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일상 2014. 12. 8. 00:07

  겨울이 참 싫다. 하지만, 4계절 중 가장 나를 들뜨게 하는 계절도 겨울이라는 것도 부정할 순 없겠다. 우선 내가 겨울에 태어났고, 겨울에는 눈도 내리고, 또 애인이 있는 것도 로맨스도 겨울이 더 어울리고, 책도 잘 읽히고 겨울에는 일기도 잘써진다. 난 내가 겨울에 태어난 게 좋다.

  우리집은 엄마와 동생은 초여름에 태어났고, 나랑 아빠는 12월 생인데, 신기하게 취미나 성격이 아빠랑 내가 비슷하고 엄마랑 동생이 비슷하다.

 

1. 뽁뽁이

 

 

  저번주에 엄마와 함께 열심히 창문에 뽁뽁이를 붙였다. 요즘에는 저렇게 눈꽃 모양 들어간 뽁뽁이도 나와서 저 모양이 그냥 뽁뽁이보다 비싼데도 저걸로 구입했다. 내방은 365일 햇빛 한번 안드는 방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춥고 서늘한지 모른다. 그런데 뽁뽁이와 문풍지가 큰 효과가 있는 거 같다. 작년에 안 붙인 게 억울할 정도다.

 

2. 후회

  내가 다니는 영어학원이 그냥 영어학원보다 비싼편인데 거기에 여러 소셜 활동 같은게 포함되서 그런 것도 있다. 금요일 밤에 무슨 캡션 없이 영화 상영회도 하고 평일에는 에프터눈 티 같은 것도 마신댄다. 그리고 Pub night 라고 학원생들 모여서 맥주마시러 가기도 한다는데, 9개월을 다니면서 그런 행사에 한번도 참석을 안했다. 부끄러워서... 그러다가 학원이 12/18 날짜로 끝나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자는 심정으로 Pub night 를 갔다.

  그 행사 주관하는 영국인 영어 선생은 런던 출신이라는데, 별로였다. 좀 무시하는 기분 들고. 런던 출신은 다 그렇게 재수 없는건가? 싶었다. 나 런던 여행 갔을 때 느꼈던 사람들이랑 똑같았다. 영어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 말이다. 자기네들이 모국어 잘하고 외국인이 영국 모국어 못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쳇. 

  난 그 술자리에서 영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룰을 깨고 어떤 언니랑 신나게 한국말로 떠들었다. 그 언니가 독일에서 10년동안 살다가 한국와서 피아니스트 하는 언니라고 해서 너무 신기해서 그만 이성을 잃었던 것 이다.

  집에와서 누워서 이불을 뻥뻥 찼다. 맥주 두병 마시고 약간 취했던 거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너무 말을 안하고 앉아 있으니 혼자 민망해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왜 그렇게 혼자 떠들었을까 싶었다. 후회하며 잠들었다.

 

3. 선호

  내가 세상에서 좋아하는 게 더 많을까 싫어하는 게 더 많을까? 아마 좋아하는 게 더 많으니 자살하지 않고 살아 있는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난 아주 사소한 것에 있어서도 선호가 확실한가보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는 게 있어도 표현을 안하든가. 위에 말한 학원 행사에서 어떤 학원생이 나보고 싫어하는게 엄청 많다고 벌써 싫다는 말을 몇 번한거냐고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싫다고 말한 건 영화 About time, London (에딘버러보다다 싫었고, 영국 전체가 체코보다 비싸서 싫었다고 말했다), Radiohead 의 Kid A  앨범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이렇게 싫은게 많냐는거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난 싫어하는게 나오면 바로 너무 싫어. 말하는 거 같기도 하다... 는 생각을 했다. 이 비슷한 얘기를 동생한테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선호를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근데 상황에 따라서는 옆에 사람이 짜증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난 누군가가 1Q84 얘기를 하면,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 진짜 싫던데. 라고 바로 말해버리니 말이다. 재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가도, 그럼 어떤 대상에 대해 좋다 싫다 조차도 모르는 멍청이가 되란 말이야? 라는 생각에 나에게 싫은게 왜 그렇게 많냐고 물은 그 남자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어떤 선호를 갖는 데에도 정말 엄청나게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으로는 바로 싫다고 말하지 말고 이래서 싫다 저래서 싫다 이유 정도는 말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4. 러시아 해군들

 

 

 

