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고모댁

일상 2012. 1. 17. 23:12
저번주 금요일 밤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워낙 먼 곳이다 보니 갈 기회가 없었는데 정말 큰 맘먹고왕복 KTX 타고 다녀왔다.  화요일 수요일 친구와 파주로 휴가를 다녀왔는데 오히려 몸이 안좋져서 가기 전에는 약간 미열도 나고 목은 말도 못하게 아팠다. 정말 무거운 몸이었는데 다녀오니까 그래도 할도리를 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하다. 
밤 12시에 부산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부산 고모댁으로 가는데 골목에 골목을 지나고, 오르막에 오르막을 올라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작고 추운 집으로 들어섰다.
어렸을 때 내동생이 태어나기 전 하나뿐인 귀한 외동딸이었을 때 아가씨였던 고모는 강원도 홍천까지 놀러와서 내 방에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그림도 크게 그려서 붙여주시고, 빨대와 리본을 이용하여 내 미닫이방에 커튼 까지 만들어서 붙여주셨었다. 그림도 잘그리고, 손재주도 좋아서 내가 디게 좋아했는데.. 오실때마다 풍선그림도 그려주고 꽃도 그려주고 하셔서 내 방 벽은 항상 알록달록 예뻤다. 대학 들어갈 때는 목걸이도 사주시고 가족들 만나는 자리에서도 날 그렇게 반가워하고 이뻐해주셨는데 그런 춥고 좁은 곳에서 살고 계신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평소 내가 너무 이모들만 좋아하고 너무 고모에게 신경을 못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었고, 나름 나에게 딸 때문에 느끼는 고민을 털어놓으실 때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기도 해서 앞으로 교회 가면 고모 기도도 하기로 했다. 
재작년 친구네 집 다녀와서 친구의 어머니와 친구의 우울한 얼굴이 생각나서 자려다 말고 일어나서 혼자 엉엉 울었는데, 이번에 고모댁 다녀온 뒤로도 계속 마음이 좋지 않다. 친하고 나에게 맘써 준 사람이 행복해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게 생각보다 잔잔하게 계속 괴롭다. 문득문득 그 슬픈 눈동자랑 추운 집이 생각이 나서 말이다. 
친구가 혹은 친척이 넉넉하게 못살고 있는 모습을 봐도 이런 마음인데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마음은 어떨까 싶었다. 아. 나는 정말 어떻게든 잘살고 싶다.  

맥주를 마시며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 서로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사이라 얘기도 유치하게 드라마 보면서 연예인 얘기가 주였다. 맥주랑 포도 먹으면서 친구에게 오른쪽 눈썹 부분에 난 여드름이 너무 아프다고 엄살을 좀 부렸더니 친구가 피부과에서 처방 받아서 주는 연고라고 발라줬는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 여드름이 완전 쏙 들어갔다. 이래서 피부에 돈을 들이는구나 싶었다.
기차를 장시간 타서 그런지 난 엄청 피곤했고, 친구네 집에서 손님왔다고 보일러를 아낌없이 가동시켜 주신 덕분에 등 따숩게 잘 잤다. 친구는 잘 못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TV 좀 보다가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씻었다. 그릇도 이쁜 것만 꺼내주시고, 반찬도 엄청 신경 쓰신 것 같아서 송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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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어디갈까 궁리를 하다가 친구가 가기로 한 곳은 산림박물관. 가만히 보면 친구도 특이하다. 많은 장소 중 왜 산림 박물관이었을까. 정읍에는 벚나무가 많은데 저기 위에 보이는 길은 내가 고등학교 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길로 버스타고 지나가다보면 별안간 외로워지고 내 신세가 처량해지고 그랬다. 내가 온 날 비바람이 많이 불어서 꽃이 많이 떨어졌지만, 사진으로 찍어놓으니 볼만한 걸.
순창에 있는 산림박물관으로 내장산을 삥삥 둘러 올라가는데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산림박물관에 도착했는데 무서울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도시에 있으면서 그 정도의 정적을 느낄 일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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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박물관을 좋아하는 것 같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아... 내가 참 아는 게 많았으면 이 박물관이 더 재밌었겠지 싶지만, 그때 뿐이다. 저 산림박물관도 우리나라에 있는 산과 산맥 그리고 식물 등에 대한 정보가 많아서 유익하고 재밌었다. 식물에 관한 내용을 보니까 중학교 때 배웠던 게 생각나면서 다시 중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아주 잠깐 했다. 기대 안하고 갔지만 산림 박물관에서 "한지" 제조 과정도 봤는데 오 완전 몰입해서 봤다. 백두대간과 다른 산맥을 표시한 대한민국 지도를 (엄청 크게 되어 있어서 알기 좋았음) 보면서 내가 참 무식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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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 오후 3시쯤 배고파서 간 중국집은 참 한가했다. 이런 시골에서 이렇게 큰 중국집 운영하면서 생계유지가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급스러운 중국집이었다. 짜장이랑 짬뽕안에 들어간 재료들도 매우 충실했다. 그런데 난 짜장면을 급히 먹다가 폭풍설사를 작렬했다. (아 드러 -_-) 어쨌든 먹을 때는 맛있었으니까. 양이 너무 많아서 남기긴 했지만.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기차역에서 기차를 한시간 정도 기다리면서 아픈 속을 두유로 달랬다. 맞는 시간대에 무궁화가 없어서 올 때는 무리해서 KTX 를 탔다. KTX  안에는 무궁화 열차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무지하게 무식하고 목소리 커서 귀고막이 터질 것 같은 아저씨 같은 사람은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1시간 이상 빠르고. 친구가 좀 가져가라고 해서 가져온 맥스봉을 먹으며 난 용산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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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고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에와서 씻고 그날 밤에 난 많이 울었다. 아무리 내 친구의 어머니지만 그냥 내 친구 어머니가 너무 가여웠다. 자세히 말하면 친구네 집 상황을 너무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집에 오니까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서 누워서 많이 울었다. 친구도 그렇고 친구 어머니도 그렇고 참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었다. 그 때 다른 친구가 잘 지내는 문자를 절묘하게 보내서 답장 보내다가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잠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부터는 몸살이 나서 조금 고생했다. 지금은 완쾌.


