율에 굴복하고, 결국 위험한 사랑 대신 안정을 택하며 귀족 가문의 여성과 결혼을 한다. 클라이브가 결혼을 한 후에도 여전히 클라이브 곁을 맴돌며 방황하던 모리스는 뜻밖에도 클라이브 저택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알렉 스카다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다.




  아아.. 정말 이 영화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위에 첨부한 트레일러에는 휴 그랜트 이름이 1등으로 나오고 엄청 중요한 사람인 양 나오는데, 현재 휴 그랜트가 가장 인지도 높은 스타이기 때문에 저렇게 편집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리스'는 영화 제목처럼 모리스가 완벽한 주인공이다. 그리고 포스터에서 유일하게 정면 얼굴이 나오는 중요한 인물이 마지막 사랑인 알렉인데, 트레일러에는 알렉 관련 영상이 코빼기도 나오지 않아 서운하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


1. 우아한 화면과 음악

  트레일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 알 수 있듯, 이 영화의 음악은 정말 서정적이다. 나는 음악과 함께 바닷가에서 연을 날리는 첫 장면부터 이 영화에 마음을 완전히 빼았겼다. 1910년대의 캠브리지와 런던, 클라이브의 저택, 그리고 당시 남성들의 멋진 복식 등 볼거리가 차고 넘친다. 특히 내가 기억에 남는 장면은 캠브리지에서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을 멀리서 잡은 캠브리지 대학 풍경인데,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의 색과 캠브리지 대학의 건물의 모습이 아름답다. 1987년도에 만든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꽤나 파격적인 카메라 촬영 장면이 많다. 폐쇄적 느낌이 나도록 하늘에서 캠브리지 전경을 보여줬던 화면도 굉장히 멋있었고, 클라이브가 결혼한 후 방황하는 모리스의 권투 스파링 장면의 촬영도 인상 깊었다.

  2시간이 넘는 영화의 모든 장면이 다 구도, 색감, 조명 등이 감독이 엄청나게 고민한 흔적이 보여,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즐겁고 귀가 즐거웠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는 감동에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2. 해피엔딩

  이 영화를 보고 부랴부랴 원작소설 '모리스'를 읽으려고 인터넷 서점을 뒤졌는데, 2005년에 열린책들에서 한번 출판되고 현재는 절판되서 중고책 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중고서점 세군데에 주문을 넣어놨는데, 한군데는 벌써 재고 없다고 주문을 취소시켰고, 두군데는 찾는 중이라는데 제발 재고가 있어서 내 손에 왔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모리스'는 E.M 포스터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부끄럽지만, 난 이제까지 포스터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서,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것도 이제서야 알았다. 오늘 집에 친척이 온다고 하여 인천에 새로 생긴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부랴부랴 도망쳤는데 거기에 '전망좋은 방'이 있어서 얼른 구매했다. 카페에서 '전망좋은 방' 책 뒤에 있는 작가 연보를 보니 그가 사랑했던 남자들이 결국에는 모두 여자와 결혼했더라. 내 사랑을 남 앞에서 철저하게 숨기며 내 애인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일생동안 몇 번씩 지켜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서 포스터는 소설 '모리스' 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는 결말을 쓰지 않았을까.


3. 젊고 잘생기고 멋진 배우들

  애초에 '모리스'를 보려고 마음 먹은 것도, 잘생긴 남자를 좀 보고 싶어서였다. 그렇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나의 가장 큰 목표는 귀족미 넘치는 팽팽하고 귀엽고 어린 휴 그랜트 를 마음껏 감상하는 것 이었다. (목표는 당연히 초과 달성)

  원작 소설에서는 모리스가 흑발로 나온다는데, 제임스 아이보리는 금발의 '제임스 윌비'를 모리스 역으로 캐스팅했다. 역시 E.M 포스터의 원작을 영화화한 '전망좋은 방' 의 주인공 '조지'도 소설에서는 흑발인데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금발 배우를 캐스팅 했다. 아마도 감독이 금발 미남을 선호했던 것 같다. 뭐 나는 원작을 안봐서 금발이든 흑발이든 아무 상관 없었다.


밉상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휴 그랜트 진짜 너무 잘생김.


  처음에는 너무나 샤방하고 잘생긴 클라이브역의 휴 그랜트에 비해 모리스 역 맡은 제임스 윌비의 외모가 미적으로 한단계 아래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영화를 계속 보다보면 그런 생각 전혀 안든다. 제임스 윌비도 그 나름대로 이 영화에서 너무나도 멋지다.


금발 미남 모리스.


모리스 역 맡은 제임스 윌비 님. 188cm 의 키에 양복 입은 모습 진심 멋졌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일 멋진 건 바로 바로 '알렉 스카다' 역을 맡은 '루퍼트 그레이브스' 다. 나는 이 배우 셜록에서 레스트레이드 경감으로 처음 봤을 때도, 와 진짜 저 정도면 세상에서 제일 멋진 50대 아저씨 중 하나 아닐까.. 라고 감탄하며 멋있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남자로 태어나면, 일생내내 멋진 남자로 살 수 있다는 불합리함. -드라마 셜록 속 레스트레이드 역을 맡은 50대 아저씨 루퍼트 그레이브스-


  그런데 이 영화에서 24살의 '루퍼트 그레이브스' 님 너무 남성미 넘치고 멋지셨다. 요즘 자려고 누우면 어김없이 알렉이 모리스에게 고백하는 떠올라서 스스로 이게 뭔 남사스러운 일인가 싶다. 그만큼 이 영화의 알렉 스카다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기타 생각


I. 매력없는 클라이브의 부인


클라이브 부인보다 모리스가 더 예쁨.


