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역 illy 2

일상 2010. 2. 7. 01:03
2010년이 되서 나랑 같이 여행을 갔던 대학 친구를 만났다.
친척언니 돌잔치가 부천역에 있다고 해서 강남에 사는 친구가 부천까지 왔는데 안만날 수 있을쏘냐.
대학교 때는 일주일에 한번씩 부평역에 갔던 거 같은데 이제 부평역 안간지는 한 1년 된 거 같고, 부평역보다 부천역을 더 자주 가게 된다. 나 다니던 대학이 인천에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학교 친구 중에는 부천 출신이 유난히 많았다. 이젠 부평보다 그냥 부천이 더 편하다. (뭐 제일 편한 곳은 그래도 인천 구월동이지만) 부평역은 지하상가 돌아다니려면 정신 사납고, 어딜 가야 할 지 잘모르겠고 그렇다.
언제부턴가 서울=일하는 곳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말에도 서울행 전철을 타면 좀 싫고 그렇다. 인천 부천이 좋다. 난.
밥을 먹고 싶다는 친구의 의견을 따라 춘천 닭갈비 집에 가서 닭갈비정식을 먹었는데 밥을 볶을 쯤에는 너무 배가 불렀다. 나이가 좀 드니까, 우리 소화기능이 쫌 떨어지는 거 같지 않냐고 친구와 이야기했다. 그 친구와 난 3학년 때 수업 들으면서 친해진 친군데, (동아리도 아니고 같은 과도 아무것도 아닌데 같이 앉아서 수업 듣다가 겁내 친해져서 지금도 진짜 친함) 고로 1학년 2학년때의 대학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러다가 대학교 학교 앞 식당에서 밥먹은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부모님께서 인천으로 올라오기 전이라 자취를 했던 나는 어떻게든 간식값을 줄이느라고 밥을 많이 먹었다. 웬만해선 여자들은 쪽팔려서 안한다는 밥 리필도 잘해먹었다.;; 친구도 역시 그랬다고. 그러다가 그때는 밥 2그릇 먹어도 더부룩하지 않았는데 이젠 더부룩하다고 좀 신세한탄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전에 글을 썼던 부천역 illy에 다시 갔다. 그런데 거기 분위기가 좀 이상해져 있었다. 다 교보문고에서 들고 온 책을 그 안에서 읽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는 엄청 떠들러 왔는데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좀 당황했다. 난그냥 스타벅스 가고 싶었는데 친구가 그닥 내켜하지 않아 거기로 갔건만, 그런 애매한 분위기일 줄이야.
그런데 내가 글을 썼던 (이 포스팅→부천역 illy) 이 글의 주인공인 남자가 아직도!!! 거기서 카운터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남자가 나한테 아는 척을 했다. 거의 1년만에 갔는데. 사실 위 글의 실제 주인공이 방명록에다가 글까지 쓰고, 댓글까지 달아서 혼자 헉 하고 다시는 거기를 안갔는데, 내 예상은 틀린 것이었다. 아직도 거기서 일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설마, 내가 저 글을 쓴 주인공인거 눈치 채고 아는 척을 한걸까? 설마 설마 설마 설마. 하면서, 난 처음 보는 척을 했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도 가능하면, 눈을 안 마주치려고 노력하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난 이제 부천역 illy에 다신 안갈테다.

부천역 illy

일상 2008. 10. 8. 15:21

나랑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의 집은 부천이다. 예전부터 첫째 오빠네 집에서 벗어나서 독립한다고 말은 하지만, 돈이 없어서 20살 이후로 계속 오빠네 집에서 살고 있는거다. 나는 뭐하러 돈 들이냐고 붙어 있을 수 있는만큼 붙어 있으라고 했다.
난 평일 퇴근 이후에 약속 잡는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우리집은 인천이고 직장은 충무로.  7시에 만난다고 가정할 때 저녁먹고 9시 반경 전철을 타고 집에 도착면 11시. 이렇게 도착해서 씻고 자면 그 다음날 아침에 피곤해서 욕나오고. 뭐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면야 이런 걸 다 감안해서라도 만나겠지만. 그냥 난 최소한의 사람만 내 옆에 있었음 좋겠단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 굳이 내 몸 피곤하면서까지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 이건 너무 이상주의적인 발상인데 진짜 친한 사람은 안만나도 계속 친한 상태 유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단 금요일 퇴근해서는 그냥 들어가기 서운하여 부천역에서 친구를 자주 만난다. 친구 만나서 하는 건 똑같다. 저녁먹기-커피 마시면서 얘기하기. 저녁 먹는 식당도 거의 한정되어 있고 커피 마시는 곳은 더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가 최고로 선호하는 카페는 부천역 교보문고 안에 위치한 illy.  일리는 원래 유명한 이탈리아 커피 전문 업체라는데 그래서 그런가 왠지 매장 안에 있는 의자랑 컵 같은 것도 디자인이 귀엽고, 서점 중간에 위치해서 그런지 스타벅스나 커피빈 같은 데에 비하면 엄청 조용하기도 하다. 가끔 주책맞게 웃는 나와 친구는 너무 조용해서 큰 소리로 잘 웃지 못할 때도 있지만, 너무 시끄러워 큰소리로 말하다 목 아픈 것 보다는 나으니까.