오랜만에 조금 여유가 있어서 그 때 얘기를 쓰고 싶어졌다.
그 날 아침 9시도 안되었는데 문자가 하나와서 보니까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금요일이었는데 난 정말 깜짝 놀라서 안절부절하다가 우선 KTX 표를 예매해서 토요일에 내려갔다.
이건 하루 이틀 느끼는 건 아니지만, 전라도로 가는 길은 경상도로 가는 길에 비해서 정말 척박하기 짝이 없는데 KTX 역시 전라도쪽은 복선이 아니라 시속이 채 300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읍까지 가는데도 2시간 10분이나 걸린다. (부산이 3시간인데 비한다면 엄청 오래걸리는 시간) 뭐 무궁화 타면 3시간 반에서 4시간 걸리니 1시간은 빠른거니까. 뭐 아무리 그래도 난 전라도 특유의 분위기 정말 좋아한다.

KTX는 듣던대로 과연 좌석과 좌석사이 자리가 좁았다. 잠을 좀 자다가 그 안에 있던 철도공사 잡지를 보다가 하니 정읍역에 도착을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고 20살 이후로는 절대 발도 들여놓지 않았던 곳인데 다시 가봐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고 시골모습 그대로였다.
택시를 타고 친구한테 갔는데 의외로 의연한 친구 모습에 놀랐다.

문제는 내가 25살 때 절교한 애가 한명 와 있었던 건데, 나는 사실 시간도 꽤 지나서 가서도 그냥 얘기할 일 있으면 얘기하고 잘 지냈냐고 물어볼 요량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걔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생각해보면 걔랑 나랑 절교하게 된 큰 계기도 어찌보면 내 탓이 더 큰데, 난 예전부터 그냥 그 애의 행동과 마음가짐이 너무 이해가 안되던 터라, 그냥 사과도 안하고 그대로 연락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예전부터 말을 하지만, 난 그냥 정말 친한 사람 몇만 내 곁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고, 안그러려고 노력해도 난 내가 싫어하고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여지없이 어떤 식으로든 그걸 티내는 사람이라 25살이 아니었면 26살에 아니면 27살에라도 걔랑 나랑은 절교를 했었을거다.
난 아무 생각없이 당연히 걔가 와 있긴 하겠지 하고 갔고, 고등학교 같이 졸업한 애들은 어차피 같은 테이블에 앉을테니까 마주보게 앉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냥 인사하고 그래야지. 하고 갔는데 세상에. 걔는 나한테 아직도 안좋은 감정이 남아 있는지 (크크 하긴 당연한건가) 아예 날 쳐다도 안보는게 느껴지는 거다.
원래는 셋이서 같이 고등학교 동창이라 셋이 잘 어울렸는데 그때 아버지 돌아가신 친구와 나는 아직도 사이가 좋고, 나랑 절교한 애랑도 내 친구는 사이가 좋고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서 만난 건데, 뭐 유치하게 저렇게 티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고등학교때 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셋이서 그럭저럭 잘 어울리던 모습이 아득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난 노골적으로 날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 버티고 앉아있을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한 2시간 앉아있다가 결국  쫓겨나듯 그 곳을 빠져 나왔다.

내 친구는 그 때 이후로 고향에서 안 올라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서 깨달은 진리는 기쁨은 나누면 2배 고통은 나누면 반 이라는 말은 다 뻥이라는 거다. 기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괴롭고 고통스러운 건 솔직히 말해서 당사자 아니면 그 누구도 같이 공감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커녕 아마 이해하지도 못할 거고, 만약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본인에게 돌아오는 불이익만을 생각하지 고통의 당사자에 대한 배려나 안쓰러움 등은 절대로 안중에 있을 수가 없다. 이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공감도 안되고 이해도 못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 어줍지 않은 위로라고 몇마디 해봤자 당사자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위로를 받는 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난 그냥 혼자 괴로우면 혼자 그 문제를 해결 하거나 해결이 안되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잊거나 그 둘 중 하나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진리라고 믿다보니 난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남들이 흔히들 하는 위로의 한마디를 잘 못하겠다.(오히려 안친하면 가식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친하기 때문에 더 안되는 거 같기도 하다) 그때 친구한테 가서도 별 말 못하고 그냥 왔다.

그런데 정말 친한 사람이라면 이런 건 진짜 필요한 것 같다.
나도 그런 적이 있지만, 사람이 너무 괴로우면 일시적으로 평소의 성격과는 많이 다른 모습과 표정 행동을 할 수 있다. 친한 사람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의 이상한 그런 행동과 말 표정 말이다. 가끔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서 깜짝 놀랄 때가 있는데... 그냥 그런 모습에 대해서 크게 반응하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나 역시 내가 이상해졌을 때 그냥 묵묵히 아직까지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최고 고마운 것 같다. 또 그냥 그 때 얘기에 대해서도 모르는 척 얘기 안하고 그러는 거 말이다.
내 나름의 이런 철학으로 그 친구한테 연락도 잘 안하고 이러고 있지만, 그 때 이후로는 그 친구를 생각할 때 마다 마음이 좋지가 않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나한테 계속 집에 가라고 무언의 어택을 가했던 절교한 애한테는 하나도 안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