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 E. M. 포스터 전집
국내도서
저자 : 에드워드 포스터(E. M. Forster) / 고정아역
출판 : 열린책들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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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독후감을 쓰는 게 영화 감상문을 쓰는 것 보다 백배는 어렵게 느껴진다. 영화야 배우나 음악 화면 색감 구도 이야기 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라 느낀 바에 대해 쓰기 쉬운데, 책은 그게 절대 아니니까. 그래서 이제까지 책을 읽어도 독후감 같은 거 안쓰고 그냥 읽고 끝났는데,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이 '재밌다.' '재미없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더라. 북한은 책이 부족해서 도서관에서도 독후감을 써서 내지 않으면 다음 책을 안 빌려준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그거 참 서로에게 좋은 방안인 거 같다. (진짠지 아닌지 확실치 않음.) 그런 의미에서 나도 미숙하게나마 독후감을 쓰기로 결심했다. 수준 낮은 독후감이라도.


  6월 우울증 위기 이후로 어린 시절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원초적 기쁨을 다시 되찾았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한동안은 책보다도 신문이나 잡지 혹은 비문학 책을 훨씬 많이 봤다. 그런데, E.M 포스터의 '모리스' 를 읽으며, '그래... 소설을 읽는 건 이런 느낌이었지.....' 싶었다. 내 마음을 녹여주는 그런 따뜻한 느낌 말이다. 일생에 걸쳐 나를 치유해줬던 문학을 너무 오랜기간 잊고 살았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뒤로 훨씬 건강한 정신으로 살고 있다. 가끔 6월 위기 같은 상태가 될 때도 있지만, 그때처럼 오래가진 않는다.


  나에게 문학의 기쁨을 상기시켜 준 작가 E.M 포스터 의 가장 유명한 소설 '전망 좋은 방'을 읽었다. 

  독후감 쓰면서 줄거리 쓸 필요 없는데 어쩌다보니 다 썼고 지우긴 아까워서 그냥 여기 남겨놓는다.



  나는 출퇴근길과 집에서 자못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속으로는 아이돌팬의 심정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조지가 너무 멋있어서 비명을 꺅꺅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폭풍의 언덕' 이 지나치게 우울한 사랑 이야기라, 좀 경쾌하고 귀여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망좋은 방' 은 이러한 목적에 완벽히 부합하는 책이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많이 하는 이야기 중 남자는 처음에 별로 호감이 안가도 만나다보면 좋아진다. 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호감이 없었던 남자가 만나면서 좋아진 경우가 없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할때마다 다른 여자들은 다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라고 말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항상 넌 노력도 안해보고 그런다고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을 열과 성을 다해 좋아하기로 마음을 먹는 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나는 아무리 좋아도 내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 이런 거 안 믿는 낭만 없는 사람...) 그것도 어느 정도 나와 맞고, 끌리는 사람에게나 가능한거지, 같이 문자 몇 번 주고 받는 것 조차 괴로움의 연속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오히려 처음에는 싫었는데 계속 만나면 상대방이 좋아진다는 사람들이 더더욱 신기하다.


  어떻게든 세실과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애처로운 루시를 보며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아는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거깃다 앞뒤 꽉 막히고 루시의 앞날을 방해만 하는 샬럿 때문에 더 답답했다. 조지같이 인생의 빛과 소금되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로마로 떠나버리다니! 떠나는 밤에 조지가 문 앞에서 비를 철철맞고 있는데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루시를 보며 내 가슴 또한 찢어졌다. 이외에 조지와 루시가 피묻은 엽서를 강에 떠내려 보내는 다리 위 데이트 장면도 무척 다정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내내 좋았다. 유명한 키스 장면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다.


  루시와 조지의 사랑이 가장 큰 뼈대긴 하지만 루시가 피렌체에서 여행을 하며 영국에서 전혀 못 만나던 종류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인간적으로 성숙해나가고,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 또한 '전망 좋은 방'의 큰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는 당시 남자 소설가가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이야기 치고는 굉장히 선진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E.M 포스터가 당시 미덕에 부합하지 않는 동성애자 였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도 열린 견해를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역시 소설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E.M 포스터는 좋다. 


  기회가 되면 영화도 찾아서 보려고 한다. 이미 제비 꽃밭 키스신은 찾아서 봤지만, 영화 속 장면이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예뻐서 보고 싶어졌다. 근데 의외로 영화에서는 세실이 꽤 멋있나보다. 감상한 사람 중 조지보다 세실이 낫다는 사람도 다수 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책만 봐선 절대 세실을 더 좋아할 수가 없는데. 하긴 책에서도 거만한 세실이 꼴보기 싫다가, 루시가 파혼 통보하니 군말없이 신사적으로 물러나서 좀 불쌍하긴 했다.


