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니야.

일상 2008. 10. 14. 17:21
회사에 들어오고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건, 이대로 내가 끝이 아닐까 하는 조바심 이었다.
물론 직장을 계속 다닌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이제 앞으로 돈 좀 벌다가 돈 모이면 결혼하고 애낳고 애 키우고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건 나에게 있어서 그냥 "끝"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대학 때 난 그냥 평범히 사는 게 소원이라고  말은 하고 다녔는데 우리나라에서 평범히 사는 건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 계속하기, 그래도 자식 때문에 못 관두기 이거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걸 직장에 오면서부터 깨닫게 되었다.
원래 집안에 돈이 많아서 돈을 안 벌어도 도서관이나 다니면서 공부하고 가끔 여행이나 가면서 우아하게 살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어제는 나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던, 하지만 내가 여기 취직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부장님 ( 다른 사람은 다 나 싫다고 하고 부장님만 유독 맘에 들어서 면접 통과) 이 건강을 이유로 이번달 까지만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충격이었다. 뭐 부장님이 나에게 크게 신경써주신 것도 없고, (뭐 야구 좋아하셔서 유일하게 야구얘기할 수 있는 분이긴 했지만) 오히려 부서 이동 떡밥을 나에게 던져주시사 날 결국 이 자리에 눌러 앉도록 만든 분이지만 그래도 충격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나라 망하네 어쩌네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시기에 일을 관두신다니! 부장님댁 재정수준도 우아하게 살 수 있는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에 열등감도 들었다.
또 나랑 그나마 최고 친하게 지내던 분도 이번 주 까지만 나오고 관두신다고... 회사에서 만드는 친구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겠냐만은 내가 회사에서 말하는 얘기를 알아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귀하니까. 아무리 친한 고등학교 친구여도 내가 회사에서 싫어하는 게 뭔지 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모르니까 말이다.
회의에 들어가서 친한 분도 관두고, 부장님도 관두고 이런 얘기를 들으니 좀 허해졌다.

부장님이 관두면서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게 몇 가지 있다면서 내 얘기도 하셨는데 "고맙게도 잘 버텨주고" 있는 미영이랜다. 오..."고맙게도 잘 버텨주고 있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뭐 좀 힘든 부서에서 일하고 있긴 한데, 이 자리가 고맙게도 잘 버텨줘야만 하는 자리인 것을 다시한번 깨닫고 나니 그냥 좀 초라해지는 느낌이랄까. 난 부장님 고마워하라고 버텨주고 있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버티고 있는건데. 쳇. 뭐 이래서 초라한 생각이 더 심하게 들었는지도 모르지.
이 때문에 용산에서 동인천 가는 직통을 타면 거의 무조건 자는데, 어제는 잠이 전혀 오질 않았다. 매일 눈을 감고 지나쳤던 바깥풍경을 보니 새삼 낯설고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내가 잘 버텨주고 있는 자리에서 난 하루하루 기록 갱신 중이다. 1년이상 한 사람도 처음이거니와 이제 조금만 하면 1년 6개월도 머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내세울 수 있는 건 오기다. 말이 오기지. 이건 오기보다는 "인욕" 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내할 인. 욕할 욕) 욕됨을 참아내는 힘이랄까. 말하자면 복잡하고 우울해서 더 하기 싫지만 매일 밤 잠들면서 "다 죽었어." 이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안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생각하기 싫어서 그때 봤던 책, 음악, 옷 등등을 모두 회피해서 살았건만 몇 개월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대단한 치욕에도 그냥 자면서 다 죽었어 하는 정도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지혜 같은 게 생겼다. (이런 거라도 없이 그 몇개월을 괴로워했다면 너무 억울한 일)  뭐, 속 없고 단순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 이건 정말 뜬금 없는데
저번에 안톤 체홉 어떤 소설 등장인물이-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중 그 어느 것도 과거에 추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과거에 추했기 때문에 현재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보다 훨씬 멋있는 말이었는데 요지는 저거였음. 책을 읽을 때 좋은 구절 있으면 표기해놓는 습관을 들이자. ㅠ)  갑자기 또 저 구절 생각하니 울컥하네. 아직 더 추해져야 하는건가.

전철에서도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잠도 잘 안와서 누워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앞으로 몇개월간은 내 자신을 토닥일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번뜩 떠올랐다.
이틀에 걸쳐 쓰는 일기라 얘기가 또 산으로 가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독하게 날 괴롭혔던 건 이렇게 돈 벌면서 인생 마무리 짓는건가 하는 생각, 다 끝이라는 생각 이었는데 어제 밤에 누워서 난 이렇게 끝이 아니라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나겠다고 (억지로라도) 계속 생각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벗어나려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이 있어야 하고, 지금 내가 버티는 이유는 다 그때를 위해서다, 어차피 돈 버는 건 똑같은데 왜 더 못한 자리가서 월급 깍이면서 어차피 하기 싫은 일 똑같이 하냐. 버티자.' 라고 생각하니  단 5분만에 급 기분이 좋아져버렸다.
그 때 내가 떠올린 미래의 나는 온난한 기후의 어딘가의 도심에서 음악듣고 룰루랄라 혼자 돌아다니는 건데 그냥 이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래엔 가족도 친구도 남자도 자식도 없는 것을 보니 아직은 혼자 하고 싶은게 더 많다는 생각도 들고.

아 쓰려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결론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직장인 곽미영 - 결혼한 곽미영" 이 사이에 다른 곽미영이 있도록 앞으로 당분간은 이 시궁창에서 더 버티고, 그 돈으로 뭔일이든 하나는 하겠다는 거다.

다른 얘기지만 대학 때 했던 모 테스트에서 난 "사고력" 이 거의 100점 만점에 100점에 육박하게 나왔는데 그 심리학 아저씨 말대로 난 행동보다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그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문제가 99%는 해결된다는 어리석은 믿음. 한마디로 재미없고 게으르고 소심한 타입인거지.
냉소적인 척 하지만, 다 상관없단 식으로 말하긴 하지만 결국에 난 항상 부지런히 머리 굴리면서 어떻게든 내가 버틸 건덕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그마저도 없으면 정말 난 살 이유가 없었을 듯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