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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화재경보

일상 2012. 1. 3. 22:49
* 아래 쓴 모든 불평불만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C 교수님은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과에서 유일하게 진짜 교수라고 생각하는 분이십니다. 엉엉 (못내 죄책감 들어서 한마디 써놓음)

요즘 학교에 무인경비시스템을 새로 달았는데, 거기에 문제가 생겨서 틈만 나면 화재경보가 울린다. 내가 일하고 있는 건물이 학교 내에서 제일 큰 건물인데 그 건물 전체에 화재경보가 울리면 정말로 시끄러워 죽을 것 같다. 
오늘은 한번 울렸지만, 어제는 3번이나 울렸다. 일단 한번 울렸다하면 수습하는데 15분은 족히 걸리고, 15분 동안 별 수 없이 온전히 그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다. 

저저번주 금요일에는 모학과 연구실에서 진짜로 불이 나서 복도 전체에 연기가 가득했는데 정작 그때는 화재경보가 울리지 않아서 대학원생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불이 난 사실을 전혀 몰랐다.
밑에 집 불나서 새벽 3시에 대피한 뒤로는 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아직까지도 그때의 휴유증으로 뉴스에서 불이 났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연기로 질식사하는 상상을 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고장난 화재경보라 하더라도 심적으로 괴롭다.
시도때도 없이 평온한 가운데 울리는 화재경보 때문에 정말로 불이 났을 때 울리는 화재경보에도 지금처럼 안이하게 대처할까봐 그것도 나름 걱정이다. 정말로 불나면 지금 일하는 2층 사무실 창문으로 뛰어내려버려야지. 2층이니까 죽진 않을거야. (다행히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아스팔트 아니고 흙임)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건 교수들의 불평불만이다. 내가 만약 일반 회사에서 화재경보가 잘못 울렸으면 잘못울렸구나 누군가가 꺼주겠지 하고 신경끄고 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화재경보가 울리면 교수 중  어느 누군가가 나한테 찾아 오거나 전화를 한다. 빨리 화재경보 끄라고. 나도 다른 방도가 없는데 무조건 시끄러우니까 끄랜다. 그럼 난 교수들의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좌불안석으로 어디에 전화를 해야 이 화재경보를 끌 수 있을 것인가 골몰하는 척을 하거나, 찾아온 교수가 있을 경우에는  "내가 지금 이 화재경보를 끄라는 당신의 명령에 부합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다" 는 것을 교수에게 충분히 보일 목적으로 여기 저기 전화를 해봐야만 한다.
이런 경우는 화재경보 뿐 만이 아니다. 옛날 건물이라서 라디에이터 중앙난방을 하고 있는데 본부에서 넣어주는 난방이 너무 더우면 덥다고 또 나한테 와서 불평불만, 빨리 전화해서 난방 줄이라고 하라고 난리다.

안 그런 교수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은 말한마디 하면 학교 안에서는 무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되는 줄 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학교에서는 교수 말한마디하면 진짜로 안될 것 같은 것도 어떻게든 다 된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윗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일해야 했을 때 느끼는 비애를 조금은 알 것 도 같다. 군대는 더 심할거 아냐. 안되면 되게하라 정신이) 교수 말에 불복종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같은 직급 교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냥 직원이나 하다못해 나같은 조교는 복종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씨다바리 오브 씨다바리, 세계 최고의 씨다바리라서 그런건지 내 정신까지도 완전히 오염이 된 것인지 요즘에는 화재경보가 울리는 15분 동안 불안해서 죽을 지경이다.
머릿속에는 온통 '교수들이 3분 지나면 전화해서 또 뭐라 하겠지, 아아.. 아직도 화재경보가 안꺼졌어 좀만 있으면 또 누군가가 오거나 전화하겠구만.' 하는 생각 뿐. 

아 이렇게 괴로워해봤자 내일도 분명 화재경보가 울릴 것이 틀림없다. 아... 억울하면 교수해야지 뭐. 불평하면 뭐하냐. 면서 불평만 가득 적고 오늘 일기 끝.