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조금 있음)

  삼일절에 봤지만, 이제 쓴다. 왕가위 감독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극장에서 누구와 봤는지, 영화보고 뭘 했는지 까지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난 요즘 들어 점점 모든 영화를 혼자 보고 있다. 뭐 어차피 영화야 중3때 부터 혼자 보는 걸 제일 좋아했으니 상관 없지만, 너무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함께 말할 사람이 없는 건 좀 슬프다. 여기에 써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써놓지 않으면 흔적이 남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쓴다.

  삼일절에 혼자 인천 CGV 에 버스타고 가서 봤다. 개봉일이 한참 지나서 극장에서 못볼까봐 초조했는데 다행히 인천 CGV에 딱 좋은 시간대에 편성이 되어 있었다. 인천CGV 가 14관이나 되고, 예술 영화도 많이 해주는 편이라 좋다. 이 영화는 만약에 인천 CGV 에서 안하면 서울에서라도 보려고 했다. 근데 이제 쉬는 날 서울 가는 것도 귀찮고 싫다. 

  개봉일이 많이 지났지만, 상영관에 사람이 꽤 많았다. 혼자 온 사람도 많이 보였다. 드니 감독님 팬으로서 뿌듯했다. 이제까지 본 드니 빌뇌브 감독 영화가 워낙 강력해서 상대적으로 이 영화는 좀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체 왜 한국 개봉하면서 제목을 조디포스터가 주인공이었던 '콘택트'의 짝퉁 마냥 '컨택트' 로 했는지 끝내 불만스럽다. 원제인 'Arrival' 이 이 영화에 더 적절한 제목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해서 정말 아무것도 안하니까. 거창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뭘 때려 부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괴상한 우주선 안에서 시간에 맞춰 등장하여 루이스와 대화를 나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긴장감 넘치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아카데미에서 시각효과상을 받은 영화답게, 또 드니 빌뇌브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사운드도 좋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자신의 미래가 다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 참 동양적이라고 생각했다. 동양이 서양에 전복 당하고, 현재 전 세계가 서양을 중심으로 개편된 이유가, 서양의 '운명은 개척할 수 있다' 는 세계관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자'는 다소 소극적인 동양의 세계관보다 더 진취적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예전부터 가끔 했다. 역사 공부를 자세히 해본 적은 없어서 그냥 추측일 뿐이지만.

  그런데, 헐리우드 영화에서 이런 '운명결정론' 이 나오다니? 라며 굉장히 신선하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원작의 작가가 중국계 미국인 이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역시 이런 근본적 세계관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햅타포드어가 한자와 같이 표의어 인 점, 글자의 디자인도 약간 큰 먹물 붓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것 같이 생긴 점도, 동양적 느낌이 물씬 난다.

  나이가 들수록, 너의 인생은 너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주장이 참 공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타인에게 경박하고 대책없이 격려만 하면 안될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현재 주어진 이 생을 살아내는 일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다. 설령 그 끝에 실패와 불행이 있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