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나

일상 2014. 5. 18. 23:45

정상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객관적 증거와 이제까지의 경험 등에 의지하여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를 돌파해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문제는 아무 것도 필요 없이 그냥 직감에만 의지해야 한다. 특히 인간관계라면 더욱 그렇겠지. 사람이 100명이면 100가지의 성격과 사연이 있는 법이니...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때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모든 걸 결정내렸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가벼웠던 결단의 대가는 아주 컸고 아직까지도 종종 그 때문에 고통 받긴 하지만, 앞 뒤 생각 안하고 난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 하지 뭐. 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그 때가 참 그립다. 지금의 나는 일단 모든 걸 회피하고 보는 쪽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확실하지 않지만 26살 쯤 직장일 하고 1년 쯤 뒤 였던 것 같다. 발단이 된 사건이 있었고, 난 아직도 그 사건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이쯤되면 인생의 사건인데... 난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다 극복할 수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전혀.

32살 밖에 안된 주제에 인생의 비극 어쩌고 말하긴 우습지만,

인생의 비극은 악의적 의도도 선의적 의도도 없이 그냥 단순히 행했을 뿐인 어떤 행동이 갑자기 거대한 운명이 되어 일생을 괴롭히는 데 있는 것 같다.

난 그냥 멍청하고 애송이고 순진했을 뿐인데 말이다.

자유공원 내려오는 길에 대낮에 벌거벗고 춤을 춰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만큼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발견했다. 작고 낡은 벤치가 있는. 근 1년간 그 누구도 앉아본 적 없는 것이 틀림없는 그 벤치에 오늘 벌러덩 누워있었다. 남자들은 공원이나 벤치에 잘 눕지만, 난 아무래도 여자라 그런지 혼자 가면 그렇게 쉽게 누울 수가 없었다. 두다리 뻗고 누울 공간을 발견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밤에는 위험해서 못가겠지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진도 찍고 1년 내내 이런 날씨면 우울한 일은 하나도 생기지 않을 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주말동안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라는 책을 읽었다. 나에게는 조금 어려운 책이었다. 다시 읽어볼 작정이긴 하지만. (다시 읽는다고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진 않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서는 쪽지에 쓴 농담 때문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서는 치기어린 마음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남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고 가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대로만 기억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미화의 욕구가 강해져서 결국 자기가 원하는 내 모습만을 기억하게 되는데, 나역시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리라.

이번 주 내가 내린 결정이 또 한 5년 뒤에 다시 또 큰 운명이 되서 나를 괴롭히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쩔 때 나는 내 결정이 틀림없다고 확신을 하기위해 나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크게 비관한다. 모든 걸 회피하면 좋은 일도 전혀 안생기겠지만, 반면에 나쁜 일도 생길 가능성이 희박하니 말이다. 100% 직감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뜻밖의 행운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 이번 결정도 최고의 결정은 아니었어도, 중간은 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고 믿고 싶다. 어차피 존재하지 않을 행운 같은 데 내 남은 인생을 걸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점점 더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원래의 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속으로는 정말 너 한심하다. 겁쟁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외치고 있지만, 또 아주 틀에 박힌 변명을 해야겠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