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

일상 2016. 12. 7. 13:03

이 글은 어떤 평론가 때문에 충격 받아서 핸드폰 메모장에 써 놓았던 건데 논리도 없고 내가 봐도 비약도 너무 심하고 뒤죽박죽이라 이 블로그에 올려도 되나 하고 고민하다 그냥 옮겨 적는다.


어떤 평론가 때문에 며칠에 걸쳐 쓸데없는 의문점이 많이 생겼다.


1. 영화 "그녀" (정말 좋은 영화) 에서 테오도르가 실체도 없는 운영체제 사만다를 사랑하고 이별하며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을 보고, 두가지 생각을 했다.

  첫번째, 내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만 대화하고, 데이트 하고 싶을 때만 함께하는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라 할 수 있을까. 즉, 내가 감내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

  두번째. 얼굴을 모른다 해도 서로 오랜 시간 진솔한 대화를 했다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본 직후에는 첫번째 생각이 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번째 생각이 더 강해졌다. 소위 랜선 연애라 말하는 관계를 오래 유지하다 실물을 보고 서로 실망하여 허무하게 그동안의 사랑이 순식간에 끝나버릴 수도 있지만, 이건 평범한 연애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어느 순간 전혀 예상치도 않은 계기로 인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2. 뜬금없이 재능도 없는 영화 감상문을 짧게나마 쓴 이유는 두번째 생각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의 정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글 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글로는 뭐든 할 수 있다. 거짓말도 실감나게 할 수 있고, 매사 연연하지 않는 멋진 사람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장시간에 걸쳐 일관성 있고 치밀하게 글로 완벽하게 남을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믿는다.


3. 그렇기 때문에 난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서로 얼굴 한번 안봤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믿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서로 '글'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3. 어떤 미술평론가의 블로그를 종종 들어갔다. 그 사람의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지만, 몇 달 전 홍대 미대생이 만든 일베 손 조각상 파괴 사건에 대해 그가 쓴 글에 상당 부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평론가가 트위터에서 어떤 여성과 시비가 붙은 뒤 트위터에 쏟아낸 도저히 입에 담기도 싫은 여성 비하 욕설들을 본 뒤로, 나는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 그를 비난할 목적으로 트위터리안들이 그의 블로그에서 찾아낸 십수년전에 그가 예고 여학생을 보며 쓴 역겨운 글은 너무 지저분하고 구역질이 나서 차마 끝까지 읽지도 않았다.


4. 내 파이어폭스 블로그 폴더에 있는 블로그 주인들이 쓴 글을 보며 그들은 항상 (나보다는) 멋지다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미술평론가 때문에 내 믿음이 깨졌다. 그가 쓴 트위터글과 여고생에 대한 그 글 때문에. 내가 본 그의 평론은 그 사람의 아주 사소한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를 반면교사 삼아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블로그를 유지해온 나도, 어쩌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이며 안그런 척 하면서 멋져보이려고 하진 않았나.. 의도치 않게 남을 속인 적은 없는지 반성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이든 언제나 고귀할 수 없고 추하고 남에게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소망 하나씩은 갖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글로 쓴다고 해서 비난할 수 있을 것인지. 이렇듯 사람이란 꼭 추하고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것을 탐해야만 정상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인지. 이것이 정녕 인간의 한계일까.


5. 아무리 누구나 추한 면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가 쓴 글에 깃든 그의 사상은 역겨웠다. 그리고 그 평론가의 글을 사고로라도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진짜.


6. 나는 그냥 별볼일 없는 회사의 직장인 나부랭이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들보다 잘해온 건 일기 쓰기이고, 평생을 누군가가 쓴 '글' 이 실제보다 더 진실되다 믿어왔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가보다.


7. 그 평론가가 본인이 쓴 여고생에 대한 환상이 비난받을 생각이라면, 대한민국 남성 대부분이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본인을 변호했는데, 난 진짜 궁금하다. 대한민국 남성 대부분이 정말로, 날씬한 여고생의 다리를 보며 그 여고생의 팬티를 벗기고 그 안의 체모 혹은 생리대를 상상하며 성적 판타지를 채우는 것인지. (아 진짜 이 문장을 타이핑 하는 내 손이 썩는 것 같이 역겹다)


8. 퇴근하는 길에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다보면 인천에서 유명한 남고생 애들을 많이 본다. 간혹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남자 학생들을 보며 난 내 성적 판타지를 펼치지 않는다고.. 이건 내가 멋지게 보이려고 하는 거짓말이 아니다. 그 평론가는 자기를 두둔하며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을 본인과 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분류했다. 이것도 기분이 나쁘다. 남자들을 원래도 그리 좋아하지도 않지만, 제발 저 평론가의 대한민국 남자 대부분이 그렇다는 말은 거짓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9. 아 진짜, 끝끝내 욕이 나온다. 내가 왜 그딴 글을 읽어서 이렇게 퇴근 길 내내 더러운 기분이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