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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다이어리 고르기

일상 2007. 12. 3. 17:19

다음년도 내 다이어리의 이름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다.
음헤헤헤헤.
평소 소심의 끝을 달리는 나로서는 가슴이 답답하면 책상에 쪼그려 앉아서 다이어리에 내 우울을 토로한다. 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울적한 감정은 덜어진다.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난 다이어리를 중3때부터 썼는데, 1년내내 한 다이어리를 쓰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해에 다이어리를 샀으면 1년내내 그 다이어리를 쓸 수 있다.
대신 다른 여자애들 처럼 이쁘게 꾸미는 데는 잼병이다. 고작해야 색연필로 찍찍 줄을 긋거나 스티커 하나 띡 붙여놓는 식. 다른 여자애들은 어떻게 그렇게 꾸미는지 신기하다. 근데 난.. 그런거 좀 별로다. 다이어리를 쓰고싶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쓰는 느낌이 들어서.
고1때 홍대 나온 미술선생이 있었는데 그 미술선생의 취미는 책상위에 올려져 있는 여자애들 다이어리 보기 라고 그랬다. 내용은 안볼테니 내가 니네 다이어리 들면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진짜로 안 읽었을까?) 그 이유인 즉슨 여고애들이 다이어리 꾸며놓은 거 보면 가끔 놀랄 정도로 미적으로 멋있는 페이지 들이 있어서 자기가 일할때 아이디어로 참고하기 위해서랜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다이어리 꾸미는 거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미술시간에 해달라고 흐흐. 뭐 내 다이어리는 열외였지만;
난 다이어리를 다 모아놓긴 했는데 예전에는 그 다이어리를 다신 펼쳐보지 않고 나중에 결혼할 때 남편될 님에게 줘야지. 했다. 하지만 며칠전에 재작년 다이어리 한페이지를 읽고서는 미련없이 그 생각을 접었다.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낯뜨겁고 나 진짜 왜이랬니? 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나.
다행스러운 건 내 주변의 다이어리 열심히 쓰는 사람들이 거의 동일하게 나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거다. 내 친구 하나는 며칠 전 발견한 2005년 다이어리를 누가 볼까봐 다 찢어 버리느라 손아파 죽는 줄 알았다고 하고, 다른 친구 하나는 무조건 새해에 작년 다이어리를 아무도 못보게 버린댄다. 이건 다이어리를 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수치감 이다.
나 역시도 가끔 종이가 되어준 나무에게 사죄해야 할 정도로 찌질한 내용들을 적어놓지만, 그로써 내 맘이 가벼워지기 때문에 다음 해 다이어리는 修身에 촛점을 맞췄다.
'마음의 평화'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중에 고민하다가, 왠지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로 정했다. 1년 내내 내 곁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열심히 고르는 편이다. 다이어리에 집착이 심한 한 친구와 함께 작년에는 코엑스를 갔다. 거의 '다이어리 원정대' 라고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코엑스에 있는 모든 다이어리를 봐주겠다는 각오로 다이어리 구경에 임했는데 결국 체력이 딸려서 몇 개 못봤다. 요즘 한참 다이어리가 나오는 시즌이라 틈틈히 구경하고 있는데, 나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한 다이어리 고르기 기준을 알려주고자 한다. (큭. 인생에 절대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1. 딱딱한 하드 커버 별로 안 좋아한다.
2. 그림 너무 많으면 안된다. 특히 글씨쓰는 부분은 흰색이었으면 좋겠다.
3. Monthly 만 쭉 있고, Weekly 만 쭉 있는 것 보다는 Monthly + Weekly 가 12개월 반복 되는게 좋다.
4. Weekly 가 한쪽에 좁게 있는 것 보다 두쪽에 넓게 있어야 한다. (Weekly 제일 열심히 쓴다)
5. 특정 목적을 위한 칸 (용돈기입장, 체크리스트, 쇼핑목록, 영화 티켓 붙이는 란 등등) 싫어한다.
6.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안된다. 가지고 다니기 좋아야 하니까.
7. 본드제본 말고 실제본이 좋다. 그래야 쫙 펴진다.
8. 종이가 두꺼우면서 연필도 잘 써지는 재질이어야 한다.
9. 각 시각별 계획이나 일일 계획표가 있는 건 최악이다.
10. 가격은 이만오천원 이내!

대략 이런 기준으로 다이어리를 구경하지만,
결국 나는 작년에 던킨도너츠에서 공짜로 주는 다이어리를 썼다. 왜냐하면 위의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다이어리는 내가 제작하기 전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년도에 거의 부합하는 다이어리를 찾았으나 아끼는 웹카툰을 그리는 작가들의 다이어리를 보면서 침 흘리다가 결국 저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아래에 보이는 다이어리로 결정했다. (내가 그렇지 뭐;)
내년이면 이제 20대 후반인데. 나 참 어울리지 않게 이런 다이어리 써도 되나 몰라;; 쫌 부끄럽네.

그래도 귀여워서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