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내내 읽은 책들 중에서 최고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들이었다. 다른 블로거들 처럼 정성스러운 서평은 1년에 한 번도 잘 못쓰는 나이지만, 로알드 달에 대해서는 진짜로 뭐라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소설이 다들 너무 너무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 재밌는 소설의 세계로 빠졌으면 하기 때문에. 아침에 로알드 달 소설 읽다가 두번씩이나 내려야할 서울역을 지나 시청역까지 갔었다.
저번 봄 휴가 때 나들이 나간 영풍문고 세일코너에 로알드 달의 "세계챔피언"과 "맛"이 있었는데 내 절친 민양이 이사람 책 진짜 진짜 재밌다고 둘다 너무 재밌다고 두권 다 사라고 적극 추천을 했더랬다. 그래도 한권만 골라줘봐 했더니 "맛" 을 골라줬었다. 결국엔 나중에 "세계챔피언"도 사고 "개조심"도 사고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 "당신을 닮은 사람" 도 사버렸다. 기상천외한 헨리슈거 이야기와 당신을 닮은 사람은 아직 못 읽었다.(근데 당신을 닮은 사람은 앞 서 읽은 소설이 많이 중복되더라) 난 안톤 체호프 같이 간결하고 위트있고 뒤가 너무 궁금해서 빨리 이 페이지를 넘기고 싶어서 안달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이런 책 안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 안톤 체호프 책 이후 이렇게 재밌는 단편 소설집은 정말 처음이다.
Roald Dahl (1916.10.03 ~ 1990.11.23)
'에드가 앨런 포' 상을 두 차례.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사람. 1916년 사우스웨일스에서 태어나 영국의 랩턴 스쿨을 다녔다. 부모는 노르웨이 이민자들이었다. 재기와 상상력으로 충만한 꺽다리 소년이 억압적인 학교교육과 충돌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나가는 성장기 이야기는 그의 자전소설 [보이] 에 잘 그려져 있다. 랩턴 스쿨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그가 선택한 진로는 석유회사 쉘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공군에 지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1942년 워싱턴 영국 대사관의 공군 무관으로 부임한 뒤, 정보국으로 옮겨 공군 중령으로 종전을 맞았다. 그의 작가적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전장의 경험을 담은 단편소설들을 미국의 유력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했고 기발한 이야기 솜씨는 단번에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첫 단편집 [개조심 (원제: Over to you)] 이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어 두번째 단편집 [당신을 닮은 사람] 이 나왔고 이 책으로 '에드거 앨런 포'상과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수상했다. [찰리와 초코릿 공장],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등 전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도박과 내기에 대한 집착, 속고 속이는 의뭉한 술수 등 인간사의 미묘한 국면을 차근차근 밀도 높은 이야기로 조여붙이는 그의 솜씨는 마침내 절묘한 유머와 반전을 선사한다. 2000년 '세계 책의 날' 전세계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혔다.
내동생 책상 위에서 로알드 달의 책. 흠 뜬금없는 말이지만 내동생 책상밑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스터가 깔려있다.
1. 맛 (원제 : Taste)
- 목사의 기쁨 (Parson's Pleasure)
- 손님 (The Visitor)
- 맛 (Taste)
- 항해거리 (Dip in th Pool)
- 빅스비 부인과 대령의 외투 (Mrs Bixby and the Colonel's coat)
- 남쪽 남자 (Man from the South)
- 정복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queror)
- 하늘로 가는 길 (The Way up to Heaven)
- 피부 (Skin)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Lamb to the Slaughter)
- 목사의 기쁨 : 목사로 꾸미고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시골집에 숨겨져 있는 오래되고 비싼 가구를 찾아 헐값에 사고 비싼 값에 파는 보기스에 대한 이야기. 이 소설을 읽고 "오 신선한데?" 라는 생각에 다음 소설에도 기대하기 시작했다. 끝 마무리가 아주 산뜻하다! -회색박스 안은 소설 줄거리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발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전문가라면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만한 가구였다. 문외한은 별 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더러운 흰 페인트로 덮여 있을 때는. 하지만 보기스 씨에게 이것은 고가구상의 꿈이었다. 보기스 씨는 유럽과 미국의 다른 모든 고가구상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18세기 영국 가구 가운데 누구나 선망하는 가장 유명한 물건은 '치펀데일 장' 이라고 알려진 가구 세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태연하게 치펀데일 장 옆을 지나가면서 경멸감을 드러내듯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다. "몇 파운드는 나가겠군요. 안됐지만 그 이상은 안되겠어요. 안타깝게도 좀 조악한 복제품인 것 같네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만. 여기서 흰색으로 칠한 건가요?"
- 남쪽 남자 : 호텔에서 벌어지는 미국인 남자와 남쪽에서 온 중년 남자간의 내기. 로알드 달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기'에 대한 얘기로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설인 듯 하다.
