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 부터 어제까지 본 영화의 단평


1. 화양연화

  내 학창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왕가위' 감독이다. 다 커서 '중경삼림' 이나 '타락천사' 를 봤다면, 별 것도 아닌 이야기로 폼 잡는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본 두 영화는 '도시' 와 외로운 어른들의 사랑에 무한한 동경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영화에서 본 홍콩이 너무 좋은 나머지, 내 책상 밑에는 홍콩 전경을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아직 한 번도 못가봤네. 올해는 혼자라도 꼭 가볼 작정이다.

  위의 두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나는 의외로 왕가위 감독의 모든 영화를 보진 않았고, 심지어 이제서야 왕가위 감독 영화 중 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화양연화' 를 보았다. 워낙 전설처럼 떠받들어지는 영화기 때문에 걱정도 많았다. 내 경우, 사람들이 대단한 작품이다 하면 기대에 비해 별로 였던 적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또 난 더이상 예민하고 작은 것에도 큰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된 어린 애가 아니니까.

  영화를 보니, 내가 늙은만큼 왕가위 감독도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젊은 왕가위가 만들었던 영화에서의 상큼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감각적이고 무심한 듯 절절했다.

  난 솔직히 장만옥이 미녀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 장만옥은 치빠오가 정말 잘 어울리고 아름답다. 영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화면의 구도, 색감, 조명 등이 정말 멋져서 미술에 크게 감탄하며 보았다. 키스신 한번 안나오지만, 초모완(양조위)이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수리첸(장만옥)의 팔을 잡는 장면이나,  택시 안에서 둘이 손을 잡는 장면에서는 혼자 가슴이 쿵쿵뛰고 설레었다.

  듣던대로 좋아서 다행이었다.


2. 비포선라이즈

  이 영화도 이제서야 봤다. 이 영화 역시 전설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까지 이상하게 전혀 보고 싶은 맘이 안들었다. 올레티비에서 서비스 하고 있는 VOD 의 화질이 너무 구려서 (심지어 비율도 4:3 에 맞춰진) 보는 내내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재밌게 시청했다.

  예쁘고 잘생긴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는 마흔이 되고 쉰이 되도 즐겁게 시청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난 남자와 있을 때 아무런 대화가 없으면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편하고 도망가고 싶어지고 그런다. 그래서 조용한 상태에 둘만 있어도 평안함과 안정을 나에게 주는 남자가 있다면 영원히 사랑할 수 있으리라.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비포선라이즈에서 나오는 제시(에단호크)처럼 하루종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도 즐겁고 지루하지 않고 통하는 사람이겠지..하고 생각했다.

  지금은 중년을 훌쩍 넘긴 에단호크와 줄리델피가 정말 귀엽다. 특히 음악감상실에서 서로 키스하고 싶어서 눈치보는 장면이 맘에 들었다.

  보이후드를 봤을때도 느꼈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실제로도 정말 좋은 사람일 것 같다. 여자를 위할 줄 아는 사람임은 확실하다. 내가 본 그 의 모든 영화가 따뜻하고 밝은 느낌인데, 그 따뜻함이 억지로 보여주기 식으로 만든 따뜻함이 아니다.


3.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내 인생 영화 중 '매그놀리아' 는 무조건 한자리 낄 것이고, '부기나이트', '펀치드렁크러브' 두 개다 여운이 길었고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하지만, 정말 '마스터' 이 영화는 아니었다. 

  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걸까. 보는 내내 불쾌했고, 끝까지 보느라 힘들었다. 영화를 학문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영화가 엄청 훌륭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요 근래 본 영화 중 최악 세 손가락 안에 든다. 관객이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길 원해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마스터' 를 만든 것이라면, 완전히 성공한 영화. 당분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영화는 안보기로 했다. 또 이런 영화라면 실망이 너무 클 것 같아서 두렵기 때문에..


4. 라라랜드

  드디어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람들이 열광하는만큼 좋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세바스찬'이 피아노를 치며, 진심으로 사랑했던 '미아'와의 '만약' 을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찡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결국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믿는다. 다만 얼굴을 볼 수 없을 뿐. 그러니, 사랑에 빠지는 건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결국 나는 평생 그 사람을 사랑하게될테니. 하지만, 알다시피 그게 뭐 뜻대로 되진 않는다.

  감독이 나보다 더 어린데, 위플래쉬와 라라랜드 두 영화 모두,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 감독 각본도 직접 쓴다고 들었는데, 헐리우드에서 난 놈들 중에서도 정말 최고로 난 놈 중 하나 아닐까.

  라라랜드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세바스찬과 미아가 우주에서 춤추는 장면에서는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아마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을 것이다. 영화관에서 훌쩍 훌쩍 하는 소리가 꽤 들렸던 걸로 봐선 그 장면이 나한테만 감동적이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거하게 취해서 과거 혹은 현재의 연인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마법같은 영화지만, 역시나 나는 뮤지컬 취향이 아님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다미안 차젤레 감독, 어지간히도 재즈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위플래쉬에서도 이 영화에서도 시종일관 좋은 재즈 음악은 원없이 들을 수 있다. 이쯤되면 거의 재즈 전도사 수준.


5. 추신- 영화 '만추' 이야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영화 두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만추) 이 모두 김태용 감독 작품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 본 영화 가 '마스터' 를 제외하곤 다 멜로 영화인데, 내가 보고 싶은 멜로 영화는 '만추' 같은 여운을 줄 영화였다. 그런데, '화양연화', '비포선라이즈', '라라랜드' 세 개 다 '만추' 만큼 좋진 않았다. 영화 '만추' 는 내가 멜로영화에서 보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진 영화였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도 볼 때마다 훌륭해서 감탄해 마지않는 영화인데... 김태용 감독은 과연 탕웨이 언니가 선택할 만한 남자다. 조만간 한번 더 볼 작정이다. (이미 두 번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