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부터 토요일에 광화문으로 학원을 가기 때문에 난 서둘러서 챙겨서 나왔다. 이태원 가는 걸 고려해 옷을 조금 차려입고, 구두도 신은 상태였다. 학원에서 수업을 들은 뒤 원래는 이태원에서 회사 동료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별로 안 올거라던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오후에는 그치겠지 하는 생각에 서둘러 챙겨서 길을 나섰다.   

  꽤 여유 있게 나왔지만, 나는 첫날부터 30분이나 지각을 했다. 15명 남짓의 반이었는데 다들 엄청 부끄러워들 해서 영어로 말도 별로 못하고 그냥 나왔다. 때문에 불행히도 토요일에 학원을 가도 내 영어 실력은 별로 향상될 거 같지 않다. 하지만, 어차피 토요일 10시부터 1시 15분까지는 집에서 잠이나 자고 TV 나 보는 시간이니까, 나쁘지 않겠지.

  학원이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만나기로 한 분이 나오기 싫다는 뉘앙스의 톡을 보내왔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나는 원래 잡은 약속이 있으면 웬만해서는 정말 큰 일이 아닌 이상 약속을 취소하는 일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식으로 약속 당일에 미안한데 못나가겠다는 바람은 많이 맞는다. 가끔 피해의식 쩔게도 내가 타인에게 이렇게 만만하고 만나면 재미 없는 이미지인가 싶어서 실망하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될 일도 바람을 맞을 때마다 나는 항상 크게 낙담하곤 하는 것이다.  그 분이 나오기 싫은 이유는 날씨였다. 다른 큰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태원에 가자고 추진한 사람은 상대방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친한 친구 두명이 동시에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봤었다. 하지만 난 이 분과의 약속때문에 다 거절을 하고 이태원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오기 싫다는 사람 나오라고 하기도 자존심이 상해서 알겠다고 하고 투썸플레이스에 앉아서 베이글과 커피를 먹었다. 그리고선 원래 만나자고 했던 친구들에게 이제야 문자를 보내봤지만, 다들 이미 다른 약속을 잡은 상태. 거기 앉아서 나와 주말을 보내줄 사람을 물색하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내가 상대방이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약속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군.. 이라고 후회하며 망쳐버린 기분으로 나는 광화문 일대를 좀 걷다가 그냥 혼자 이태원으로 향했다. 

  어차피 비도 다 그친 후였고, 미세먼지가 몰려온다더니 비 덕분에 먼지도 별로 없는 상쾌한 날씨였다. 친구와 저번에 갔던 펍에 가서 혼자 산 미구엘과 팬케익을 먹었다. 혼자 앉아 있는 외국인은 꽤 됐지만, 혼자 앉아서 맥주마시는 한국인 여자는 나 혼자였다. 속이 안좋아서 괜찮은 맛의 팬케익을 많이 남기고 난 바깥을 좀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고, 정처없이 걷다가 용산 02 라고 써진 마을버스에 올랐다. 남영역으로 가서 1호선을 탈 작정이었다. 버스는 부지런히 용산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태원 뒤에는 이런 주택지구가 있구나 하면서 버스 바깥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내 친구들한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정말 가까운 친구들은 웬만해선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쏟아붓는 비에도 만나서 파주에 가거나, 이른 봄비를 맞으면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전시회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걔네들은 그래도 내 기억에 먼저 약속을 취소한 적은 없었지. 하는 생각에 고마웠다. 


   남영역에 도착했고 용산역에서 동인천행 급행을 기다리는데 도저히 이런 기분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카를 보고 있다는 친구에게 혹시 너 지금 나올 수 있으면 내가 니네 집앞으로 가겠다고 말을 했더니 나온다는 거다. 오.... 역시 너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나는 좀 기분이 풀려서 전철을 탔고 우리 둘은 부천역에서 조우했다. 짭짤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 치킨집으로 들어갔고 맥주도 한잔했다.

  난 이상하게 맥주든 다른 술을 마신 뒤에는 카페에 그렇게 가고 싶다. 2차로 스타벅스에 가서 나는 그린티푸라푸치노를 흡입했다. 먹고 싶을 때 먹으니 꿀맛이었다. 스타벅스에서 친구가 시골 내려가서 우울했던 시절 몸이 아팠던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배가 아플 정도로 웃기도 했다. 


  만약 이 친구가 시집을 가거나 외국으로 가버린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니 슬펐다. 그 친구에게 나도 그런 존재일거라 확신한다. 


  오늘은 어제의 피곤함을 풀자는 생각으로 아무 약속도 안잡고 교회에도 안갔다. 내가 신앙이 별로 없긴 하지만 지금 한 두달째 교회를 안가니 찔리고, 그런다. 벌 받는 건 아니겠지. 다음 주에도 결혼식 때문에 못가는데.. 그러다가 도저히 답답해서 공원이나 걷자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깜깜할 때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책도 하나 챙겨갔다. 만약 공원 산책을 다 마쳤는데도 바깥이 밝으면 어두워질때까지 카페 들어가서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길을 걸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요즘 아무래도 가을을 타는 것 같다. 살도 좀 빠지고 뭘 먹어도 맛이 없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그냥 내년 쯤에 아예 새로운 삶을 살거나,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위험한 생각인데 이상하게 난 혼자 걸으면 그런 염세적인 생각에 집착하게 된다. 


  산책을 마쳤는데도 어두워지지 않아서 카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서점에서 조금 읽다 관둔 빅픽처 가 있었다. 그 책을 읽는데, 주인공의 아내가 바람이 난 부분이 나오자, 화가 치밀었다. 주인공이 불쌍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럴 바에는 가져간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어야 됐는데...


  내일은 월요일! 잠을 많이 잤는데도 피곤하고 졸리다. 지겨운 하루가 또 시작이 되겠지.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가질 수가 없다.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까. 점점 성격만 이상해지는 것 같다.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축에 속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인 거 같다. 나쁜 짓 안하면서 살았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