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을 준비하면서 전원경 작가의 책을 3권이나 읽었다. 아래 사진에서 밑에서 부터가 내가 읽은 순서이다.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는 전원경 작가와 그의 남편이 3년동안 영국에 살면서 직접 보고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견해와 특징을 적은 책인데, 서점에 있는 멋진 여행 사진에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은 여행 책들보다 훨씬 재밌다. 그렇고 그런 여행 에세이 책 보면서 느낀 것이, 다른 나라에 대하여 책까지 만들 정도가 되려면 본인이 여행 혹은 체류하면서 느낀 바만 적어서는 안된다는 거다. 남의 생각이나 느낌을 책으로 읽는 것이 생각보다 별로 재미가 없다. 그냥 이런 블로그의 글이라면 라면 모를까.. 여행 책에 대단한 정보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느낀 바 이외에 견해와 의견이 있어야 읽을 맛이 나는 것 같다.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는 여행기는 아니지만, 영국 여행 앞두고 읽은 여행 책 중에 제일 재밌었다.  몇시간 만에도 술술 읽힌다. 

   


  런던 미술관 산책은 읽으면서, 책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재밌고 유익했다. 런던 미술관에 걸린 그림 중 전원경 작가가 좋아하는 그림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그 그림을 볼 당시의 전원경 작가의 상황 등을 적은 책인데 주변인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그 다음 책인 런던 숨어 있는 보석을 찾아서 덕분에 난 런던 여행 중 코톨드 미술관을 찾아갔고, 세잔의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런던에서 남들은 잘 안가는 장소를 소개해주는데, 예술비평을 하는 작가인만큼 미술과 관련된 장소가 많다. 


  예술가의 거리는 유럽 내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장소를 찾아가며, 작가가 예술가들의 삶을 소개하는 여행책인데, 전문 사진작가가 함께한 여행이 아니라서 사진이 책에 올리기 좀 민망할 정도로 아쉬운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유럽 여행책보다는 훨씬 재밌다. 그 전 책들이 대부분 화가에 대한 이야기 였다면, 예술가의 거리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 이야기도 많다. 


  그 다음에 있는 목요일의 그림은 읽고 있는 중인데, 매주 목요일 중앙일보에 그림에 대하여 비평을 썼던 것을 모아놓은 책인 듯 하다. 정말 글을 잘 쓰신다. 잘 쓰신다는 게 어렵게 정보를 많이 주면서 잘 쓰는 게 아니라 그림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읽으면 재밌다고 느낄 수 있게끔 쓰신다. 한 절반정도 읽었는데 이 책 역시 줄어 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밌다. 책의 서문 중 


알프레드 롤 '농장 처녀 만다 라메티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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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그림에는 하나의 중요한 진실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매일의 노동을 대하는 만다의 담담한 태도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기를, 그것도 고된 노동을 반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언컨데 '반복되는 매일의 고단한 노동'을 즐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 대다수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운명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만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운명을 담담하게, 결코 시니컬하거나 패시미즘에 젖지 않은 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와닿는 이유는 바로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바래지 않은 만다의 건강함과 여전히 싱그러운 젊음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처녀 만다의 얼굴에서 나는 또 다른 여성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을 떠올린다. 평일 아침에 지하철을 타면 늘 맞닥뜨릴 수 있는, 일터로 향하는 수많은 직장 여성들 말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엇비슷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 나는 누구보다 지독한 올빼미형 인간이어서 늘 아침 출근에 허덕였었다) 그녀들이 아침미다 느끼는 고단함과 피로함을 잘안다. 조금이라도 더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을 애써 떨쳐내고 오늘의 '밥벌이'를 위해 그녀들은 화장을 하고, 옷을 걸쳐 입고,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바쁜 걸음으로 골목길을 걸어 내려가 직장으로 향하는 만원 지하철에 올라탔을 것이다. 그녀들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감추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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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을 그런 여성들, 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감당하면서'더 나은 날'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후배들을 위해 썼다. 그 '더 나은 날'이 단순히 주말이건 아니면 지금보다 발전한 미래에 대한 기대이건 간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 즉 '희망'은 많은 순간 현재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수단이 되어주곤 했다. 그것이 비록 헛된 희망이라 해도 좋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피로하고 무미 건조한 매일의 일상을 견뎌 나가겠는가. 


  이렇게, 지하철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침에 일터로 향하는 여자가 바로 나인데, 바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썼다고 적혀 있다. 

  책이 무척 예쁘다. 색도 그렇고, 그림의 인쇄 상태도 참 좋다. 글도 물론 좋고.

  

  맨 위에 있는 책인 '역사가 된 남자'는 절판이 되어 중고로 샀다. 이 책은 아래의 모든 책들보다 나온지 오래된 책으로, 전원경 작가가 영국으로 가기 전에 쓴 책이다. 프로이트, 처칠, 피카소 등 총 10명의 남자에 대한 일생과 전원경 작가의 견해를 적은 책인데, 아마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인가 보다. 평소 프로이트를 싫어했는데 이 책을 읽고 좀 좋아졌다. 그리고 융이 나치의 지지자 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그리고 칼 구스타프 융에게 홀딱 깼지..)


  전원경 작가의 글이 좋은 이유는 그녀가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두었지만, 여전히 젊었을 적 감수성을 잃지 않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어차피 난 결혼을 할지 안할지도 모르지만, 가끔 내가 결혼을 한 후에, 생활에 쪼달리며 사는 내 자신을 꾸밀 여유조차 없는 흔한 아줌마가 되어 지금 처럼 책을 읽어도 감명 받지 못하고, 좋은 음악을 찾았을 때 기쁘지도 않으며, 슬픈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플까 생각한다. 

  나의 기본 정서는 우울함에 가깝기 때문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하루 하루 살다보면 우울함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내가 남들보다 더 자주 슬퍼지고, 상처 받기 때문에 얻은 것도 꽤 많다고 생각한다.

  전원경 작가가 계속 감수성 예민한 글을 쓸 수 있는 건 좋은 예술 작품을 계속 접하고 있기 때문도 있을 것이고,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남편 분이 그런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참 부러운 분이다. 여러모로. 또 책을 내신다면 꼭 또 사서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