  이 소설 맨 앞장에 'H.O.M 에게 이 소설을 바칩니다.' 라고 적혀 있는데, 이 H.O.M  은 바로 소설 '모리스'에서 클라이브의 모델이었던 휴 메러디스 다. '전망좋은 방' 출간 년도를 보니 이미 휴 메러디스가 결혼한 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 메러디스에게 이 소설을 바치다니.. 순정파 E.M 포스터 같으니라고.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밀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이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p.102


  「네, 맞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진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도 근본적으로 똑같은 종류의 짐승입니다. 여자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내 속에도 깊게 흐르죠. 그건 여자와 남자가 함께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힘을 합쳐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p.241



'모리스' 를 읽고

위로 2017. 6. 19. 16:56
모리스 - E. M. 포스터 전집
국내도서
저자 : 에드워드 포스터(E. M. Forster) / 고정아역
출판 : 열린책들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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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리스'에 감명받아 읽게 된 E.M 포스터 '모리스'는 무척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E.M 포스터의 책은 처음이지만, 앞으로 그의 소설을 시간 되는대로 많이 읽고 싶다. 모리스가 대학 시절 E.M 포스터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작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한데, 결과적으로 난 작가 포스터도, 인간 포스터도 좋아하게 되었다.

  또 영화에서는 모리스를 버리는 클라이브가 원망스럽고 미웠지만 책을 읽으니 클라이브에게도 동정심이 생겼다. 특히 아래 구절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무도 반듯해서 난 너의 평범한 우정을 오해했지. 네가 나한테 아주 다정하게 대했을 때, 특히 내가 학교로 돌아왔던 날...... 난 그게 뭔가 다른 것인 줄 알았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해. 난 역시 책과 음악 밖으로 걸어나올 권리가 없었어. 널 만나기 전까지 난 그렇게 살았거든. 사과든 뭐든 내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겠지만, 홀, 진심으로 사과한다. 네게 모욕감을 준 일은 영원토록 나를 슬프게 할거야.」

p. 90


  내가 이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찢어졌던 건, 밑줄을 그은 클라이브의 말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난 아직도 책과 음악 밖으로 걸어나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클라이브가 타고난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여자를 택하는데 소설에서는 갑자기 남자가 아닌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모리스와 헤어진다는 점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클라이브의 모델이자 대학시절 포스터가 사랑했던 실존 인물 '휴 매러디스' 도 실제로 이성애자가 되어 여성과 결혼했던건지 궁금하다. 


  남들과 다른 사람들을 흔히 '특별한' 사람 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특별함'이 거대한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모리스 역시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로 인한 두려움에 학창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괴로워하며,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혼자 발버둥 친다. 남들처럼 혹은 남들만큼 살고 싶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여 좌절하고 때때로 자신에게 실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모리스의 외로운 분투에 공감하며 진심으로 그를 응원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모리스가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알렉 스커더'로 인해 스스로 특별함을 인정하며 누구도 속이지 않고 살기로 다짐하는 결말은  나에게 그 어떤 연애 소설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벅차게 다가왔다.


   「클라이브, 넌 참 바보구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너야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에 아름다운 사람은 너뿐이야. 나는 네 목소리를 사랑하고, 너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 사랑해. 네가 입은 옷, 네가 있는 방까지, 나는 너를 흠모해」

p. 113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건 어떨까?」

  이런 말을 내뱉은 뒤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도 없었고, 죽음 너머의 세계도 알지 못했으며, 집안 망신 같은 것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의 독기에 취해 나날이 더 불행해질 뿐 아니라 더 깊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죽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자살하는 방법들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고, 실제로 뜻밖의 사건만 없었다면 권총 자살을 감행했을 것이다.

p. 171


  그러나 모리스한테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중요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주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철저히 혼자인데, 왜 살아가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아무 데도 없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 암울한 예감이 들었다. 죽음도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음도 사랑처럼 그를 힐끗 한 번 바라보고는 그가 <분투하도록> 남겨 두고 돌아섰다. 그는 어쩌면 할아버지만큼이나 오래 분투하고, 또 그만큼 우스꽝스럽게 은퇴해야 할지도 몰랐다.

P. 177


  그들의 과거의 책은 책장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기, 어둠과 죽어 가는 꽃들에 감싸인 여기가 바로 그 자리였다. 그는 알렉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는 새것과 옛것이 섞이는 고통을 겪을 수 없었다. 모든 타협은 속임수고 그러므로 위험하다.

P.309


  마지막 지은이 E.M 포스터 의 후기에서




이때부터 클라이브는 점차 타락의 길을 걷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도 차가워진다. 그는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괴롭히고, 그의 메마름과 정치인 같은 태도와 벗겨지는 머리를 강조했다.
p. 316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혼자 깔깔깔 웃고 말았다. 외국에서도 남자가 대머리 되는 건 최악의 저주 중 하나인가보다. 지은이의 말을 보고 E.M 포스터 작가의 사진을 찾아보니 머리카락이 아주 까맣고, 숱도 많으신 편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말씀도 하셨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