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50원

일상 2012. 9. 17. 23:55

나의 출근길은 은혜로우신 인천시민이 책임지고 계시고(인천 만세~) 퇴근길은 보통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서로 퇴근 시간까지는 일치하지 않으니깐. 일하는 직원 중 1명 이상은 항상 김포공항에 있는 롯데몰에 가기 때문에 김포공항까지는 항상 편히 온다. 그나저나, 김포공항에 있는 롯데몰 진짜 최고로 좋다. 타임스퀘어보다 백배는 더 좋은 것 같다. 돈만 많으면 더 좋겠지. 난 아직까지 한번도 뭘 안사봤네.

그렇게 롯데몰과 연결된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선을 타고 계양역으로 와서, 계양역에서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예술회관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예술회관역에서 또 버스. 딱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경로. 뭐 아침저녁으로 하는게 아니고 저녁에만 1시간 30분 걸려서 그런지 별로 피곤하단 생각은 안든다. 이게 쌓이고 쌓이면 또 언젠가는 피곤하겠지.

공항철도는 따로 요금을 징수하기 때문에 계양역에서 갈아타면서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는다. 오늘도 역시 인천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공항철도와 연결된 계양역 개찰구를 나서는데 내 앞에 가던 남자의 버스카드의 잔액 (혹은 사용액)이 21,450원이 찍혔다. 그리고 나도 바로 내 티머니를 찍었는데 정확히 21,450원이 찍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로 내 앞에 가는 사람의 버스카드 잔액이 내 카드 잔액과 10원 단위까지 일치할 확률이 어느 정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마 거의 제로에 수렴하지 않을까.

이 세상은 정말 극미한 확률의 일이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서, 내가 지각도 못하는 사이에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나보다.

 

만약 위 상황이 소설이었다면, 그걸 인연으로 잘생기고 예쁜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상상했다. 소설에서는 별의별 상황으로 남녀가 만나니까. 현실은 뭐 그 남자 뒷통수만 보고 얼굴도 어떻게 생긴지 모르지. 하지만 오늘 내가 직접 겪은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긴 했어 단 몇초간의 상황이었지만.

근데 낯선 이성에게 호감의 말을 건내는 건 진짜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내가 말걸면 피하지 않을 거라는 약간의 자신감은 있어야 할 거 아냐. 난 절대로 못하지. 실제로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기도 하고.

뜬금없지만 내가 이렇게 혼자인 것의 장점 중 얼굴도 모를 무명의 멋진남을 설정해놓고 이렇게 만날까? 저렇게 만날까? 하고 맘대로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도 있다. (미쳐가나 봅니다. 이젠 상상은 그만 해도 되는데.) 남자친구 있을 때는 미지의 멋진남자를 상상하는 것도 약간 죄책감이 들었는데. 그런 죄책감도 안 느껴도 되고..... 근데 이게 정녕 장점인지 모르겠네. 뭐 그래도 난 아직까진 솔로의 장점과 커플의 장점이 50:50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커플이 무조건 좋아 보이진 않는단 말씀. 합리화가 아니라 진짜로.

 

2년만에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니, 사람들 관찰을 하게 된다. 확실히 버스보다는 좋든 싫든 사람을 많이 관찰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인천 지하철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잠도 잘 안온다. 익숙해지면 관찰할 겨를도 없이 잠들겠지.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오늘은 늘씬한 각선미의 약 40대 초반의 여자를 봤는데(출산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음) 몸매에 비해 머리스타일이 80년대 스타일이어서 좀 안타까웠고, 내 바로 옆에는 덩치 큰 스무살 정도 된 남자애는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니트를 입고 있어서 어색했다. 걔가 입은 니트가 좀 두껍긴 했지만, 오늘 확실히 약간 춥더군.  

 

새로운 생활이라는게 분명 큰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지루하다는 생각은 안든다. 그리고 오늘 인천 계양역의 21,450원 사건을 겪고보니 어렸을 때 부터 품고 있었던, 내 상황에선 얼토당토 않는 꿈이라고 생각해서, 남들 앞에서 포기한 척 했던 것들이 어쩌면 이 대단한 세상에서는 정말 별 거 아닌 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내 꿈의 실현 가능성이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을 수도 있다는 거지.

 

아 그리고, 주말에 아빠랑 회사로 가는 고속도로 운전연습을 드디어 했다. 아직 갈 길이 요원한 것 같다.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봤는데 독일은 면허따는데 몇백만원이 들고 면허 따기 전에 도로 연수만 약 2년에 걸쳐 한댄다. 나같은 사람은 독일가서 2년 동안 몇백만원 들여서 연수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영국같은 데로 어학연수 안가고 독일로 운전연수 가면 웃기겠는데? 근데 왠지 독일사람들은 운전연수도 완벽히 해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독일" 은 이름에서 주는 느낌도 어찌나 확실한지... 누가 지었는지 이름 한번 참 잘지었다.

여하튼 주말동안 아빠가 바로 옆에서 지금 지금!!! 아직 아직!!! 이런식으로 필요할 때마다 다급히 외쳐주셔서 간신히 운전을 하긴 했지만, 아직 정면 이외에 그 어느 곳도 보이지 않는다. 흑흑흑. 그냥 고속도로 한번 달려본 데 의의를 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