"자 불은 여기 있습니다. " 미국인 청년이 라이터를 치켜들었다. "바람 때문에 소용없을 거요." "천만에요. 잘 켜질겁니다. 언제든지 잘 켜지거든요." 작은 남자는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입에서 떼어내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청년을 바라보았다. "언제든지?" 남자가 천천히 되물었다. "그럼요. 한 번도 안 켜진 적이 없거든요. 적어도 제가 켰을 때는요." (...중략...) "그럼 작은 내기를 한번 해볼까?" 남자는 청년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중략...) "미친 짓이라니. 젊은이가 라이터를 열 번만 켜면 캐딜락은 그쪽 게 되는데. 캐딜락이 갖고 싶지 않소?" "갖고 싶죠. 캐딜락이야 물론 갖고 싶습니다." 청년은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래. 그럼 좋아. 우리는 내기를 하는 거고. 나는 캐딜락을 걸겠소." "그럼 나는 뭘 겁니까?" 작은 남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시가에서 빨간 띠를 조심조심 떼어냈다. (...중략...) "없어도 그만인 작은 걸 하나 거시오. 혹시나 잃게 되더라도 기분이 크게 상하지는 않을 만한 거. 알겠소?" "예를 들어 어떤 거죠?" "예를 들어. 어디 보자. 젊은이 왼손의 새끼손가락 같은 거."
2. 세계 챔피언 (원제 : The Champion of the World)
- 클로드의 개 (Claud's Dog)
세계 챔피언 (The Champion of the World) 피지 씨 (Mr. Feasey) 쥐잡이 사내 (The Rat Catcher) 러민스 (Rummins) 호디 씨 (Mr. Hoddy)
- 탄생과 재앙 (Genesis and Catastrophe)
- 조지 포지 (Georgy Porgy)
- 로열 젤리 (Royal Jelly)
- 달리는 폭슬리 (Galloping Foxley)
- 소리 잡는 기계 ( The Sound Machine)
- 윌리엄과 메리 (Willian and Mary)
- 세계 챔피언 : 세계 최고의 꿩 밀렵꾼이 되기 위한 클로드와 고든의 눈물겨운 노력. 내가 좋아하는 덤엔더머 삘 소설이라 좋다!
"건포도를 잊은 모양인데. 자 들어봐. 우선 건포도를 구해야 돼. 건포도를 물에 담가서 불려. 그런 다음 면도칼로 한쪽에 조그만 흠집을 내고 속을 약간 파놓는 거야. 그리고 빨간 수면제 캡슐을 열고, 가루를 그 속에 쏟아 넣어. 그리고 나서 바늘하고 실로 아주 꼼꼼하게 그 구멍을 꿰매면?" (...중략...) "게다가, 이 방법을 쓰면 정말 크게 한탕 할 수 있어. 원한다면 건포도 스무 알도 준비할 수가 있다구. 우린 그저 해질녘에 사육장 주변에 건포도를 뿌려놓고 가면 돼. 반시간 후쯤 우리가 돌아와보면 약효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해서 나무 위에서 잠든 꿩들은 갑자기 어지럼증 때문에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고 하겠지. 건포도를 한 알이라도 먹은 꿩은 곧 졸도해서 땅에 떨어질 거야. 이봐. 꿩들이 나무에서 사과처럼 떨어질 거라고!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가서 줍기만 하면 되는거야!" 클로드는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세상에." 그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 달리는 폭슬리 : 고등학교 때 지독히도 자신을 괴롭히던 폭슬리를 어른이 되어서야 출근길 전차 안에서 만나게 된 윌리엄에 대한 이야기.
"이번엔 어떻게 할래? 가운 입고 여섯 대, 아니면 벗고 네 대?" 나는 이 질문에 감히 한 번도 대답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잔뜩 겁에 질린 채 더러운 마룻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이 키 큰 소년은 곧 가늘고 긴 흰 막대기로 천천히, 과학적으로, 능숙하게, 합법적으로, 거기에다가 재미까지 느껴가면서 나를 내리칠 것이고, 내 몸에서는 피가 나게 될 거라는 생각 뿐이다. (...중략...) 아. 그 끔찍했던 날들. 폭슬리의 토스트를 태우면 '매로 다스릴 죄' 였다. 폭슬리의 축구화에 묻은 진흙을 털지 않아도 그랬다. 폭슬리의 우산을 다른 방향으로 잘 못 말아도 그랬다. (...중략...) 사실 폭슬리에게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매로 다스려야 할 죄였다. 언뜻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벌써 거의 다 도착했네.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는지 [더 타임스]는 펼치지도 않고 있었다. 폭슬리는 내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아 아직도 [데일리 메일]을 읽고 있었다.