  위에서 말했듯,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배신하고 '앤 우즈' 와 결혼을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나온 앤 우즈 역할 맡은 배우가 (내 기준으로) 너무 매력없이 못생겨서 클라이브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좀 쌤통이라 생각했다.


II. 클라이브와 알렉

  영국에 대한 책을 읽으며 정말 이해가 안갔던게, 아직도 신분제가 존재하고 심지어 각 신분 별로 영어 발음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그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점 이었다.

  영화를 보면 클라이브가 쓰는 고급스럽고 나긋나긋한 영어와 거친 알렉의 영어를 비교해서 들을 수 있다. 영어 발음 뿐 아니라 귀족 가문의 자제인 클라이브의 행동과 정육점 주인의 아들 알렉의 행동도 비교하여 보여주는 장면이 많은데, 이 모든 장면이 이번 사랑(알렉) 은 클라이브 때와는 다를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일 것이다. 예를 들면, 클라이브는 웃을 때도 조용히 웃지만, 알렉은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막 호탕하게 웃어 재낀다.

  또 좀 웃겼던 장면은 크리켓 하는 장면인데, 알렉은 운동신경이 좋아서 공 오는 족족 다 받아치고, 뛰기도 엄청 잘 뛰어다니는데, 나중에 합류한 클라이브는 공도 엉거주춤하게 치고, 뜀박질도 알렉보다 훨씬 못한다. 크크크큭. 그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모리스를 보며 나도 혼자 흐믓했다.


III. 과거의 나와 닮은 사람

  캠브리지 시절, 클라이브는 모리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놓고는 다 잊어달라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여 모리스의 애간장을 태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모리스는 클라이브의 기숙사 창문으로 몰래 기어 올라가, 클라이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황급히 떠난다. 그 후, 모리스는 클라이브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약자가 된다. 언제나 클라이브를 기다리고, 클라이브가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하면, 가만히 있고, 클라이브가 아프면 지극정성으로 병간호해주고, 클라이브가 기분 안 좋은 것 같으면 눈치보고, 클라이브가 우리집에 놀러 오라고 하면 놀러가고.

  그런데 알렉은 거의 완벽하게 과거의 모리스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모리스를 사랑한다. 모리스가 잠 못 이루는 밤, 과거 자기가 그랬던 것 처럼 알렉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모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쓰고, 보트하우스에서 잠도 안자고 이틀 내내 모리스가 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모리스를 향해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고.

  가끔 연애를 하면서 완벽한 약자가 되면, 지금의 나처럼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엄청 많이 하게 되는데, 아마도 E.M 포스터도 그런 심정이지 않았을까. 모리스는 과거 E.M 포스터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캐릭터니까.


IV. 자연스러운 옛날 배우들의 몸

  요즘 나오는 영화를 보면, 남자 배우들이 다 하나같이 복근이 있고, 등근육이 있고, 팔뚝은 근육으로 굴곡져 있다. 미디어에서도 그런 근육질의 몸을 치켜세우며 칭찬한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그런 몸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백명 중 한명이나 될까? (나는 1년 내내 한 명도 못본 거 같기도)

  모리스가 권투를 하며 옷을 갈아입는 장면과 클라이브 저택에서 일기를 쓰는 장면에서의 뒷모습을 보면, 근육 하나 없이 마른 몸이다. 알렉 역시 당당한 체구지만, 요즘 영화에 나오는 심한 근육은 없다. 하도 부자연스럽게 가꾼 요즘 배우들의 몸만 봐서 그런지, 영화 '모리스' 의 남자 배우들의 몸이 훨씬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보기 편했다. 새롭기도 했고.


V. 대영제국의 위엄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빅토리아 시대가 끝난지 얼마 안되는 시기로서 아서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셜록'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셜록은 빅토리아 절정기가 배경이기 때문에 '셜록'이 조금 더 앞서긴 한다) '셜록'이 워낙 재밌어서 다 읽긴 읽었지만, 중간 중간 제 3 세계 사람들을 동물과 사람의 중간 정도 되는 미개한 존재로 묘사하는 게 기분이 나빠서, '대영제국' 이라는 말에 개인적으로 거부감이 있었다. 자기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기에 이렇게 영국 이외 나라를 무시한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모리스'에서 묘사된 당시 영국을 보니, 과거 영국이 세계 최고의 나라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1910년도의 영국은 한국과 같은 지구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어마어마한 세계였다.

  그 당시에 택시를 불러 타고, 주식거래를 하고, 전화를 하고, 아침에 전보를 치면, 오후에 전보를 받았다. 그런 생활상을 보는 것 역시 영화 '모리스' 의 큰 재미 중 하나다.


VI. 결론

  영화 '캐롤' 이나, '해피투게더', 그리고 이번 '모리스' 까지, 영화가 워낙 잘 만들어지면 그 영화의 내용이 동성애든 이성애든 감동적이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니까. 이 영화도 비록 동성애가 주제긴 하지만, 전혀 거부감 없이 아름다운 영화로서 감상할 수 있다. 의외로 IPTV에서 쉽게 볼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 아빠는 남자끼리 좋아하는 거 보기 거북하다고 시청을 포기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