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귄 것도 아닌데.

일상 2012. 8. 15. 23:18


오늘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석양




올해 4월 초에 만나자마자 반한 남자 이야기를 썼다. 그 순간만큼은 그 남자는 정말 내 인생의 최고의 남자였다. 하지만 여러가지를 알게 된 후에는 최고의 남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되고,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민을 혼자 좀 했었다. 

고민을 하면서도 한 4개월간 가끔 만났다. 보통 소개를 받은 후 3번 이상 만나면 남자 쪽에서 사귀자 말자 이런 말이 있다는데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서 이건 뭔가 싶으면서도 나와 친구 하고 싶은건가. 그럼 만약에 사귀자고 하면 내가 사귈 용기는 있는건가. 이런 김칫국 실컷 마시는 남 부끄러운 고민을 하면서도 또 만나서 얘기하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 느낌도 들고 그랬다.

하지만 도무지 그 사람이 다니는 직장 상황 상 주말에 진득하게 보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도 쓰리고. 보고 싶은데 또 그런 말을 하지도 못하고. 내가 용기를 낸다고 해도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이렇게 그냥 혼자만 기다리다가 결국 아무 사건도 사고도 없이 몇 번 본 걸로 그 남자와의 관계는 끝이 났다.

이제까지 잠깐 잠깐 만난 남자들은 항상 서울에서 만나거나, 인천에서 만나도 번화가에서만 만났는데 그 남자는 우리집 앞에서 보거나 내가 진짜 자주가는 동인천이랑 자유공원을 같이 가서 그런지 자꾸 생각이 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동인천을 가고 오늘도 자유공원에서 석양을 보고 왔으니 생각이 안날 수가 있느냔 말이다.

끝난 관계에 여러가지 의문을 품고 결론을 내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나와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무엇인지 참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 남자도 날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느낌이 모두 다 허구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괘씸스런 마음도 든다. 대체 그러려면 나한테 나중에 어디 가보자. 뭐 해보자는 말은 왜 한건가 싶고. 크크크크. 근데 그런 말은 누구나 그냥 할 말 없으면 할 수 있는 말인데 내가 심하게 의미부여를 하는건가 싶어서 쪽팔리기도 하고 심각하게 나한테 피해망상 같은 게 있는건가 하는 생각도 좀 든다. 

난 사귀지도 않은 남자랑 영원히 안녕한 것에도 이렇게 혼자 괴로워하는데 내가 죽도록 좋아해서 사귀다가 헤어지면 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안된다. 

이런 걸 보면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또 지금도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 비해서는 얼마나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것인가 하는 생각에 경외감마저 들고, 올해도 그냥 난 혼자로 마무리 하겠구나 하는 나의 이 예감이 또 진짜가 되겠구나 싶다.

그런데 저번 토요일에 급히 나가고 싶지도 않은 소개팅에 어쩔 수 없이 나갔다가 전철 안에서 아이구 기구한 내 팔자야.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 나는 당분간은 차라리 혼자가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기로 했다. 뭐 당분간이 아니고 영원이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결국 이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2012년을 불과 4개월만 남겨놓은 9월이 되면 나는 가을을 탈 것 같다. 더울 땐 괴로웠는데 침대에 누워서 벌써 창문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면 어쩐지 좀 서운하다. 하루하루 난 늙어가고 생기를 잃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