  이 동네 살면서 별걸 다 본다 싶었다. 오늘 운동하러 자유공원 가는데 이마트 앞에서 해군 복장을 한 무리들이 줄담배를 피고 있는거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풍경인 것이야? 라는 생각에 난 일부러 그 무리 옆을 지나가며 옷을 살폈다. 팔 뚝에 러시아 국장과 러시아 글자가 찍혀 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무서워서 그만 쳐다봐야겠다 결심하고 자유공원으로 항했다. 그런데 동인천 일대에 여기 저기 저런 해군 무리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군인들이 입은 군복은 검정 모직코트에 금색 단추가 달려있었고, 바지까지 까매서 멋있어 보였다. 내가 오늘 본 군인 중 가장 계급 높아 보이는 아저씨가 최고 멋있었고 다른 애들은 백인 기준으로보자면 못났다고 볼 수 있는 얼굴들이었지만, 다들 기껏해야 한 23살 정도 밖에 안돼 보이고 하나같이 순진한 표정들이었다.

  오늘 이 러시아 해군들 때문에 귀여운 광경을 목격했다. 해군 무리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횡단보도 정지선에 정차되어 있는 차 안에서 5살쯤 된 남자애가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이러면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거다. 군인들 중 몇 명은 손을 흔들었고, 자기네들끼리 웃었다. 손을 열심히 흔들던 5살 남자애는 나중에는 "충성~!" 하며 경례까지 하는게 아닌가. 남자애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정작 동네 어른들은 다 곁눈질만 하고 가까이도 못가는데 5살 짜리는 신나서 인사하고 경례까지 하다니.

  자유공원에 올라가서 보니 군함으로 보이는 배가 2척 정도 보였다. 기사를 찾아보니, 4척 정도 왔다고 하고, 우리나라 해군이랑 뭐 협정 같은 걸 맺는다고 한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러시아 군인 봤다고 말했더니, 처음봤냐고 요 며칠 신포시장에도 한 대여섯명씩 몰려 다니고, 이마트에서 와서 먹을거 사가고 그런댄다. 그리고 여름에도 종종 이동네에서 러시아 해군들 볼 수 있댄다. 우리 엄마가 본 바로는 걔네들 여름 군복은 위 아래 다 흰색이고 이마트오는 애들은 하나같이 다 어리다고 한다.

  저 군인들 디게 심심해 보이든데, 우리 동네같이 후진 동네서 자기네들끼리 돌아다니며 대체 뭘 하는걸까?? 그냥 무작정 배회하고 있는 것 같던데.

 

4. 비관

  저번 주 시리어스 맨의 여파가 아직 이어지고 있는 거 같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거 같다. 그러니까 인생이 앞으로 더 좋아질 거 같지 않다. 나빠질 가능성이 훨씬 높은 거 같다. 다음 주에는 팀장이 면담을 한다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회사에서 나한테 시키는 일을 보면 한숨이 나고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편하게 잡일만 하면서 세월 보내면 속 편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난 이 회사에서 천년만년 있으려고 다니는 게 아닌데, 지금 하는 일을 봐서는 이직도 못할 거 같다. 이렇게 내가 쓸모없이 소모되고 있다는 게 한숨이 나서 우울한데, 팀장에게 말을 해봤자 좋은 소리도 못들을 것 같다. 답답하다.

 

5. 거짓말

  회사 사람 중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2년 넘게 나를 속여왔다는 사실에 이틀동안 좀 괴로웠다. 회사에 친한 친구 한명 없는게 날 너무 힘들게 하고 있다. 마음 터놓을 친구 말이다. 엊그제 학원 행사 때문에 광화문 갔을때 편의점에서 대충 저녁 먹는데 그 건물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여자 2명이 웃고 떠드는걸 보며 부러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나도 예전 회사에선 저런 친구 있었는데 싶어서 말이다.

  너무 충격적이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사람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난 왜 이렇게 전혀 눈치도 못채고 바보같이 속고만 있었단 말인가.

  나도 날 속인 그 직원처럼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니고 아무한테도 말안한 비밀 같은게 있으면 참 좋겠단 생각도 잠깐 했는데, 내 성격에 그건 불가능이다. 뭐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철두철미할 수 있다는 게 부러운 한편으로는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휴. 무서운 사람들이다. 애초에 나와 유전자 자체가 다른 것 같다. 이제 그 분을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제 지금 회사에는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