우리가 저녁을 먹고 커피 마시러 가는 금요일 밤 시간대에 illy에서 일하는 이름 모를 남자가 있는데 난 그 남자를 "일본 고교 야구 이미지" 라고 부른다. 꺼벙한 얼굴 표정, 야구모자, 흰 티, 청바지. 거깃다 얼굴에는 아직도 여드름이 간혹 나는데 고교 야구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려보이지도 않는 얼굴이다. 음... 포지션까지 생각한다면 일선발 투수는 아니고 이선발 투수인데 별로 승부욕이 없어서 일선발 따라갈 생각 안하고 이정도면 괜찮지 하고 만족하는 투수랄까. 크크크. 언더핸드나 쓰리쿼터 투수는 아니고 우완 정통파 투수. (소설을 써라 써) 여하튼 생긴게 일본 고교 야구 이미지 인 것 만은 확실하다. 전체적인 모습은 일단 어깨가 좀 넓고 키는 178 정도? 나이는 군대 갔다와서 휴학기간이 남아 있는 복학 앞 둔 나이 정도로 보인다.
이제 새로운 얘기할 것도 없는 우리 둘은 저 사람은 복학 앞두고 알바 하나보다 하고 단정을 지었는데 이거 이제 복학할 시기도 지난 것 같은데도 매주 금요일 밤에 거기서 알바를 하고 있는거다. 그래서 엇. 복학생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그런데 금요일 밤 아니고 다른 날 갔더니 약간 더 나이든 (야구모자 청바지는 똑같이 입었다) 남자가 일하고 있길래. 저건 그 일본 고교야구 이미지 청년의 막내 삼촌이고 막내 삼촌 가게에서 그냥 일해주는 조카인가보다. 하고 또 단정을 지었다.

어느 날 또 친구를 만나서 친구 운동화 사는 거 골라주고 또 어김없이 그 고교야구 청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야 우리 너무 자주 가서 민망하지 않냐." 이러면서도 딱히 갈 곳도 없고해서... (교보북클럽 회원이면 15%나 할인해주기도 하고) 아무 소리 없이 카페를 들어갔는데 그 날따라 유난히 그 야구 이미지 청년이 희색이 만연하여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 꺼벙한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걸 보니 백치미가 약 200% 정도 증가하여 나까지 좀 웃었다.
평소 때 그 청년은 어줍잖은 라떼아트를 곁들여서 내놓곤 하는데 난 밤에 커피 마시면 잠을 못자서 항상 핫초코고, 친구는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메리카노는 라떼아트가 불가능 하니 그 라떼아트로 장식된 컵은 항상 내 차지다. 나무 모양이거나 나뭇잎 모양이거나 하트 일때도 있는데, 그 날은 약간 찌그러진 하트 모양이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스푼을 들고 하트 한가운데를 죽~ 그은 다음 휘휘 저어서 마시는데 내 친구가 깜짝 놀라면서 (친구도 오빠 따라서 라떼 아트 같은 거 좀 배우고, 카페에서 일해본 경험 있음)
"야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내가 이제까지 커피 받자마자 라떼아트 다 망가뜨리고 먹는 여자는 처음 본다."
-난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 중에 그런건데?
"야 너는 욕구 불만이야. 욕구불만"
-무슨 욕구불만이야~~
"대부분은 이런거 만들어서 주면 이쁘거나 망가지는게 아까워서 조심조심 하면서 마셔.특히 여자는 더 그러고."
-헉 그러냐?

이런 대화를 하다가 왠지 라떼아트 해줬는데 다 망가뜨린 게 혼자 미안해지기도 하고 백치미 충만한 고교야구 이미지 청년에 대해 궁금해지기도 하고 장난치면 성의있게 속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성격 같아 보여서 난 한번 장난을 쳐 보기로 했다. 사실 두달 넘게 illy 안갔을 때 "야 갑자기 그 illy 에서 일하던 애 아직도 일하는 지 궁금하다... " 이런 얘기를 했을만큼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pilot의 super grip 볼펜을 꺼내서 illy 냅킨에다가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적었다. 내 치밀한 계획에 의하면 현재 이 카페 안에 일하는 사람은 쟤 밖에 없고, 내가 여기에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적어서 올려놓으면 분명 쟤가 치울텐데 그러면 이 메모를 보겠지? 그러면 지도 관심 있음 전화할거 아냐. 이런 계산이었다. 전화오면 뭐 어떻게 할건데? 이 생각은 미처 안하고.
그래서 난 illy 냅킨에 내 이름하고 전화번호를 적고 보이게 하면 민망하니까 전화번호 적은 부분은 컵으로 가린 후 집에 귀가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2주가 지났고 난 이 일을 다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을 먹는데 모르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요즘에는 대출 받으란 전화도 핸드폰 번호로 오고 바로 끊기기 때문에 안받고 있었는데 계속 울리는 게 아닌가? 엇 누구전화지? 하고 받았는데 왠걸?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