3. 개조심 (원제 : Beware of the Dog)
- 어느 늙디늙은 남자의 죽음 (Death of an Old Old Man)
- 아프리카 이야기 (An African Story)
- 마담 로제트 (Madame Rosette)
- 카티나 (Katina)
- 어제는 아름다웠네 (Yesterday was Beautiful)
- 그들은 늙지 않으리 (They shall not grow Old)
- 개조심 (Beware of the Dog)
- 오직 이뿐 (Only This)
- 당신 같은 사람 (Someone like You)
: 실제로 조종사로 제2차대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으로 어떤 소설이 더 좋았다고 뽑을 수 없을만큼 모든 소설이 다 폼나고 멋있었다. 전쟁에 대한 환멸, 조종사로서 전투에 나서는 자의 두려움 등이 꼭 전쟁영화보는 것 처럼 생생하다. (역시 난 연애 소설 체질은 아닌 것 같다.)
- 어느 늙디늙은 남자의 죽음 : 어느 독일군 조종사와 어느 영국인 조종사간의 전투. 그리고 그 끝.
그는 더 이상 발버둥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버둥거리지 않으니 얼마나 상쾌한가, 그는 생각했다. 발버둥쳐봤자 아무 소용 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열심히 발버둥치다니 나도 참 아둔한 놈이지.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끼었는데 햇빛을 달라고 기도하다니 진짜 미련해. 진작부터 비를 달라고 기도했어야지. 진작부터 비를 달라고 소리쳤어야 해. 비를 뿌리세요. 좍좍 뿌리세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소리쳤어야해. 그러면 쉬웠을텐데. 그러면 한결 쉬웠을 텐데. 난 오 년 동안 발버둥쳤지.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 이게 한결 나아. 이게 훨씬 나아. 저기 어딘가 내가 걷고 싶은 숲이 있는데 그 숲을 발버둥치면서 걸을 수는 없잖아. 저기 어딘가 내가 함께 자고 싶은 아가씨가 있는데 그 아가씨와 발버둥치면서 잘 수는 없잖아. 그 어떤 것도 발버둥치면서 할 수는 없어. 무엇보다도 삶을 발버둥치면서 살 수는 없지.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몽땅 할거야. 더이상 발버둥 치는 일은 없을거야.
- 마담 로제트 : 이탈리아군과 싸우기위해 리비아에 주둔하던 영국 조종사 스터피와 수사슴이 주인공. 악덕 포주인 마담 로제트로부터 아가씨들을 구출하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에 키 큰 흑발 아가씨가 수사슴 팔짱끼는 장면이 백미!
"괜찮은 여자더군." "물론 괜찮은 여자죠. 있잖아요. 수사슴?" "왜?" "오늘밤에 그 여자와 데이트하고 싶어요." 두 사람은 거리를 가로질러 조금 더 걸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그래? 로제트에게 전화를 걸어봐." "뜬금없이 로제트가 누구예요?" "마담 로제트. 굉장한 여자지." (...중략...) "세상에, 정말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겠군요. 마담이 진짜로 아가씨들을 모질게 부려먹나요?" "일전에 제33비행중대에게 들었는데 아가씨들을 거의 공짜로 부려먹는다더군. 하룻밤에 이십 아케르 정도만 준다나. 그러면서 고객들이게는 일인당 백에서 이백 아케르를 받아내지. 매일 아가씨 한 명당 오백에서 천 아케르를 마담에게 벌어주는 셈이야." (...중략...) 그들은 복도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악쓰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여자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며, 이에 맞춰 계속 악쓰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건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말을 할 줄 아는 분노한 황소의 소리였다. 수사슴이 말했다. "이제 서두르게. 아가씨들을 구해야지. 그리고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행동해야 해. 아주 진지하게."
- 카티나 : 나 솔직히 이 소설 읽고 출근길에 울었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그리스 소녀 카티나를 영국 공군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이다. 소설 맨 앞에 ' 제1차 그리스 작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한 짧은 글' 이라고 적혀있다. 저번 독일 월드컵 때 영국 축구팬들이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본토를 폭격한 독일을 조롱하는 문구의 티셔츠를 입어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봤는데, 독일이 유럽에선 아시아의 일본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유럽에선 전쟁의 주범이 독일. 아시아에선 일본.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추측일 뿐이다)
소녀를 제일 먼저 본 사람은 피터였다. 소녀는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아주 가만히, 돌 위에 앉아 있었다. 소녀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온 사방에서는, 작은 거리 곳곳에서는 사람들이 물동이를 들고 앞 뒤로 뛰어다니며 불타는 가옥들의 창문에 끼얹고 있었다. 길 건너편 자갈밭에는 소년의 시체가 있었다. 사람들 발에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누군가 길섶으로 치워둔 모양이었다. 좀더 아래쪽에서는 한 노인이 돌 파편 더미를 파헤치고 있었다. 노인은 돌덩이를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여 옆쪽에 치웠다. 때때로 그는 허리를 굽히고 잔해 속을 들여다보며 어떤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불렀다. 사방은 온통 고함소리와 허둥대는 발걸음과 불길과 물동이와 먼지투성이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돌 위에 조용히 앉아 꼼짝 않고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 왼쪽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는 턱을 타고 꾀죄죄한 날염 원피스 위에 뚝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